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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23 13:31
[한국사] 수(隋) 임유관(臨渝關, 臨榆關) 과 고구려 서계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2,898  

04. 598년에서 612년 사이 고구려와 수의 분쟁사와 전쟁사에 있어서의 임유관과 고구려 서계
05. 임유관의 위치 ㅡ 한중 학계 통설에서의 비정 위치와 그 비정 근거의 사료적 확인과 반론 제기

# 후차 게시글을 준비하면서 분량이 길어진 관계로, 또한 긴 글이 게시되지 않는 가생이닷컴의 특성에 따라 이번 회차의 뒷부분을 수정, 제거하여 다음 회차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루겠습니다. (수정일 : 2018. 10. 27)


가. 고구려-수 1차 전쟁(수나라 1차 고구려 침략 전쟁) 개요


1. 학계 통설

대체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9년(서기 598년) 기술과 일치


1)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3%A0%EA%B5%AC%EB%A0%A4-%EC%88%98%20%EC%A0%84%EC%9F%81#s-3


2)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A%B3%A0%EA%B5%AC%EB%A0%A4-%EC%88%98_%EC%A0%84%EC%9F%81


3)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80670&cid=40942&categoryId=33375



2.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9년(서기 598)
9년(서기 598), 임금이 말갈의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冲)이 우리의 군사를 물리쳤다. 수나라의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 등을 모두 원수(元帥)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임금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渝關)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나후(周羅睺)의 수군은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서 그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대부분이 죽었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冲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渝關 値水潦 餽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睺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師還 死者十八九



3-1. 수서

隋書 卷八十一列傳第四十六


이듬해(598년), 고구려 영양왕(元)이 말갈 1만여 기를 이끌고 요서를 침략했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공격하여(막아서) 그들을 패주시켰다


수문제(양견)가 이를 듣고 대노하여 한왕 양을 원수로 삼아 수륙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토벌케 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군량 수송이 어려워 6군이 굶주렸으며 군대가 임유관에서 나아감에 전염병이 거듭 돌아서 진군이 부진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요수를 (진군 여정의 다음으로) 앞두고 있을 때에 고구려 왕 또한 몹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황제께 올린 표문에 자신을 ‘요동의 똥덩이 땅(썩은 땅)의 신하 원(영양왕 이름)’이라 칭했다.


황제가 군사를 불러들여 처음(침략 전)과 같이 두었고 고구려 원(영양왕)은 해마다 조공을 보냈다.


明年,元率靺鞨之眾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沖擊走之。高祖聞而大怒,命漢王諒為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饋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


雲云。上於是罷兵,待之如初,元亦歲遣朝貢。



3-2. 수서 卷二帝紀第二 高祖下


대업 18년(598년) 정월 을사일에 한왕 양을 행군원수로 삼아 수륙 30만 병력으로 고구려를 정벌케 했다

十二年春正月

乙巳,以漢王諒為行軍元帥,水陸三十萬伐高麗。


598년 음력 6월 병인일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 고원(영양왕)의 관작을 박탈했다

六月丙寅,下詔黜高麗王高元官爵。


598년 음력 9월 기축일에 한왕 양의 군대가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80~90%)였다

九月己丑,漢王諒師遇疾疫而旋,死者十八九。



3-3. 수서 卷四十列傳第五


요동에서 전쟁(수문제의 598년 고구려 원정)이 일어났을 때에 세적은 한왕 양과더불어행군원수가 되었는데 유성에 이르러 병을 얻어 되돌아 왔다


及起遼東之役,世積與漢王並為行軍元帥,至柳城,遇疾疫而還。



3-4. 수서 卷六十五列傳第三十


(주라후는) 대업 18년, 요동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수군총관으로 부름을 받았다.

동래에서 바다로 배를 띄워 평양을 향해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배들이 여럿 침몰되었고 아무런 공로없이 되돌아왔다


十八年,起遼東之役,徵為水軍總管。自東萊泛海,趣平壤城,遭風,船多飄沒,無功而還。


# 주라후 출정지 동래

https://ko.m.wikipedia.org/wiki/%EC%98%8C%ED%83%80%EC%9D%B4_%EC%8B%9C



나. 고구려-수 1차 전쟁(서기 598년)의 학계 통설에 대한 이설(異說)


1. 이설(異說)의 대략

: 고구려군이 강이식 장군의 지휘 아래 임유관을 선제 타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괴멸시켰다는 주장


2. 해당 설의 문제점

: 강이식 장군을 시조로 하는 진주 강씨 족보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만 거론 기술됨


3. 쟁점

1) 학계 통설 : 수나라 군대의 80~90%는 전염병 등의 질병으로 죽었고, 따라서 고구려 군과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철군하였으며 영양왕이 수나라에 사죄를 담은(요동분토신원) 표문을 올리고 수문제가 그것을 용서해주면서 마무리된 것


2) 이설(異說) : 강이식 장군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의 임유관 선제 타격으로 수나라 군대가 괴멸된 것


4. 고구려군의 임유관 선제타격설을 뒷받침하거나 타당하게 추정케 할 근거는 없는가?


605년 수나라는 영주를 약탈한 거란을 근절하고자 동돌궐 계민가한의 군사 2만 기를 빌려 상인으로 위장케 하여 유성에 있는 고구려 국제교역시장으로 가는 것으로 거란을 속이며 국경에 진입 후 거란 본영을 습격하여 4만의 포로를 잡고, 남자는 다 살해한 일이 있다


607년, 수에 복속된 계민가한의 처소에 방문한 수양제는 거기서 조우한 고구려 사신에게 영양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정벌할 것임을 경고하였고


612년 드디어 고구려 정벌을 명하는 조서를 내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군(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수서)을 부려서 고구려를 침공하는 이른 바 제 2차 고구려-수 전쟁을 개시한다


그날의 조서 내용을 살펴 보자



5. 수양제의 612 조서 ㅡ 612년 음력 1월(영양왕 22년)


1-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해당 기록에 대한 나무위키 해석본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경계를 거듭(薦) 잠식(食)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ㅡ중략ㅡ

옛날에 정벌할 때 천자가 행하는 형벌에서 빠져 이미 앞에 사로잡힌 자는 죽음을 늦추어주고, 뒤에 항복한 자는 아직 죽음을 내리지 않았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길러,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를 지키는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일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1-2)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해당 기록에 대한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석본


고구려의 하찮은 자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나라와 위나라의 거듭된 침입으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자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ㆍ현도ㆍ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았는데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지나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2-1)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612년) 기록 원문


二十三年 春正月壬午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渤碣之間 荐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汔今 睠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2-2) 수서(隋書) 卷四帝紀第四 煬帝下의 기록 원문


高麗小醜,迷昏不恭,崇聚勃碣之間,薦食遼之境。雖復漢魏誅戳,巢窟暫傾,亂離多阻,種落還集。萃川藪於往代,播實繁以迄今,眷彼華壤,剪為夷類。歷年永久,惡稔既盈,天道禍淫,亡徵已兆。

ㅡ중략ㅡ

曾不懷恩,翻為長惡,乃兼契丹之黨,虔劉海戍,習靺鞨之服,侵軼遼西。



6. 의문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직접 말갈 1만 기를 이끌고 수나라 요서를 침략했는데 영주총관 위충이 막아 물리쳤다는 한중 두 사서(삼국사기와 수서)의 간략한 기록과 달리


수양제의 조서 내용에서 고구려가 말갈을 이끌고 요서를, 거란을 이끌고 수나라 국경 모처의 바닷가 진영을 공격한 정황이 여실히 나타난다. 대구법을 사용하며 말갈과 거란을 나눴을 뿐으로 수양제 612 조서에서 관련 핵심 내용은 고구려가 말갈과 거란을 데리고 수나라의 요서와 국경 모처의 바닷가 진영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다의 수비병/수비군(海戍)’으로 표현되 이 모처가 임유관일 가능성이 정황상 농후해 보여서 그렇다 추정할 이유로 타당하다 생각된다.


임유관을 기점으로 수나라 30만 대군은 군량수송의 어려움으로 굶주리고 전염병을 비롯한 질병에 걸려서 그 90% 가량의 병사가 죽었다. 그래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수나라 군대는 퇴각한다. 세계 전쟁사에 이렇게 황당무계한 일이 많지는 않을 것으로, 인구에 거듭 회자될 일이 아닌가?


어찌됐든 1차와 2차 등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의 경로로 보건데 제군이 현 북경시에 해당하는 탁군에 모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유관을 통해 나오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바 수나라 당시 임유관은 수나라 영토에 있어서 동한계점이자 고구려로 가는 출입구임은 분명하다.


우리는 앞에서 한중 학계 통설과 달리 수나라 당시 영주와 유성은 다른 곳이었으며 유서군의 영역 역시 사실과 달리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대체 임유관은 어디인가?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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