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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17 22:40
[한국사] 역잘알님들 이순신관련 사실여부 판단해주세요.
 글쓴이 : Azd2onbk
조회 : 2,016  

얼마전에 이러한 내용에 대한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 교수님이 말한 내용인데,

'이순신이 영웅인건 맞지만 지금의 이미지처럼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의 모습은 박정희 때 영웅화 작업의 일환으로 어느정도 프레임이 씌워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내용은 대충

'명량해전을 예로 들었을 때 조선의 판옥선 13척과 일본의 배 130여척 등의 배의 숫자는 사실이지만, 영화와는 다르게 배의 크기에 큰 차이가 있다. 조선의 판옥선은 당시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배였고, 일본의 배는 왜소했다.'

'조선의 판옥선은 원래 전투목적보다는 식량을 운송하는 목적의 배로서 전투시에 개조하여 전투용으로 만든 배였다. 그래서 적선량이 세계에서도 손 꼽힐 정도의 큰 배였지만, 일본은 해상전도 백병전 위주였기 떄문에 소형선으로 빠르게 접근하는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함대를 살펴보면, 소형 배는 한 척에 20명 정도 탈 수 있는 배로 구성 비율이 가장 많았고, 중형 배는 40명, 대형 배도 100명을 채 못태웠다. 그리고 대형 배는 장군들이 타는 선박이어서 1척에서 2척 정도만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전에 일어났던 삼포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 사이의 국교가 한동안 끊겨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일본의 무기인 조총에 대해 잘 몰랐으며, 일본의 함대의 특징 또한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해 미리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임진왜란 바로 직전에 조선 각지에서 일본 승려가 많이 출몰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 일본에서의 지식인 계층 중 첩자활동을 할 수 있는 계층(글을 쓰거나 읽을 수 있는 계층)은 일본 승려 계층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각지에서 첩자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는 유교 사상의 강조로 인해 전투에 이기더라도 명분이 살지 않으면 배척받았다. 그래서 신립은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부딪혀 패했지만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고, 이순신은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도 뻔히 패배할 전투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가 절하 당해 중앙 관료들이 배척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미리 알고 이순신에 대해 평가해보자면, 이순신은 당시의 조선의 인물상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조선 관료와 장군들이 잘 몰랐던 일본의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고 화포 위주의 해상전을 벌여 일본을 철저히 격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영화 명량에서 나오는 일본과 백병전을 치루는 모습, 그리고 영화만 보고 일본의 배가 컸다고 생각하는 것 등은 잘못된 사실이다. 따라서 이순신은 당시 시대에 맞지 않은 뛰어난 사람이었고 나라를 구한 영웅인 것은 맞지만, 지금의 이미지처럼 완전무결한 장군까지는 아니었다.'

대충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서만은 확실한 자료를 찾지 못하여서 사실 여부를 따져줄 수있는 역잘알 님들에게  이 내용이 맞는 내용인지 질문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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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테클퇴장 18-10-17 22:46
   
신립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이전의 공적이 컸고 선조의 자신의 치적을 위한 평가일겁니다.

실록을 기반으로 말했을 듯 싶고. 이순신은 툭하면 월권을 했습니다. 전시였기에 가능했습니다.
     
Azd2onbk 18-10-17 22:47
   
배의 크기에 관한 내용은 사실인가요??

일본배가 20명 태우는 배가 주력이었다는게 뭔가 안믿겨서...
          
백테클퇴장 18-10-17 22:49
   
그건 익히 알려져있는 이야기입니다. 세키부네일거고 아타테부네가 대장선일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업적이 폄화되는게 아닙니다.

그런 배로도 고려때 고려군이 개박살이 났습니다.

그걸 보완하고 조직하고 함포전술을 도입하면서

승률이 갑자기 뛴것입니다.
               
Azd2onbk 18-10-17 22:51
   
아 그런가요? 그럼 배에 대한 내용은 사실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자기자신 18-10-18 02:20
   
하긴 그때 고려군은 해전경험이 전혀 없었죠 왜구들은 치고 빠지는게 특기라서 말이죠
          
헬로가생 18-10-17 22:52
   
세키부네도 20명은 아니예요 ㅋㅋㅋ
무슨 낚시배도 아니고.
한 5, 60명인 걸로 압니다.
               
Azd2onbk 18-10-17 22:53
   
그렇죠?

전투함이 20명이 말이 안되죠? 아무리 1500년대라 해도
백테클퇴장 18-10-17 22:53
   
사실 20명이든 5-60명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 일본의 백병전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기나긴 내전을 모두 겪은 실전형 군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유튜브에서 검색하시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Azd2onbk 18-10-17 22:55
   
왜군의 백병전의 강함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1대1로 백병전을 하면 명나라 병사든 조선 병사든 왜군에게 안됐다고 하는건 예전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포로 거리를 두고 싸운 것이겠죠.
          
백테클퇴장 18-10-17 22:57
   
님이 궁금한건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보시면 거의 다 나올거 같습니다.

재밌습니다. 전 전편 모두 다봤고. 인간에 대해서 많은걸 느꼈습니다.
               
Azd2onbk 18-10-17 22:59
   
어디서 보나요?
                    
백테클퇴장 18-10-17 23:02
   
                    
백테클퇴장 18-10-17 23:08
   
그리고, 1대1로 평가하기 좀 그렇습니다. 너무 잘싸워서. ;;

명도 여러번 심각하게 털려서. 만든게 원앙진입니다.

왜구가 너무 잘싸워서 혼자 하는 공수 전투법을 여러명으로 잘개 쪼개서

전문화 시킨 전법입니다.
헬로가생 18-10-17 22:58
   
그리고 이건 해전이죠.
육지전이 아니예요.
아무리 일본배가 작다고 해도 하나의 배입니다.

한마디로 호랑이 13마리 vs 표범 20마리에  늑대113마리라는 말이죠.

아무리 호랑이가 쌔도 엄청 불리한 상황입니다.

특급격투기선수 13명 vs 격투기선수 20명 + 일반인 113명 이랑 비슷한 거죠.
다굴엔 답이 없어요.
크긴 상관 없어요.

그걸 이긴 거죠.
     
백테클퇴장 18-10-17 23:01
   
그건 적절한 전술을 썼을시 얘기고. 해상근접전으로 일본이 원하는 백병전으로 전투시

원균꼴이 나는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의 업적이 결코 작은게 아니라는 거고요.

그리고, 20명도 당시 조선에겐 버겨웠습니다. ㅡㅡ 근접전은 절대 하면 안돼고

우리 민족은 나갔다 개박살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신에 수성전은 기가막히게 잘했습니다.
          
헬로가생 18-10-17 23:05
   
잘 못 읽으신듯.
제가 지금 그 말을 하는 건데요?
헬로가생 18-10-17 23:06
   


아타케부네가 판옥선이랑 비슷하고 세키부네도 그리 작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 낚시배같은 것도 몇 있었을 듯.
     
백테클퇴장 18-10-17 23:15
   
네. 그렇게 작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촛점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게 글쓴분이 얘기한 20명이라고 해도 접근전에는

절대 상대가 안됐고. 백병전에는 배의 크기는 무의미하다는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백병전을 허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군대범위에 들지도 않는 왜구정도에도 고려때

개털리면서 배우고 조직한 수군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헬로가생 18-10-17 23:17
   
저도 그 말 하는 거예요.
크기에 대한 건 그 부분만의 오류를 고쳐드리는 것일뿐이고 아무리 작아도 와서 붙으면 끝장인 것 133마리가 달려드는 걸 막은 엄청난 전술이라고.
               
백테클퇴장 18-10-17 23:21
   
제가 잘못 읽었나 봅니다.
pontte 18-10-17 23:39
   
이순신!이순신!이순신!
sangun92 18-10-17 23:39
   
'조선의 판옥선은 원래 전투목적보다는 식량을 운송하는 목적의 배로서 전투시에 개조하여 전투용으로 만든 배였다. 그래서 적선량이 세계에서도 손 꼽힐 정도의 큰 배였지만, 일본은 해상전도 백병전 위주였기 떄문에 소형선으로 빠르게 접근하는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함대를 살펴보면, 소형 배는 한 척에 20명 정도 탈 수 있는 배로 구성 비율이 가장 많았고, 중형 배는 40명, 대형 배도 100명을 채 못태웠다. 그리고 대형 배는 장군들이 타는 선박이어서 1척에서 2척 정도만 있었다.'

==>
1) 명량해전 당시, 왜 수군의 전선은 세키부네가 다수 주력이었음.
임란 초기에는 세키부네의 크기가 작았으나, 전쟁이 점차 진행되면서 세키부네의 크기가 커졌고
명량 해전 당시에는 탑승 인원이 80명 정도로까지 커졌음.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130명 탑승.

2) 왜 수군의 전선은 백병전용으로서 속도를 중시하여 크기가 작았다?

왜 수군 전선이 속도를 중시한 것은 맞으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한 것은, 전선 세키부네의 소형화가 아니라 전선 바닥의 형상이었음.
전선 바닥 형상을 오늘날의 전함처럼 역삼각형으로 만들어 파도의 저항을 적게 하여 속도를 높였음.
세키부네는 점차로 크기가 커졌는데, 속도 문제는 노의 숫자를 늘려서 해결하였음.

반면에 조선의 판옥선은 바닥이 편평하여 (평저선) 파도의 저항 때문에 왜 수군 전선보다 느렸음.
대신에 제자리 회전속도는 매우 빨라, 포격을 위주로 하는 조선 수군의 전술에는 지극히 유리하였음.
예를 들면, 좌현에 있는 포를 방포하고 나면, 즉각 제자리 회전하여 우현에 있는 포를 방포하고
그 사이에 이미 방호팼던 좌현의 포를 재장전하는 식이었음.
이런 방식으로 끊임없이 포격전을 벌일 수 있었음.

3) 13 vs. 133이 아니라 1 vs. 133임.

명량해전 초기부터 중반까지 실제로 전투에 임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 탑승했던 좌선 하나뿐이었음.
나머지 12척의 전선은 뒤에서 구경만 했음.
세가 급박해진 이순신 장군이 초요기를 올려 12척의 전선을 불렀으나 바로 어지 않았고
중반 이후에야 1-2 척 씩 다가와서 전투에 참여하였음.

실제로 난중일기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의 좌선 혼자서 전투에 임했고
혼자서 싸워서 올린 전투 성과가 31척의 침몰 또는 파괴였음.

그러니 13 vs. 133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1 vs. 31 이라고 말해는 것이 타당함.
패전하고 물러난 왜 수군 패장들의 기록에 따르면
133 척의 대부분은 나머지 12척의 전투 참가 이후에 침몰 또는 파괴되었다고 함.

참고자료
https://namu.wiki/w/%EB%AA%85%EB%9F%89%20%ED%95%B4%EC%A0%84
     
김석현 18-10-18 00:19
   
실제로 난중일기에도 이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의 좌선 혼자서 전투에 임했고 
혼자서 싸워서 올린 전투 성과가 31척의 침몰 또는 파괴였음. 

그러니 13 vs. 133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1 vs. 31 이라고 말해는 것이 타당함. 
패전하고 물러난 왜 수군 패장들의 기록에 따르면 
133 척의 대부분은 나머지 12척의 전투 참가 이후에 침몰 또는 파괴되었다고 함. 
------
이 부분은 처음듣는 부분인데요 그렇게 해석하시는게 맞는지 의문이네요
          
구름위하늘 18-10-18 10:55
   
밀리터리 소설 중에서 고증을 잘한 소설로 평가받는 김경진 작가의 임진왜란을 보면
구체적인 기록(주로 난중일기) 해석과 함께 해당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퉁퉁탱탱 18-10-21 13:33
   
난중일기를 그대로 한글화한 책도 시중에 여럿 나와있으니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본건 진짜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번역해 놓아서 소설 보듯이 보면 엄청 지루한데 거기에도 실제 상군92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그대로 나옵니다. "명량"이 영화적 상상력을 더했다고는 하지만 1대 다수의 상황은 사실입니다. 당시 칠천량 직후라 수군 사기가 바닥인 것을 이순신 장군 혼자 그만큼 멱살잡고 끌어 올린 겁니다. 통제사선 혼자서 전진하고 각 만호급 판옥선들은 뒤에서 쫄아서 구경 했고 나~중에야 혼자 그렇게 까지 싸우는것 보고 슬금슬금 나와서 싸웠습니다. 영화에서야 류승룡이 달려들다 칼맞고 죽었지 실제로는 물에 둥둥 떠있는 걸 항왜(준사)가 "저놈이 대장"이라고 하니 갈고리로 끌어올려서 모가지 쳐서 메달아 놓았죠.
 당시 전공 증명은 적의 목이 었는데 이순신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원균은 잘 싸우지도 않음서 전투 끝나고 시신 끌어다 모가지 쳐서 자기공으로 삼았죠.) 그런데도 굳이 적의 대장 목을 쳐서 장대에 메달아 놓은건 그만큼 전투가 격렬 했기에 적의 사기를 끌어내릴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incombat 18-10-18 00:38
   
고려시대 왜구는 수도를 위협할 정도였고 몇 만씩이나 되었습니다. 이성계가 스스로 꼽은 최대 공적이 왜 장수 아기발도를 물리친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 왜라는 존재가 일본만을 가리키는 것인지 중국 해안의 섬과 한반도 남쪽의 섬의 해안을 석권한 백제 잔존 세력, 혹은 그것을 이어받은 장보고와도 이어지는 세력인지 의문입니다.
모니터회원 18-10-18 00:50
   


판옥선과 같은 급의 안택선 모두 승선인원이 150여명 입니다.
단지 판옥선은 3층구조, 안택선은 2층구조로 되어 있죠.

그런데 인터넷상 크기 비교를 할때 동급의 안택선(아카케부네)이 아닌 '세키부네'와 비교를 합니다.
여기에서 오는 오류 또는 왜곡이 아닐까 합니다.

일본의 주력 전투함이 세키부네라고는 하지만 지휘함은 안택선이고,
임진왜란때 일본이 사에 대량으로 건조한 기록도 나오죠.
그건그래 18-10-18 10:06
   
아니 누가 보면 일본 대규모의 정규군 원정대가 해적들처럼 돗단배 타고 임란때 조선 건너왔는줄 알겠네요.  그나저나 무조건 거꾸로 하자 무조건 부정하자가 모토인 좌익들께서는 이젠 그들 입맛에 맞게 역사까지 손 보고 있는중인가요? 뭔 박정희가 어떠구...
상식4 18-10-18 11:08
   
왜군 찬양에 열올리는 분이 계시네요.
그러면서 은근 우리역사에서 나가면 처발린다느니 폄훼하면서 말이죠.

당시 왜군이 100년이 넘는 내전으로 정예군이 즐비하고 조선군은 200년 가까운 평화에 문서상에나 존재하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승률도 꽤 높았습니다. 이건 일본이 쪽팔리는 거죠. 토전에서도 말하죠. 사단규모 이상의 큰규모 전투에서 경험의 차이로 진 게 많다고...

그리고 왜군 찬양려고 정규군대도 아닌 왜구라며 몇몇 왜구 기록 가지고 떠버리는데, 왜구도 왜구 나름이고 정규군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한사회에 직업군인 하급무사가 성인 남성 인구의 70%에 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실제 그런 번이 있었고, 얘들 왜구짓으로 먹고 산겁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검술능력으로 유명한 게 왜구로 유명한 지역 애들입니다. 사무라이=왜구 맞습니다. 사스마? 죠슈? 맞는지 모르겠지만, 여튼 이 왜구들이 사무라이 중 최고들이고 유구국 털어먹고 설탕 수탈해서 일본에 유통하고 돈을 벌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까지 되죠.

고려 기록에 왜구에 대해 형편없게 지거나 싸우기도 전에 지휘관이 도망가는 기록도 있지만, 혼자서 말타고 나가 기사로 죽이고, 산으로 들어가 활로 싸죽이고 왜구 수십명 죽인 케이스나 이성계의 가별초는 1/10 병력으로 불리한 지형에서 이기기도 하죠. 내가 보기에는 정예 대 정예로 붙으면 왜구 개처발리는 것 같은데요... 다시 말하지만 왜구= 사무라이고, 경험 많은 정예 맞습니다. 정규군이 해적 보다 할거라는 건 개망상입니다. 기사도 100년 전쟁 때, 영국 평민들한테 개발린 프랑스 기사보다 해적질 해먹던 구호?기사단(명칭에 대한 기억이 낮아 죄송)이 대단하죠. 정규군이냐 해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경험치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사무라이들 중에서도 왜구짓 하던 애들이 싸움을 잘했죠.

그리고 왜구에 대한 기록은 우리야 혼자서 하급무사가 수십명 죽여버리는 무쌍 기록도 있고, 이성계 기록도 있어서 우리기록가지고 찬양하면 고려 정예병은 사무라이 중 최고로 치는 왜구들 보다 더 찬양해야 되죠. 중국 기록이라면 중국 남쪽 군대는 중국사서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역사 대대로 싸움 못 하는 거 유명합니다. 중국군은 양자강 이남만 가면 븅신인 게 거의 전통임....

통합된 유목민족 제국이란 건 기본 세계 최강 군사력이라 비교하는 건 웃기는 짓이고 문제는 거란이나 몽골이나 문제는 정치적 이유로 개활지에서 대회전한 게 문제가 되죠. 당시 기득권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빨리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고 무리한 게 문제였죠. 무슨 민족특성 따위가 아니라 상대가 개활지에 넘사벽입니다. 반면 백병전 기록은 고려가 압도적인 기록이 몇있죠. 여진이야 거란의 요나라 부터 여진일만즉천하불감당으로 유명했고, 명나라의 국방전략 중 하나가 이거임.

여튼... 임란 때도 알아두어야할 게 일본하면 칼 강조 많이 하는데, 그건 평화시기에 만들어진 무사도 로망이고, 신분적 상징이기 때문이지, 일본도, 검술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닙니다. 그 잘난 일본 검병 상대로 조선병사가 월도를 빠르게 휘두르는 것 만으로 여럿을 상대 가능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전국시대 주력정예는 장창병들 이구요. 검병이래봤자 보조입니다. 도요토미가 방에 장식해논 무기는 일본도가 아니라 월도였구요.  왜구가 칼길이 긴걸로 유명한 데, 왜군 창길이가 어마무시하게 길었습니다. 찌르는 목적으로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긴데 위에서 내려치는 형태였을 거라 보여지구요. 실제 그렇게 전투하고 훈련한 기록도 있습니다.  일단 병력의 질에서 밀리고 무기의 길이(대마도주가 실제 걱정하며 조언함)와 전술이 문제가 돼죠.

물론 저런 검병이나 장창병만 있으면 기사 가능한 정예기병으로 학살 가능합니다. 조선이 괜히 육전에 자신감을 보인 게 아닙니다. 병력 비율의 10%를 차지했다는 조총병에 녹았죠. 이후 조선은 기존의 기병주력에서 조총병 주력의 군대로 변화하죠...
     
상식4 18-10-18 11:23
   
덧붙여 토전에도 그 교수가 말하지만 전국시대에 사상자의 압도적인 비율은 원거리 무기에 당합니다. 일본활이 후지기 짝이 없고 조총병 비율은 낮은데 사상자가 70%이상이 원거리 무기에 의해 생긴 사상자죠.

일본 사무라이나 왜구 전국시대는 너무 과장 되고 미화 되었음. 근거가 그렇게 우습게 보는 고려군과 조선군과의 전투 기록임. 기준을 이상하게 높게 잡고 우리가 볼성사납게 진 경우만 강조하거나 압도적인 승률을 가져가지 못 했다고 폄훼하는 건 웃기는 짓임...

임란 때, 항왜만 2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죽은 것만 3만, 2차진주성 전투에 동원된 게 10만인데, 왜가 동원한 게 16만이니 이전까지 6만은 죽었다는 이야기고 급격하게 밀렸다고 오해를 하는데 왜군이 피해가 적었던 게 아님. 반대로 조선군이 졌다고 다 죽은 거라 생각하면 개착각이구요. 수도에서 지휘관이 내려오기도 전에 맞닥드려서 와해 된것도 패배한 거라 치는데, 일뽕들은 이런 것도 전멸이나 한줄 앎... 전투에서 완전히 괴멸되는 경우는 별로 없음. 30%만 죽어도 군대가 제기능 못한다고 전멸이라 표현하기도 하구요... 여튼 일본군 찬양하기에는 군사적으로 한창 정점을 찍고, 전쟁준비에 100만명이나 동원할 정도로 국가 전력을 기울인 것 치곤, 한창 개차반난 조선의 국방상황에 정말 더럽게 못 했다...
구름위하늘 18-10-18 11:17
   
교수님이 어설프게 아시는 것 같습니다.

양측의 주력함선은 판옥선과 세키부네로 체급차이는 있지만,
대형 vs 소형이라기 보다는 대형 vs 중형 정도의 체급차이 입니다.
대략 판옥선의 60~80% 크기 수준 입니다.
높이 차이가 있어서 백병전이 공성전 비슷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숫자를 압도할 정도의 체급차이는 아닙니다.

조선은 일본 무기체계에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 조총은 대마도 번주가 직접 여러 개 진상하기도 하고 화력시범도 있었죠.
신립을 포함한 조선 장수들이 직접 사용해보고 평가한 내용도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거의 정규군 급인 왜구와의 전투로 일본전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요.

몰랏던 것은 그 비싼 조총을 그렇게 많은 숫자로 사용할 줄 몰랐고 일본침략군의 규모를 너무 작게 추정한 점이죠.

이순신이 선조와 그 일당에게 배척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선조는 성공적인 전과를 얻은 모든 장수를 배척하기도 했고요.
능력이 아니라 충성도를 가지고 신하를 발탁하고 또 자르던 왕이었습니다.
선조 시대의 대부분의 사화는 왕이 '조장'한 사화로 보여집니다.

영웅에게 완전무결(?)을 요구하는 것은 또다른 조선시대 유학자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박정희가 이순신을 정권유지의 도구로 사용한 것은 맞지만,
실제 이순신은 땀냄새 나는 인간적인 면모를 포함하더라도 박정희 시대의 찬양보다 더 위인같은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중앙정부의 도움은 커녕 방해만 받는 상태에서 자급자족으로 병사,무기,식량,훈련 등을 자체적으로 보급하면서 투덜거리긴 해도 매우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으니까요.
꼬꼬동아리 18-10-18 14:37
   
일본은 100년 가까이 이어온 전쟁덕에 지금 검술수련관 처럼 사범을 두고 많은 인간들에게 검술을 가르치지만 우리나라는 대대로 전승되는 검법을 누구에게 알려주는법이  없었조 그리고 일본은 조총관련 덕이 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찍이 조총이 수입 됬더라면 임진왜란 양상이 달라졌을수도 있었겠죠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이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 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다. )))))))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 가지 않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개개인의 역량은 최고였다 보여집니다 원앙진 창기술에의해서 일본검술같지도 않은 검술은 전부 파악되어 격파됩니다 
이정도 실력에도 무과에 낙마 했다면 세가지입니다 
무과에 있던 장군급이 정말 무에 달관하신 분들이 많았거나 
실력을 제대로 볼수없는 평가관들이 배치되었거나 로비에 의한
관직승계
제생각은 일본처럼 유파를 만들지 않아서 그렇지 개개인으로 자식에게만 
전승되어오던 검술같은건 발군이였던걸로 보여지네요 
현재도 지리산에서도 검술이 내려오고 있던데 이번대에 끊어진다하던데 
많이 아쉬운 대목들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무과급제 몇번 떨어졌는데 김명순 장군처럼 엄청난 검술 실력에도 불구하고 무과급제에  떨어진걸 보면 몇가지 이유가 있어보이네요
진실게임 18-10-18 15:52
   
위에 잘못된 얘기가 있어서... 고려는 해군이 없었어요.

해군은 없는데, 해적이 어마어마하게 노략질을 해대니 육군으로는 기동성이 안되서 잡을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해군을 만들자 했는데, 그게 몇 년 만에 뚝딱 되는 게 아니죠. 배를 만드는 것도 그렇지만 전문성이 필요한 군선을 모는 게 사람만 모아놓으면 되는 게 아니고...

그 만드는 곳으로 해적이 들이쳐서 박살을 내놓거나, 초창기 겨우 모양만 만든 해군이 당연히 서전에서 역전의 해적들에게 깨진 거죠.
     
사랑투 18-10-19 08:03
   
그럴리가요.
왕건도 개성상인으로  해상세력 일텐데요.
위구르 18-10-24 02:37
   
군사정권 못 잡아먹어 환장해가지고 그러는건지 아님 실제로 군사정권이 미화한건지 <- 이 문제인데 실제로 군사정권이 고의적으로 영웅화한것인지가 관건이군요. 그렇게 했다면 그 다음으로, 어느정도로 미화를 행했는지를 따져야 할텐데 아무튼 이순신 장군을 싫어할 친일 분자들이 환호할 만한 논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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