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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26 04:16
[한국사] 479년의 거란과 백랑수(白狼水)의 위치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3,211  

5세기 후반 북위의 공격으로 위축이 된 유연(연연)과 백제ㆍ물길 연합세력의 북위와 연계한 봉쇄 시도를 타개하기 위한 고구려의 양국의 이해가 맞물려 발생한 것이 유연과 고구려의 지두우국 분할 시도라고 학계 통설은 설명하고 있다.

역사지도 상에 표시된 지두우국의 위치는 한국과 중국 모두 제각각인데 보통 대흥안령산맥 중단에서 그 서쪽, 또는 그 동쪽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런데 동시대 역사정보를 담은 위서(魏書)에서는 지두우국이 실위 서쪽 1천여 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실위는 물길 북쪽 1천여 리에 있다고 적었다. 또한 실위는 낙양에서 6천 리에 있다고 적고 있으며 (낙양에서 5천 리 떨어진) 거란국에서 북쪽으로 16일을 가면 있다고 적고 있다.

물길은 현재 학계에서 송화강 유역, 길림 북쪽~하얼빈 일대에 있었다고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북쪽 1천 리에 실위국이 있었으므로 지두우국의 위치는 더 북쪽으로 높여 잡아서 비정할 여지가 있다.

위서와 수서(隋書)를 교차분석하면 유연과 고구려의 지두우국 분할 시도가 분명히 있었고, 고구려는 지두우뿐만 아니라 그 남쪽에 있는 거란까지 공격하였다.

이에 479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거란의 일부인 1만 명이 북위의 국경 지대로 도망쳐 보호를 요청하였고 북위는 이들을 백랑수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또한 이듬 해인 480년, 이번에는 고막해가 지두우의 공격을 피해 북위로 도망쳐 들어와서 북위의 안주와 영주 등지에 흩어져 살다가 498년에 안주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두우는 490년에 북위의 국경지역까지 남하해 북위를 수시로 침범하다 정벌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적 정황은 유연과 고구려가 지두우에 대하여 단순히 분할 시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그 지역을 실제 장악하였음을 드러내는 생생한 표정이다.

이 글에서 살펴 보고자 하는 바는 ‘479년,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서 북위의 국경을 넘어 들어간 거란인 1만 명이 머문’ 그 백랑수(白狼水)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한중 학계에서는 그곳을 어디로 보며 과연 그 통설이 합당한가 하는 시시비비를 따져 보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479년에 대한 위서와 수서의 기록을 교차하여 보자.

太和三年, 高句麗竊與蠕蠕謀, 欲取地豆于以分之. 契丹懼其侵軼, 其莫弗賀勿于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 驅徙雜畜, 求入內附, 止於白狼水東. 自此歲常朝貢.

태화(太和, 북위 효문제) 3년(479), 고구려(高句麗)가 몰래 연연(蠕蠕 유연)과 모의하여 지두우(地豆于)를 취해서 나누고자 하였다. 거란은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그 막불(莫弗) 하물우(賀勿于)가 그 부락을 인솔하여 수레 3천승, 무리 1만 여 명과 여러 가축을 몰고 복속해 들어올 것을 청하고, 백랑수(白狼水)동쪽에 머물렀다. 이 해(479)부터 항상 조공하였다.

《魏書 列傳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於庫莫奚契丹烏洛侯》

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貔河.

북위(北魏) 때가 되어 (거란은) 고구려(高麗)의 침입을 받아 부락 1만 여 구가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백비하(白貔河)에 머물렀다.

《隋書 卷八十四列傳第四十九》


口는 사람을 셈하는 단위이다. 1만여 구는 1만여 명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위서는 ‘백랑수 동쪽’이라 적었고, 수서는 ‘백비하’라 적고 있어서 동일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狼은 ‘이리 랑’이며 貔는 ‘비휴 비’자이다. 두 글자의 꼴이 흡사할뿐만 아니라 貔는 표범, 또는 그 비슷한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뜻 또한 유사하다.

즉, 백랑과 백비는 그 지역 토착어, 또는 거란/해 등의 말을 한자를 차자해 적은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한중 학계에서는 별도로 살펴볼 필요도 없이 공히, 그리고 익히 백랑수를 대릉하(大凌河)로 보고 있다. (수경주를 쓴, 5세기말~6세기 초, 북위의 역도원 역시 백랑수를 대릉하로 비정하는 듯한 기술태도를 보이고 있다)

479년의 거란 1만여 명 북위 귀부는 중국역사지도집 상에 다음과 같이 표현돼 있다.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11022_128%2Fjhy8365_1319276443164tHjYt_JPEG%2F13.jpg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11022_125%2Fjhy8365_13192764488795ks0P_JPEG%2F20.jpg


자, 한번 생각해 보라,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북위에 보호를 요청하며 내부한 거란이 고구려 가까이 가서 머무는 게 과연 상식적인지를.

한국과 중국의 사학계는 장수왕과 문자명왕 시절의 고구려를 겨우 요하를 서쪽 한계로 삼는 보잘 것 없이 작은 나라로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역사서에 적힌 내용은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미 나와 함께 복합적이고도 심층적으로 고찰하여 왔다.

ㅡ 402년, 광개토대왕의 고구려는 평주를 함락시켰고
ㅡ 404년,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연군(燕郡, 현 북경시) 타격해 100여 명 살해
ㅡ 407년, 모용운과 풍발은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토대로 모용희를 제거하고 북연을 건국하였으며
ㅡ 408년, 고구려계인 모용운이 천왕으로 등극할 때에 고구려는 동족의 예로써 대했으며
ㅡ 436년, 북위 태무제는 북연 정벌 전에 고구려에 알렸고
ㅡ 고구려가 먼저 가서 화룡성을 약탈하고 불지른 후 지배층과 주민들을 고구려로 모조리 데려갔어도 손 놓고 가만히 있었다
ㅡ 북위는 풍홍을 내놓지 않는 고구려에 대해 그 어떤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ㅡ 북위는 북연 정벌 전인 435년에 이미 요해일대에 대한 군사행동 제반을 허용하는 도독요해제군사 작위를 장수왕에게 수여했으며 이 작위는 문자명왕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ㅡ 472년, 백제의 요청으로 백제에 사신을 보내려 한 북위는 고구려가 육로와 해로를 막고 통과를 허락치 않아서 사신을 보내지 못 했으며
ㅡ 475년에는 무리하게 바닷길로 띄운 사신선이 난파되기도 했다
ㅡ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거란과 해의 북쪽에 있는 지두우국을 유연과 분할하고자 군사행동을 하였고 이 때가 479년이다.
ㅡ 이러함에도 484년, 여러나라의 사신들 숙소의 순서를 정할 때에 고구려를 남제 다음인 두 번째 자리에 배치하였다

한중 사학계의 정설, 여러분은 납득이 가는가?
대체 이것이 상식인가 비상식인가 따지는 것도 무가치해 보일 정도이다.

그렇다면 백랑수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 실마리는 해(奚)가 지니고 있다.

거란의 일부가 북위로 도망쳐 온 그 다음 해인 480년, 고막해는 지두우의 공격을 피해 북위의 국경 안으로 들어온다.

거란과 (고막)해는 그 본거지가 모두 현 시라무렌강 북쪽으로, 냉형산을 경계로 그 동쪽은 거란, 그 서쪽인 대흥안령 남부는 해가 자리했다. 이 위치에 당나라 시대에 각각 송막도독부와 요악도독부가 설치된다.

그런데 북위 시대인 5세기 말부터 일부 세력이 남하해서 해(奚)는 안주(룽화현, 중국 허베이 성 청더 시 https://goo.gl/maps/m88wserh5A32 )에, 거란은 돌궐이 성장해 위협하자 고구려에 만가(萬家, 모든 부락)가 스스로 복속됐다가 수문제 시기에 그 일부가 수나라에 내부했다가 다시 북쪽으로 옮겨가서 목축을 하며 살았는데 그 지역은 수서에서는 ‘요서 정북쪽으로 2백 리에 있는 탁흘신수(託紇臣水)’라 돼 있고, 신/구당서에는 ‘황수(潢水)의 남쪽, 황룡(黃龍)/영주의 북쪽’이라 돼 있고, 통전에는 ‘요서 정북 200 리에 있으며, 동서 500리, 남북 200리 되는 옛 선비의 땅’이라 돼 있고, 신오대사에는 ‘효라개몰리(梟羅箇沒里),또는 황수(黃水)의 남쪽, 황룡(黃龍)의 북쪽, 선비(鮮卑)의 옛 땅’이라 돼 있고, 거란국지에는 ‘요라개몰리/여고몰리(裊羅個沒里,複名女古沒里者)와 배먀리몰리/도외새몰리(北乜裡沒里,複名陶猥思沒里者)’가 있는 곳이라 돼 있는, 지금의 시라무렌강과 로합하 중상류 사이의 땅이다

해(奚)가 황수, 즉 시라무렌강 남쪽의 역대 중국 정권 영역으로 내려와 활동할 때에 그 영역의 남쪽이 백랑수와 접했다고 역대 사서에서 적고 있다.


다음의 기록들을 교차하여 살펴 보자.

太和四年, 輒入塞內, 辭以畏地豆于鈔掠, 詔書切責之.

태화(太和) 4년(480), (고막해가) 갑자기 새내로(국경 안으로) 들어와 지두우(地豆于)가 약탈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소연하니, 조서로 그들(지두우)을 엄히 질책하였다.

二十二年, 入寇安州, 營燕幽三州兵數千人擊走之. 後復款附, 每求入塞, 與民交易.

태화 22년(498), 안주(安州)에 도적(고막해)이 들어왔는데, 영주(營州), 연주(燕州), 유주(幽州) 3개 주의 병사 수천명이 이들을 공격하였다. 후에 다시 진심으로 복종하고, 매번 새내에 들어와 (북위의) 백성들과 교역할 것을 청하였다.

《魏書 列傳第八十八 高句麗百濟勿吉失韋豆莫婁地豆於庫莫奚契丹烏洛侯》

奚國, 蓋匈奴之別種也, 所居亦鮮卑故地, 卽東胡之界也, 在京師東北四千餘里. 東接契丹, 西至突厥, 南拒白狼河, 北至霫國. 自營州西北饒樂水以至其國.

해국(奚國)은 대개 흉노(匈奴)의 별종이고 (그들이) 살던 곳은 또한 선비(鮮卑)의 옛 땅이자 곧 동호(東胡)가 (살던 곳과) 접하고 있고, (당의) 경사(京師)에서는 동북쪽으로 4,000여 리에 있었다. (그들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거란(契丹)과 접했고 서쪽은 돌궐(突厥)에 도달했고 남쪽은 백랑하(白狼河)가 가로막고 있고 북쪽은 습국(霫國)에 도달했다. 영주(營州) 서북쪽의 요락수(饒樂水)로부터 그들 나라에 도달하게 된다.

《舊唐書 卷二百一十二 鐵勒契丹奚室韋靺鞨渤海靺鞨霫烏羅渾》

奚亦東胡種, 爲匈奴所破, 保烏丸山. 漢曹操斬其帥蹋頓, 蓋其後也. 元魏時自號庫眞奚, 居鮮卑故地, 直京師東北四千里. 其地東北接契丹, 西突厥, 南白狼河, 北霫.

해(奚) 역시 동호(東胡)의 종(種)으로, 흉노(匈奴)에게 격파되어 오환산(烏丸山)에 의지했다. 후한(漢)의 조조(曹操)가 그들의 우두머리(帥)인 답돈(蹋頓)을 참수했는데 대개 그의 후예이다. 원위(元魏) 때, 스스로를 고진해(庫眞奚)라 부르고 선비(鮮卑)의 옛 땅에 살았는데 (그들이 살던 땅은 당의)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사천 리 (떨어진 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땅은 동북쪽으로 거란(契丹)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 남쪽으로는 백랑하(白狼河), 북쪽으로는 습(霫)과 접해 있었다.

《新唐書 列傳第一百四十四 北狄》

(신오대사 해당 원문, 글이 잘리는 관계로 생략)

해(奚)는 본래 흉노(匈奴)의 다른 종류[別種]이다. 당말에 음량천(陰涼川)에 살았는데 (그 곳은) 영주 관아(營府)의 서쪽, 유주(幽州)의 서남쪽에서 모두 수백 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마(人馬) 이만 기(騎)가 있었다. (무리를) 오부(五部)로 나누었는데, 첫 번째는 아회부(阿薈部), 두 번째는 철미부(啜米部), 세 번째는 오질부(粵質部), 네 번째는 노개부(奴皆部), 다섯 번째는 흑흘지부(黑訖支部)라 하였다. 후에 비파천(琵琶川)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유주에서 동북쪽으로 수백 리 (떨어져 있었)다. 그 땅에는 검은색 양이 많았고 말은 앞 발톱이 단단해 달리기를 잘했고 그것들이 산에 올라 짐승을 쫓아다니면 아래 위로 (달리는 모습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新五代史 卷七十四四夷附錄第三》

戎狄舊地中京,舊鮮卑之地,在饒樂府西南,本奚王國牙帳之地。奚部落南距古北口,北距漢水,東即營州千餘里,皆其境土,後為契丹所並。景德中,虜王築宮室城垣,建為中京,偽號大定府。東至營州界青山嶺一百七十里,西即山後儒州界,東南至建州二百三十里,南至幽州九百里(一路由松亭關,一路古北口),北至上京六百九十里

융적의 옛 땅인 (거란의) 중경은 옛 선비족의 땅으로 요악(도독)부 서남쪽에 있는데 본래 해국 왕의 아장(행궁/궁궐)이 있던 곳이다. 해부락(이 살던 땅)은 남쪽으로 고북구와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는 한수(황수:시라무렌강)와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영주가 천여 리에 있었는데 훗날 거란이 그 영역을 병합하였다.

奚,本匈奴別種,牙帳在東湖之地,酋長號王,唐制兼饒樂府都督,居陰涼州。東至營州五百里,西南至幽州九百里。後徙居琵琶川,在幽州東北數百里,古北口之北。天初,契丹漸盛,遂受制焉。或徙居於媯州,依山而居之,有東西奚之號。今契丹盡取奚之故地。

해는 본래 동호의 별종으로 아장(궁궐, 우두머리의 처소, 중심지)이 (옛) 동호의 땅에 있(었)는데 추장을 일컬어 왕이라 하였고 당나라가 설치한 요악도독부의 도독을 겸했으며 음량천(陰涼川)에서 거주했다. (해의 본거지, 즉 아장은) 동쪽으로 영주까지 500 리, 서남쪽으로 유주까지 900 리이다. 후에 비파천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유주에서 동북쪽 수백 리로 고북구 북쪽이다.

《武經總要 前集 邊防一下 北蕃地理》


사서 기록을 간추려 정리해 보자

ㅡ (거란의 일부가 고구려를 피하여 북위의 국경지대에 들어와 보호를 요청하여) 백랑수 동쪽에 머물렀다/머무르게 했다(위서)
ㅡ (거란의 일부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도망쳐 북위의 국경지대에 들어와 보호를 요청하여) 백비하 동쪽에 머물렀다/머무르게 했다(수서)

ㅡ 480년 고막해가 지두우의 공격을 피해 북위의 국경에 들어왔다 (위서)
ㅡ 497년 이전까지 고막해는 안주와 영주 백성들과 섞여 살며 교역을 하였다 (위서)
ㅡ 498년 고막해가 안주를 약탈하여서 영주, 연주, 유주의 군사로 이들을 공격하였다 (위서)
ㅡ 해의 남쪽은 백랑하가 (떨어져) 있다 (구당서)
ㅡ 해의 남쪽은 백랑하와 접해 있다 (신당서)
ㅡ 후에 (음량천에서) 비파천(琵琶川)으로 옮겨 가서 살았는데, 유주에서 동북쪽으로 수백 리 (떨어져 있었)다 (신오대사)
ㅡ 해가 살던 땅은 남쪽으로 고북구와 떨어져 있다 (무경총요)
ㅡ 후에 (음량천에서) 비파천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유주에서 동북쪽 수백 리로, 고북구 북쪽이다 (무경총요)


497년, 북위 지도(중국역사지도집)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11022_128%2Fjhy8365_1319276443164tHjYt_JPEG%2F13.jpg

안주(安州)가 치소가 있던 곳
룽화 현
중국 허베이 성 청더 시
https://goo.gl/maps/m88wserh5A32

고북구(古北口)
Gubeikouzhen
중국 베이징 시 미윈 현
https://goo.gl/maps/GW9qXbMqFBp


결국 백랑수는 고북구 북쪽, 북위 안주 일대에 있는 것으로서
난하 중상류의 여러 지류 가운데에 하나로 봄이 가장 타당하다.

난하(滦河)
https://ko.m.wikipedia.org/wiki/%EB%A1%BC%ED%97%88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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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칸 18-12-26 08:46
   
좋은 정보네요.
감방친구 18-12-26 09:44
   
479년 거란인 1만 명의 내부와 백랑수 동쪽 거주는
북위의 그 동시대 사람인 역도원이 쓴 '수경주'만 보면

백랑수는 곧 대릉하요
대요수는 곧 현 요하요
소요수는 동요하, 또는 혼하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백랑수가 대릉하가 될 수 없음을 본문의 사서 교차 분석은 그대로 웅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난하가 요수로 불렸음은 이미 앞의 요해 고찰에서 소개한 바 있다
감방친구 18-12-26 10:33
   
통설에 의문점이 생길 때에,
사서 기록이 서로 불합치하는 것을 발견할 때에
그것을 해소 하고자 파고 드는 것이 바로 연구이다.

우리는 지금 수당 시기 영주의 위치를 추적하여 고구려 서쪽 영역의 한계를 고찰하고 있다
감방친구 18-12-26 10:35
   
북위의 영주는 최초 화룡에서 다른 곳으로 교치되었다
그 시기는 고구려가 남제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으로 임명된 494년 이전으로 판단한다

우선 거란 관련 의문점을 몇 개 더 다루고 후에 고찰하겠다
적폐척결 19-01-01 00:40
   
거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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