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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23 13:34
[한국사] 천진시 정해현과 고대의 '요동'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347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17세기/청나라) 북직 4

河間府東至海豐縣三百里,南至山東德州二百五十里,西南至真定府冀州二百三十里,西至真定府定州二百有八里,西北至保定府安州百二十里。自府治至京師四百十里,至南京二千一百四十里。

靜海縣(河間)府東北百八十里。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

ㅡ 하간부 정해현 동북 150리는 산동과 요동의 접경으로 옛 이름은 발해이다.


정해현.jpg


정해현 동북 150리는 영정하와 조백하가 모여드는 지점

# 요동 추적에 붙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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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9-23 13:48
   
"바다는 정해현 동북 150리에 있는데 산동과 요동의 접경으로 옛 이름은 발해이다"


정해현

https://en.m.wikipedia.org/wiki/Jinghai_District



징하이 현
중국 톈진 시
구글지도

https://goo.gl/maps/QKwCJKb8YYr
도배시러 18-09-23 13:55
   
청나라때 독사방은 주류사학과 크게 다른 요동개념을 가지고 있었네요
     
감방친구 18-09-23 14:05
   
주류사학자 10새끼들 두들겨 패서 kill하고 싶네요
도배시러 18-09-23 21:21
   
◆ 독사방여기요 순천부 계주 옥전현 무종성 , 讀史方輿紀要 卷11 北直2 順天府

薊州,〈府東二百里。東至永平府三百里,南至天津衛二百里,北至古長城二百三十五里。〉
 玉田縣,州東南八十里,西南至寶坻縣九十里。春秋時,爲山戎無終子國。秦置無終縣。漢因之,屬右北平郡。
  無終城,在縣治西。春秋時山戎國也。秦置無終縣。項羽封韓廣爲遼東王,都無終。
    漢初臧荼擊殺廣於無終,併其地。  漢滅荼,亦置無終縣。

무종성(無終城) : 옥전현 치소의 서쪽에 있다. 춘추시대의 산융, 무종자국이다. 진시황때 무종현(無終縣)이다.
 항우(項羽)가 한광(韓廣)을 요동왕(遼東王)에 봉했는데 도성은 무종(無終)이다.
 한나라 초기에 장도(臧荼)가 무종에서 한광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다.
 한나라는 장도를 죽이고 무종현(無終縣)을 두었다.

===> 고조선 시대,  패수 서쪽 요동의 중심지 무종현 ... 한나라의 연왕 노관과 위만 등장 이전
     
감방친구 18-09-24 05:47
   
더 추적해 봐야 할 일입니다
어쨌거나 위만이 건넌 패수는 조백하를 중심으로 좁혀집니다

위톈 현
중국 허베이 성 탕산 시

https://goo.gl/maps/cjc7Gi4tzDM2
     
감방친구 18-09-24 05:57
   
요사 지리지 남경도에서는
당 무덕 원년, 618에 설치한 영주가 현 창려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18에 현 창려에 영주를 설치했다)

요 광녕현이 금 창려현이 됐습니다

창려는 영주가 늦어도 8세기부터 그곳이 거란 땅이 되기까지 계속 있던 곳으로 여러 사서와 고지도에서 그대로 확인이 되는 곳입니다

문제는 고구려를 침략한 수당 시기, 즉 6세기 말~7세기 초의 영주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입니다

창리 현
중국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https://goo.gl/maps/opZiPPsuuF12

이러니
무종, 즉 옥전현과 영주가 가까운 것처럼 사서들이 기술하는 것이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어양ㅡ옥전ㅡ영주

이렇게 배치가 되는 건데요

그러나 지난 봄에 제가 기를 쓰고 영주를 추적하며
여러 사서에서의 영주 기술을 시간 순 대로 정리하고
또 영주 관할 속주의 교치상을 추적하였던 것에서 보이듯이

영주 남쪽에 유주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주는 소극적으로 보더라도 현 북경 인근 동북쪽, 또는 북쪽에 위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배시러 18-09-24 06:16
   
한나라 유성의 위치 => 북경의 동북쪽, 밀운현의 북쪽

> 청나라 독사방여기요 순천부 창평주 밀운현
 白檀廢縣,〈在縣北。漢置,以縣有白檀山而名。後漢廢。建安中,曹操歷白檀,破烏桓於柳城,即白檀故城也。

백단 폐현 : 밀운현 북쪽에 있다. 한나라가 설치했으며 백단산이 있다. 후한때에 폐했다.
196-220년에(건안 중) 조조가 백단을 지나서 유성에서 오환을 격파 하였다.
즉, 유성(柳城)은 백단 고성(白檀故城)이다.

=> 유성(柳城) 이란... 유성현 village 와 유성(柳城) castle 의 의미가 혼재
     
감방친구 18-09-24 06:29
   
빙고!
도배시러 18-09-24 06:37
   
체크
정해현이 아니라 흥제현 興濟

海 : 在[興濟]縣東北百五十里
     
감방친구 18-09-24 06:41
   
Xingjizhen
중국 허베이 성 창저우 시 창 현

https://goo.gl/maps/ZxxEYTZREHm
     
감방친구 18-09-24 06:48
   
잘못 보셨어요
바다가 동북 150라는 것은 정해현 항목입니다
          
도배시러 18-09-24 06:51
   
https://zh.wikisource.org/wiki/%E8%AE%80%E5%8F%B2%E6%96%B9%E8%BC%BF%E7%B4%80%E8%A6%81/%E5%8D%B7%E5%8D%81%E4%B8%89

興濟縣,〈府東百八十里。南至滄州八十里。宋清州範橋鎮地。大觀初,改置興濟縣。金初屬滄州。大定六年改屬清州。元省,尋復置,屬清州。明初改今屬。縣無城,編户十里。縣今廢。〉

衛河,〈在縣城西。自滄州流經此,又北入青縣界。舊爲大河所經。《宋史》:「慶曆八年大河自澶州商胡口,北流至乾寧軍入海。熙寧初,議者欲閉北流,回河東注。提舉河渠王亞言:「黃、御河帶北行,入獨流東寨,經乾寧軍、滄州等八寨邊界,直入大海。海口闊至六七百步,深八九丈。三女寨以西,闊四百步,深五六丈,其勢愈深,其流愈猛,此天所以限契丹也。若再開二股,漸閉北流,此未睹黃河在界河內東流之利耳。不報。宋末,大河南徙。元引會通河,而衛河遂爲轉輸要道。縣城西北,舊有範橋渡,爲衛河津口,縣名興濟蓋以此。〉
獨流河,〈在縣北。《志》云:「自縣西北四十里,而至青縣。舊時黃、禦二河,皆溢入於此。今縣有獨流淺,其地多蒲葦之利。〉
西濼,〈在縣西南。東西橫亘凡十餘里,南北二十餘里。秋後水漲,一望無際。魚蒲之利,每鐘於此。〉
海清寨,〈在縣東北。宋初,置巷孤寨,屬滄州,爲沿邊戍守處。政和二年改曰海清。金廢。乾寧驛,在縣治西,洪武中置。〉
靜海,〈縣府東北百八十里。西南至青縣七十里,西北至霸州文安縣八十里。漢東平舒縣地,屬渤海郡。宋爲清州窩口寨。金明昌四年始置靜靖海縣,屬清州。元初省,尋復置。明初改靖爲靜,又改今屬。土城周六里,編户十五里。〉
當城,〈縣北六十里。宋之當城寨也。又十里爲里堡城,地名稍直口,北去小直沽二十里。宋咸平中,議者以北河可涉,宜有城守,以備北邊。詔築城其地,謂之當城。郭謐曰:「決黃河、御河之水,下注當城。是也。金廢。《志》云:「縣南二十里有古城,蓋亦宋時戍守處。〉
軍糧城,〈縣東北百六十里。《志》云:「元海運時屯糧之所。又呂彭城,在縣境天津衛西北二十里。相傳彭越、呂布皆嘗屯兵於此,因名。〉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
               
도배시러 18-09-24 06:52
   
이것들이 문장 배치를 잘못했네요.
맞습니다. 정해현 항목이네요.
이쁘게 배열된것을 생각없이 보면 흥제현 항목이고... 찬찬히 보면 정해현 항목이네요
                    
도배시러 18-09-24 07:00
   
靜海,〈縣府東北百八十里  수정 => 靜海縣, <府東北百八十里
한문 띄어읽기의 마법
               
감방친구 18-09-24 06:54
   
주석이 잘못된 겁니다
흥제현과 정해현은 남북으로 붙어있는 곳입니다
내용을 잘 보세요
     
감방친구 18-09-24 06:49
   
흥제현 항목에는 저 기술이 없습니다
     
감방친구 18-09-24 06:50
   
정해현은 제가 지난 겨울에 가탐 2도 분석 고증하면서 거론했던 것을 다시 읽어보다가 발췌해서 요동 추적에 붙인 거예요
도배시러 18-09-24 06:44
   
구글어스 잘 사용하시네요 ㅋ
감방친구 18-09-24 06:52
   
흥제현 ㅡ 북직4

興濟縣府東百八十里。南至滄州八十里。宋清州範橋鎮地。大觀初,改置興濟縣。金初屬滄州。大定六年,改屬清州。元省,尋復置,屬清州。明初改今屬。縣無城,編戶十里。縣今廢。

衛河在縣城西。自滄州流經此,又北入青縣界。舊為大河所經。《宋史》:慶歷八年,大河自澶州商胡口,北流至乾寧軍入海。熙寧初,議者欲閉北流,回河東注。提舉河渠王亞言:黃、御河帶北行,入獨流東寨,經乾寧軍、滄州等八寨邊界,直入大海。海口闊至六七百步,深八九丈。三女寨以西,闊四百步,深五六丈,其勢愈深,其流愈猛,此天所以限契丹也。若再開二股,漸閉北流,此未睹黃河在界河內東流之利耳。不報。宋末,大河南徙。元引會通河,而衛河遂為轉輸要道。縣城西北,舊有範橋渡,為衛河津口,縣名興濟蓋以此。

獨流河在縣北。《志》云:自縣西北四十里,而至青縣。舊時黃、御二河,皆溢入於此。今縣有獨流淺,其地多蒲葦之利。

西濼在縣西南。東西橫亙凡十餘里,南北二十餘里。秋後水漲,一望無際。魚蒲之利,每鐘於此。

海清寨在縣東北。宋初,置巷孤寨,屬滄州,為沿邊戍守處。政和二年,改曰海清。金廢。乾寧驛,在縣治西,洪武中置。
감방친구 18-09-24 06:56
   
정해현 ㅡ 북직4

靜海縣府東北百八十里。西南至青縣七十里,西北至霸州文安縣八十里。漢東平舒縣地,屬渤海郡。宋為清州窩口寨。金明昌四年,始置靜靖海縣,屬清州。元初省,尋復置。明初改靖為靜,又改今屬。土城周六里,編戶十五里。

當城縣北六十里。宋之當城寨也。又十里為里堡城,地名稍直口,北去小直沽二十里。宋咸平中,議者以北河可涉,宜有城守,以備北邊。詔築城其地,謂之當城。郭謐曰:決黃河、御河之水,下注當城。是也。金廢。《志》云:縣南二十里有古城,蓋亦宋時戍守處。

軍糧城縣東北百六十里。《志》云:元海運時屯糧之所。又呂彭城,在縣境天津衛西北二十里。相傳彭越、呂布皆嘗屯兵於此,因名。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應劭曰:海之橫出者,曰勃。元行海運,以天津海道為咽喉要地。前朝亦嘗通運於此。嘉靖三十八年,遼撫侯汝翼,以遼東大饑,議移粟天津。其入遼之路,自海口發舟,至廣寧右屯河通堡,不及二百里,中間若曹泊店、月沱、桑沱、姜女墳、桃花島、咸可灣泊,各相去四五十里,無風濤、盜賊之虞。從之。尋復罷。《志》云:天津一隅,東南漕舶鱗集,其下去海不過百里,風帆馳驟,遠自閩浙,近自登、遼,皆旬日可達。控扼噤要,誠京師第一形勝處也。

하략
감방친구 18-09-24 07:11
   
문제는 고고학이죠

현 요심지역까지
BC 4~3세기부터 확연하게 나타나는 중국계 물질문화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기존 주류학설 대로라면
현 요심지역이 전국시대 요동이고 연의 요동이고 진의 요동이고

연장성과 진장성이 여기까지 있었으니
말이 맞아떨어지는데

실제로 사서에는 다르게 적혀있거든요

한나라 물질상만 보더라도
요심 지역까지는 확연한데
정작 학계통설에서 왕검성이 있었다는 서북한 평양에는 흐릿합니다
오히려 문화교류상으로 나타나지
     
도배시러 18-09-24 07:24
   
연나라 전성기와 진시황때까지는 중국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받는 고조선 영역이 일부 존재 => 사서기록
즉, 패수의 동쪽을 넘어서 직간접적인 지배를 했던게 연, 진 시기

한나라로 접어들면서 패수의 동쪽을 넘어가지 않음. 고조선이 서쪽으로 영역확장 => 사서기록

즉 패수의 동쪽, 진시황의 상하장이 존재하던 곳에 위만의 도성이 세워지고
고조선 준왕의 왕성은 상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
          
감방친구 18-09-27 03:45
   
자, 이것을 명도전 출토지와 교차해 보면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경으로부터 현 요심지역까지

이 지역은
번조선(변한, 변조선, 불한, 불조선)이 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선계 유민들을 끊임 없이 받아들이고
또 중국 세력과 경쟁하면서 물질문화적으로 중국적 색채를 자연스럽게 띠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더구나 위만은 연나라의 최고위급 인사였고
위만을 따르던 사람들, 규합된 무리, 역성혁명을 통해 정권을 차지한 사람들 역시 전국연을 비롯한 망명자들이니
이들의 위만조선은 물질문화적으로 당연히 중국계 색채를 띠는 것
               
도배시러 18-09-27 17:05
   
즉 패수의 동쪽, 진시황의 상하장이 존재하던 곳에 위만의 도성이 세워지고
고조선 준왕의 왕성은 상하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
===>

패수 동쪽 진상하장 ~ 고조선 준왕/부왕의 도성
그 사이를 위만이 확보 했으니 중국색채의 물질문화가 나오는게 맞습니다.

한국사의 시작을 위만조선에서 시작하면서 고조선 준왕을 무시하다보니
물질문화 해석이 어려워지죠.

위만조선 왕험성과 고조선 부否왕의 도성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쉬워지죠.
그리고 위만은 조선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해석이 더 쉬워짐.
                    
감방친구 18-09-27 20:49
   
위만이 망명하기 전부터 물질문화가 확연히 교체됩니다

근거를 가지고 추정을 하셔야죠
                         
도배시러 18-09-27 20:57
   
위의 주장은 단기간 + 공간 개념 이고요.

크게 시기를 둔다면
연-진 시기에 중국색채의 물질문화가 나오면 정상이고요. B.C 300 ~
                         
감방친구 18-09-27 21:53
   
BC 350~300
전국 연 물질문화의 전개양상

https://youtu.be/mQyi1vjQyr4

37분 8초 경 지도를 보세요
                         
도배시러 18-09-27 23:08
   
사서기록과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안보이네요.
연나라가 조선을 공격후 관리를 두고 뒤이어 진시황도 조선을 공격한 부분...
시기적으로 BC 300 ~206 사이

그리고 잠깐 동안 고조선 준왕이 회복하려다가 BC 194 ~ 위만조선 탄생
*** 연나라 사람 위만은 기존의 친숙한 연나라 문화를 고착시키고
짧은 기간 남겨진 진시황의 흔적을 제거 ?  진-상하장=>왕험성으로 개축 ***

그러면 ~ BC 300 이전의 중국색채의 물질문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
> 연-조선의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 할수있는 문헌

위지동이전 마한편에서
[1] 위략(魏略)에 옛 기자(箕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周)가 쇠퇴해지니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점령하려하니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을 쳐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고,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 이후 한나라-조선의 교류 - 조선열전
[1] (사기)집해 : 한서음의에서 모두 5명이라 했다. 융적의 벼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니 대개 상(相)이라 칭했다. 唊의 음은 협(頰)이다.
 (사기)색은 : 응소應劭가 모두 5명이라 했다. 융적의 벼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니 대개 상(相)이라 칭했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 사람이다.

어양현 사람 로인이 위씨조선의 재상이 될수있었던 당시의 인적교류
[한나라 초기 요동 중심지 무종과 유주 어양은 가까운 거리]
                         
감방친구 18-09-27 23:44
   
제가 계속 주장했던 내용이잖아요
사료와 물질문화의 충돌은
전국시대 조선으로의 수많은 유이민 유입과 조선의 중국계 세력과의 경쟁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제가 님 얘기 지적한 거는
님 댓글에서
1) 위만 이후로 한정하여 말한 거
2) 위만은 조선 사람이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
3) 위만도성과 준왕도성이 다른 곳이므로 위만세력까지 중국계 물질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 거에 대해서 비판을 한 거 아닙니까
                         
감방친구 18-09-27 23:46
   
특히 위만이 조선계 연인이 아니라 그냥 중국인이라고 보는 주장은
강단주류의 위만조선 성격 약화 논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일부 재야에서도 이런 맥락논리로 한나라에 멸망한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비주류로 취급하려는 것과 맥을 같이 할 수 있는 위험한 논리입니다
                         
도배시러 18-09-27 23:57
   
위만을 조선인으로 볼 근거가 부족합니다.
-. 진나라 문화를 제거하고 연나라 문화를 유지한것.
-. 연-제-조의 피난민을 받아들였으나 연나라 문화를 고수한 부분
-. 추결상투는 서남이의 상투머리
-. 어양현 로인을 재상으로 등용
                         
감방친구 18-09-28 00:01
   
그렇다고 아예 짱꼴라로 볼 수도 없죠
기존 학계의 입장대로
ㅡ 조선계 연인
으로 보고 들어가는 게 타당하지

위만은 짱꼴라다 아니다 따지는 거는
쭝궈 씹새끼들 동북공정에 놀아나는 거밖에는 안 됩니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아예 위만조선 자체가 중국역사가 되는 함정에 빠집니다
                         
도배시러 18-09-28 00:03
   
제가 찾는 것은 고조선 준왕과 부왕 40여세대를 이어온 영역과 역사이지요.
위만조선의 역사는 백년도 안되는 부분.
                         
감방친구 18-09-28 00:04
   
추결 표현을 자꾸 서남이 상투라고 하시는데
그 근거 좀 보여주세요
상투는 님 여기 활동 초창기 때 제가 설명을 해드린 것으로 아는데요

진계 문화를 없앴다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그리고
국호도 여전히 조선으로 존치,
관직명도 중국과는 다르고
                         
감방친구 18-09-28 00:06
   
요동 추적을 통해서 조선의 서계를 이해하고
조선 영내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확연히 진행된 연계 물질문화상을 기존 학계의 요심지역까지 중국땅이 됐다는 것에 반하여 새롭게 해석하는 논의에서 왜 갑자기 논점을 이탈하여 40세가 나옵니까
                         
도배시러 18-09-28 00:11
   
추결상투로 유명한 인물 : 정정, 위만

> 사기 화식열전 史記 卷129 貨殖列傳 第69
程鄭,山東遷虜也,亦冶鋳,賈椎髻之民,[1]富埒卓氏[2],倶居臨邛.
[1]索隠魋結之人. 上音椎髻,謂通賈南越也.
[2]索隠埒者,鄰畔,言鄰相次.

정정(程鄭)은 산동에서 이주시킨 포로였다. 역시 제철업을 했고,
추결상투를 하는 사람들과 거래했다.
그 부유함이 탁씨와 비슷했고 (그들과) 임공(臨邛 촉군 : 낙양의 서남쪽)에서 살았다.
                         
도배시러 18-09-28 00:15
   
진계 문화를 없앴다는 추론

패수 동쪽 진나라 상하장 고공지... => 패수 동쪽 왕험성

진나라 성곽을 고쳐 위만 왕험성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감방친구 18-09-28 00:19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진짜
왜 그러세요?

상투는 우리만 튼 게 아닙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망명할 때 머리모양과 옷차림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니 조선에 망명하는 사람이 다른 종족 행색을 하고 망명을 해요?

진나라 성곽을 고쳐 왕험성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어디있으며 또 그러했다 하더라도 그게 진나라 문화를 없앴다는 근거가 됩니까?

난하 동쪽에서 연ㅡ진ㅡ한계 물질문화상이 순차적으로 나타나요
                    
도배시러 18-09-28 00:37
   
위만의 추결상투
=> 고조선이 연나라와 적대관계라면 인접국가가 아닌 서남이의 상투로 위장

진계문화 말살
=> 추가적인 유물에 의해 뒤집힐수있는 부분
문헌에서 계의 서쪽에 진시황의 갈석궁이 있다고 했는데...
최근에 산해관 동쪽에서 갈석궁을 찾았다고 발굴중이라는 소식이 있음.
패수 동쪽의 진나라 상하장 유적이면 좋겠음.
                         
감방친구 18-09-28 00:39
   
추결이 서남이의 상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아이고
          
감방친구 18-09-27 03:47
   
          
감방친구 18-09-27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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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 [기타] 역사 뒤집어 보기, 역썰 22회ㅣ고려 국경 조작사3 관심병자 05-15 902
19700 [기타] 고조선, 고구려의 최대 영토 ; 중국문헌 분석을 통한 … (1) 관심병자 05-14 1630
19699 [기타] 역사팩트 - 칭기즈칸은 대조영의 후손이 정말 맞는 … 관심병자 05-14 1170
19698 [기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고구려는 가짜? 진짜 고구려 땅… 관심병자 05-14 1033
19697 [일본] [한청일삼국지도] 독도 논란 종결! 1894년 일본제작 지… 유위자 05-04 1701
19696 [기타] 역사적으로 튀르키예가 한국더러 ‘형제의 나라’라… (21) 관심병자 04-30 3028
19695 [한국사] 우리나라가 한번도 외국을 침공하지 않았다는 사람… (15) 천의무봉 04-23 3029
19694 [한국사] "책보고"같은 유투버들 영상내용을 신뢰하는 분들께 (13) 하이시윤 04-23 1959
19693 [기타] 한국의 다양한 보검들 관심병자 04-22 1852
19692 [한국사] 조선과 명나라가 삭제한 고려의 진동행성(鎭東行省) … (1) 구르뫼 04-19 2546
19691 [중국] 한국사는 중국인 친구가 많은데,,, (10) 살강살강 04-15 3320
19690 [한국사] 고구려 장안성,동황성 위치 지도 (14) 파스크란 04-12 2218
19689 [기타] 실록에서 찾아낸 아무도 몰랐던 황희 정승의 진짜 모… 관심병자 04-02 2306
19688 [한국사] 지도로 보는 고조선 기자국 위만국 한사군 위치(윤내… (1) 하이시윤 03-26 2152
19687 [한국사] 기자동래설ㅡ종합 (5) 하이시윤 03-24 1421
19686 [한국사] 기자동래설ㅡ윤내현 기자신고 요약 하이시윤 03-24 1123
19685 [한국사] 기자동래설ㅡ긍정설 하이시윤 03-24 926
19684 [한국사] 기자동래설ㅡ문헌기록과 부정설 하이시윤 03-24 921
19683 [한국사] 고조선이 이후 등장한 국가들보다 영역이 넓었던 이… (1) 하이시윤 03-21 1675
19682 [기타] 검정고무신 속 특이한 옛날 먹방&문화 관심병자 03-18 1408
19681 [한국사] 최리의,낙랑국 (27) 하이시윤 03-18 1742
19680 [한국사] 낙랑기와 하이시윤 03-18 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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