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만주는 통일된 나라가 오래가기 어려운 지역이라고 봅니다.
일단 농업생산량이 너무 적어요.
논농사가 안되고 밭농사에 의존해야 하니 대규모 인구 부양이 어렵습니다.
게다가 요동과 요서는 교통의 요지라서....자연적으로 북경 영향력 아래 놓일 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만주를 차지한 나라는 북경을 정복하던지, 아니면 멸망하던지 두가지 갈림길에 놓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발해의 말갈은 실패했지만 여진의 금은 성공했죠.
적어도 일본인이 발해의 상경을 가기 위해서는 발해의 동해안 연안에 상륙했을 것이고
동해안 연안과 그 인근지역은 오히려 같은 위도상의 내륙보다도 오히려 따뜻한 편인데요..^^
그리고 당시의 전반적인 농경기술에 비추어보아 당연히 기후가 추우면 농사에는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또한 인구밀도 또한 확실히 떨어지는데요..??
당장 조선시대 한반도내에서만 한정하더라도 온대기후인 중남부지역에 비해
냉대기후대에 속하는 북부지역이 인구가 절반 이하였습니다만...??
(오늘날에도 남한과 북한이 대체로 2:1의 인구비중을 차지하듯이...)
또한 벼농사비중이 이전시기보다 늘어났던 조선후기에조차도 대체로 따뜻한 삼남지역이
벼농사:밭농사에서 벼농사면적이 밭농사의 그것을 다소 능가했을뿐...
반면에 산간지역이 많은 강원도, 함경도지역은 밭농사면적이 70~8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발해시기보다 무려 1,000년 가까이 후대에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조선후기 시기보다 무려 1,000년 전에, 조선보다도 대체로 북방에 위치한
발해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함경도 지역은 상당부분 겹친다고 하지만...)...???
대체로 발해의 남부지역에 해당할만한 오늘날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에서조차
벼농사가 활성화된 시기도 19세기 이후에서야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네. 제가 어설프게 아는건 사실인데...
날씨 문제를 지적 안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선양-지린-대련까지 현장 답사도 다 해봤습니다.
현재 농사 잘 되고 있죠. 평야도 넓어서 선양 지역은 살기가 좋아보기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역사학계에 17세기 위기 논쟁이 있지 않습니까? 소빙하기가 찾아과 1650년 경에 전세계 평균기온이 2도가 떨어져서 유럽은 물론 북방도 난리가 났다고. 사실 그런 기후적인 요인이 만주족이 일찌감치 북경을 노린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발해는 9세기 역사이긴 한데...
그당시 농업기술로 수백만명을 먹여살릴만한 기술이 있었다고 믿기 힘듭니다. 게다가 만주 지역은 관계수로 개척이 쉽지 않았다고 봅니다. 한반도 기준으로 농사가 어려운데 한반도 훨신 북쪽에서 논농사를 해가며 국가체제 운영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게다가 선양 지역은 완전히 평야지역이에요. 북경에서 말달리면 그냥 뚫리는 지역입니다.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없어요. 머 그런 이유를 말씀드린 겁니다.
발해가 멸망한 이유는 제가 고려 전기 서북계와 거란 동경도 실질 영역을 고찰하며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1) 요주를 비롯한 발해 핵심지역 가운데 하나인 동부 지역의 반란
ㅡ 이 지역은 의무려산에서 현 요양/심양을 비롯한 요동반도, 요원시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ㅡ 이 지역은 발해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철광, 금광, 은광 등이 산재한 지역이고 발해에서 국제무역의 삼각지 같은 곳으로 중원지역의 산물, 초원지역의 산물, 발해 내륙의 산물이 만나는 지역입니다
2) 9 세기부터 급격히 성장한 거란
ㅡ 거란은 당나라와 발해 양쪽에 간접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당나라의 몰락으로 기회를 잡았고
ㅡ 기세를 몰아 발해의 동쪽 지역인 동평부(요주가 포함된 지역)를 기습 타격하여 제일 먼저 빼앗습니다
3) 이 지역의 발해인들은 본인들이 고구려의 적통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이렇게 숨통이 막혀 버리자 결국 발해는 이러한 상황에서 내분으로 망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들어선 동단국 역시 요주를 비롯한 각지의 반란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없어서 국토를 포기하고 거란의 남경으로 왕도(천복성)를 교치하여 더부살이를 하면서
현 요하 동쪽~동요하 남서쪽에 해당하는 현 요심ㅡ요동지역에 숙여진을 두고, 그 바깥을 생여진을 둡니다
또 동단국의 지배층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존 발해인들인데 이들을 현 혼하ㅡ태자하 일대로 대거 이주시킵니다
이는 형식적으로는 동단국이 수도만 옮겼을 뿐 만주 지역을 여전히 지배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를 않아서
이미 고려는 왕건 시대부터 북진을 통해 동단국 숙여진 지역으로 영토를 넓혔고
광종 대에는 현 요하/쌍태자하 지역까지 진출
성종 대에는 이 지역의 숙여진들을 쫓아내고 당시의 압록강인 요하~동요하 사이의 지역을 석권합니다
동시에 동요하 상류와 혼하 상류에 몰려있던 여진족(실제로는 발해유민들ㅡ정안국)을 거란이 정벌할 때에 길을 열어주는 식으로 등거리 외교전략을 펼칩니다
이것이 결국 거란의 고려 원정을 촉발하는데
최초의 고려 원정 준비는 때이르게 요택에 물이 차오르자 포기하고
그 기세를 가다듬어 여진족, 즉 정안국을 대대적으로 정벌하여 포로 20만, 말 10만 마리 등의 성과를 거두고 정안국 세력을근절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고려를 침략합니다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강화협정으로써 받아낸 소위 강동 6주가 바로 정안국이 있던 땅으로
현 장춘 이남 ㅡ 동요하(압록강) ㅡ 철령 동쪽에 해당합니다
최초 할양을 약속한 강동 6주는 철령ㅡ무순ㅡ동요하 상류/지류의 180리여에 해당하는 작은 땅이었으나 고려가 이 지역의 여진족을 능숙하게 소탕하며 거대한 땅을 개척해버린 것입니다
애초에 거란이 고려에게 강동 6주를 할양한 이유도
이 지역에 잔존하는 여진족 세력을 소위 이이제이 술법으로써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여 거란 2차 침입부터 거란이 멸망하기 전까지
고려와 거란 사이의 모든 외교전, 국지적, 대전쟁 등이 강동 6주를 빼앗으려는 거란의 욕심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거란 성종은 정안국 정벌, 고려 대규모 침략 등을 통해
거란 동경도의 영역을 기존 의무려~요하 사이에서
천산산맥까지 확장하였습니다
거란과 고려의 11세기 100여 년 간 외교신경전은
ㅡ 거란은 고려에게 강동 6주를 달라
ㅡ 고려는 거란에게 압록강(현 요하/쌍대자하) 하류 일대 땅을 돌려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