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종성(無終城) : 옥전현 치소의 서쪽에 있다. 춘추시대의 산융, 무종자국이다. 진시황때 무종현(無終縣)이다.
항우(項羽)가 한광(韓廣)을 요동왕(遼東王)에 봉했는데 도성은 무종(無終)이다.
한나라 초기에 장도(臧荼)가 무종에서 한광을 죽이고 그 땅을 차지했다.
한나라는 장도를 죽이고 무종현(無終縣)을 두었다.
===> 고조선 시대, 패수 서쪽 요동의 중심지 무종현 ... 한나라의 연왕 노관과 위만 등장 이전
사서기록과 크게 충돌하는 부분은 안보이네요.
연나라가 조선을 공격후 관리를 두고 뒤이어 진시황도 조선을 공격한 부분...
시기적으로 BC 300 ~206 사이
그리고 잠깐 동안 고조선 준왕이 회복하려다가 BC 194 ~ 위만조선 탄생
*** 연나라 사람 위만은 기존의 친숙한 연나라 문화를 고착시키고
짧은 기간 남겨진 진시황의 흔적을 제거 ? 진-상하장=>왕험성으로 개축 ***
그러면 ~ BC 300 이전의 중국색채의 물질문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
> 연-조선의 교류가 있었다고 추정 할수있는 문헌
위지동이전 마한편에서
[1] 위략(魏略)에 옛 기자(箕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周)가 쇠퇴해지니 연나라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쪽 땅을 점령하려하니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燕)을 쳐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
(조선의)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중지하고, 예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연나라를 설득하니 연나라도 중지하고 공격하지 않았다.
> 이후 한나라-조선의 교류 - 조선열전
[1] (사기)집해 : 한서음의에서 모두 5명이라 했다. 융적의 벼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니 대개 상(相)이라 칭했다. 唊의 음은 협(頰)이다.
(사기)색은 : 응소應劭가 모두 5명이라 했다. 융적의 벼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니 대개 상(相)이라 칭했다.
로인(路人)은 어양현(漁陽縣) 사람이다.
어양현 사람 로인이 위씨조선의 재상이 될수있었던 당시의 인적교류
[한나라 초기 요동 중심지 무종과 유주 어양은 가까운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