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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6-08 15:54
[기타] 흠정만주원류고 신라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2,232  

흠정만주원류고(민족.강역)를 통한 한국사 조명

https://blog.naver.com/hbchung/50136058300


신라(新羅)

*삼국(삼국)시대

-삼국지. 위지(三國志. 魏志): 辰韓에 12개 나라가 있는데 사로국(斯盧國)이 있다.

-통전(通典): 新羅國은 魏나라 때 신로국(新盧國)으로 그 선조는 원래 辰韓 종족이다. 진한은 처음에 6개 나라였다가 12개 나라가 되었고 신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쳐서 깨뜨리매 고구려의 왕이 옥저로 달아났다가 그 후 자기들이 살던 옛 나라로 돌아갔는데 그때 따라가지 않고 거기에 남았던 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신라로 되었다.

-통고(通考): 신라국은 백제의 동남쪽 5백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또한 漢 代에는 낙랑군(樂浪郡)의 땅을 겸유(兼有)하였다. 처음에는 신로(新盧)라 하고 혹은 신라라고 하였는데 동쪽으로 대해에 가까이 닿아있다.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부수자 옥저로 달아났다가 그 후 다시 자기들이 살던 옛 나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 남아있는 자들이 마침내 신라로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 속에는 중국, 고구려, 백제 등의 사람들이 섞여있었던 것이고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을 겸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서 바다로부터 신라로 도피해 들어와 마침내 그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진(秦)시대 

-전진록(前秦錄): 신라는 백제의 동쪽에 있다. 부견(符堅) 건원16년(380)에 부견의 조카 부락(符洛)이 반하여 사신을 보내 백제. 신라 등의 나라에 군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부견(符堅): 5호16국 시대 전진의 3대 왕)

-진서(秦書): 부견 건원 18년(382)에 신라국의 왕 누한(樓寒)이 사신을 보내 조근하고 공물을 바쳤다.

-통지(通志): 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백여 리 되는 곳에 있고 동쪽으로 대해 가까이에 있다. 그 나라 왕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와 드디어 그 땅에서 임금노릇을 하였다. 처음에는 백제에 예속되었는데 나중에 백제가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병역(兵役)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잇달아 신라로 귀순해 오면서 마침내 나라가 강성하게 되었으며 바로 가라(伽羅), 임나(任那) 등 여러 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이들을 멸하였다. 그 나라 서북쪽의 경계는 고구려와의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다. 이보다 앞서 그 나라가 작기 때문에 스스로 통할 수 없었다. 부견 때 그 나라 왕 누한이 위두(衛頭)란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조공하였다. 견이 사신에게 이르기를“그대가 말하는 해동에 관한 일들이 예전과 같지 않는데 어찌된 일이요? 라고 묻자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바뀌면 명칭도 달라지는 법인데 이제 와서 어찌 같을 수만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남북조(南北朝)시대

-송서(宋書): 원가2년(425)에 왜국이 사신을 보내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羅進韓慕韓六國諸軍事)라 스스로 일컬었다.

-통지(通志): 신라는 위나라 때는 신로국(新盧國)이었고 송나라 때에는 신라 혹은 사로(斯盧) 라고 하였다.

-양서(梁書): 신라는 그 선조가 원래 辰韓의 종족이다. 辰韓 또는 秦韓 이라고도 하며 거리가 1만 리쯤 떨어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사람들이 요역(徭役)을 피해 마한으로 가니 마한에서 그 나라의 동쪽 지경에 있는 땅을 떼어주어 거기서 살도록 했다고 한다. 진한은 처음 6개 나라가 있었는데 점차 나뉘어 12개 나라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 나라는 백제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에 가까이 있고 남. 북은 고구려 백제와 접해 있다. 위나라 때는 신로라 하고 송나라 때는 신라 혹은 사로  라고 하였는데 나라가 작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외국에 사신을 통하지 못하다가 보통2년(521)에 이름이 모진(慕秦)이라는 왕이 처음으로 백제의 사신을 따라가 방물을 바치도록 했다.

-수서.본기(隨書. 本紀): 폐제 광대 2년(568)6월에 신라국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선제 태건 2년(570)6월. 3년5월. 10년7월에도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남사(南史): 신라는 백제 동남쪽 5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땅은 동쪽은 대해 가까이에 있고 남. 북쪽은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北齊 하청 4년(565)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임명하여 사지절.영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을 삼았다. 하청 3년(564)부터 무평 4년(573)까지 모두 사신을 보내 조공을 하였다.

-북사(北史): 백제는 漢나라때 낙랑군의 땅에 있었다. 일설에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쳐서 깨뜨리자 옥저로 달아났다가 그 뒤 예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거기에 남아있는 자들이 마침내 신라로 되었으며 사로  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그 나라 왕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 바다로부터 신라로 들어가서 그 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다. 처음에는 백제에 딸려서 백제의 지배를 받던 나라였으나 백제가 고구려와 전쟁을 하면서 견뎌내지 못한 (고구려의)백성들이 잇달아 신라로 귀순하는 바람에 마침내 강성해져서 30대를 이어오면서 진평(眞平)에 이르게 되었다.(북사 원서에는 漢나라때 낙랑군의 땅에 있던 나라는 신라로 되어 있으나 편자는 백제로 보고 초창기 신라는 백제에 의해 통치된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수(수)나라 시대

-수서(隨書): 신라는 혹은 사로(斯盧)라고 부르며 그 나라는 왕조를 전하여 진평(眞平)에 이르렀다 개횡 14년(594)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매 高祖가 진평을 임명하여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을 삼았다. 대업(大業:수양제) 이래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그 나라는 산세가 험한 곳이 많아 비록 백제와 원한을 맺었을지라도 백제 또한 신라를 도모하지 못했다.

(수서 원서에는 斯盧가 아닌 斯羅로 되어있다)

-수동번풍토기(隨東藩風土記): 신라에서는 김씨 성을 서로 전하여 30여대를 이어 지금도 역시 성이 김씨다.

-통고(通考): 隨나라 文帝 때 그 나라 왕의 성은 金 씨요 이름은 眞平인데 가라(伽羅), 임나(任那) 등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하였다. 그 나라의 서.북의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일대에 개의 이빨처럼 툭 튀어 나와 있으며 산세가 험한 곳이 많다. 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朴씨이다. 백성들에게는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처음에 백제가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 도와달라고 했는데 전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쳤다. 이로부터 서로 여러 차례 치고받고 하다가 나중에 백제왕을 붙잡아 죽이면서 그들 사이의 맺힌 원한이 더욱 심해졌다.


*당(唐)나라 시대

-구당서(舊唐書):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로서 한 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었다.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왕이 거주하는 곳을 금성(金城)이라 하고 그 바깥의 둘레가 7~8리요 위병 3천명으로서 편성된 사자대(死者隊)를 두었다. 무덕 4년(621)에 왕 金眞平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高祖께서 친히 이를 위로하고 통직.산기시랑 유문소(庾文素)를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 새서(璽書) 및 그림병풍. 비단옷감 3백 끗을 내려주었다.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그 나라 사람들은 金. 朴 두 성씨가 제일 많고 다른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고조가 海東의 세 나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이가 나빠 번갈아서 무력으로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드디어 그 나라 사신에게 원수가 된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전에 백제가 고구려를 치러 가면서 신라로 가서 좀 도와달라고 요청을 한바 있었는데 신라가 도리어 군사를 발하여 백제를 크게 쳐부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원수가 되어 매번 서로 무력으로 공격을 하다가 신라가 백제의 왕을 붙잡아 죽이기까지 하여 이로부터 원한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32년에 왕이 신라를 기습공격하려고 기병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拘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튀어나오니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에게 살해되었다.)

7년(624)에 사신을 보내 책명(冊命)하여 金眞平을 주국(柱國)으로 삼고 낙랑군왕.신라왕으로 봉하였다.

정관(貞觀) 5년(631)에 진평이 죽고 아들이 없자 그 딸 선덕(善德)을 세워 왕으로 삼고 왕실의 대신인 을제(乙祭)에게 나라의 정치를 모두 맡기게 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진평을 추증하여 좌광록대부로 삼았다 9년(635)에 사신을 보내어 책명으로 善德을 왕으로 삼았다.   

17년(643)에 사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 차례 번갈아서 우리나라를 공격하고 기습하여 수십 개의 성을 잃었으니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하니 도와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은 상리현장(相里玄獎)을 보내 새서(璽書)를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내렸으나 고구려는 듣지 않았다. 태종은 장차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신라에 조서를 내려 사마(士馬:병마)를 모아 대군을 응접하라고 하니 신라에서는 사신을 보내고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남쪽경계로 쳐들어가 수구성(水口城)을 공격하여 이를 무찔렀다. 21년(647)에 善德이 죽으니 추증하여 광록대부로 삼고 나머지 관원들은 예전 그대로 봉하고 그 누이동생 진덕(眞德)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22년(648)에 眞德이 그 아우인 국상(國相)이찬(伊湌)의 아들 김춘추(金春秋) 및 아들 문정(文正)을 보내어 조회하게 하니 황제가 명하여 春秋를 임명하여 특진(特進)으로 삼고 文正을 임명하여 좌무위장군으로 삼았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가 석존(釋尊)과 강론(講論)하는 것을 좀 보겠다고 청하매 太宗은 자신이 친히 지은 온탕비(溫湯碑), 진사비(晉祠碑)라는 비문과 아울러 새로 편찬한 晉書를 내렸다. 장차 귀국하려고 하니 3품 이상의 관원들을 시켜 그에게 주연을 베풀어 환대하게 하였다.

영휘 원년(650)에 眞德이 백제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그 아우 법민(法敏)으로 하여금 황제에게 보고토록 하였다.(춘추의 아들이 法敏이다)

황제는 이를 가상히 여겨 法敏을 임명하여 태부경(太府卿)으로 삼았다. 영휘 5년에 眞德이 죽으니 조서를 내려 春秋로 임금의 자리를 이어 왕을 삼고 개부의동삼사.낙랑군왕으로 벼슬을 더하여 주었다.

영휘 6년(655)에 백제가 고구려. 밀갈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경계를 침범하여 30여 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春秋가 표를 올려 구원을 요청하였다.  현경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을 명하여 웅진대도총관으로 삼아 수륙 10만을 통활케 하고 이어 춘추에게 명하여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쳐서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차츰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 지경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

용삭 원년(661)에 김춘추가 죽으니 조서를 내려 그 아들 태부경(太府卿) 법민(法敏:문무왕)으로 임금 자리를 잇게 하고 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을 삼았다.

3년(66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계림은 지금 길림과 음역.지리가 부합된다. 이는 당시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이미 겸유하고 북으로 말갈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신라왕으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요충지로 삼으려 하였을 것이다) 를 삼고 법민을 임명하여 계림주도독을 삼았다. 법민이 개요 원년(681)에 죽고 그 아들 정명(政明:신문왕)이 왕위를 이었다.

수공 2년(686)에 사신을 보내 조회 하였다. 천수 3년에 정명이 죽으니 그 아들 이홍(理洪:효소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이어 아버지의 작위인 보국장군.행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을 세습케 하였다. 장안 2년에 죽으니 조회를 2일간 폐하고 그 아우 흥광(興光:성덕왕)을 세워 왕을 삼고 이어 형의 작위인 장군과 도독의 칭호를 세습케 하였다.

興光의 본명이 태종과 같기 때문에 선천 연간에 무측천이 고쳤다. (당회요에 의하면 흥광의 본명이 숭기(崇基)로 현종의 이름과 같았던 것이지 태종의 이름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선천은 현종때의 연호이므로 측천이 고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아마 구당서가 잘못 기록하였을 것이다) 개원 21년(733)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동주(東州)로 침입하였다. 이때 흥광의 일가인 김사란(金思蘭)이 입조하여 장안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참에 태복원외경으로 임명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면서 군사를 내서 말갈을 치라고 하고 이어서 흥광에게 작위를 더 주어 영해군사(零海軍使)로 삼았다.

25년(737)에 흥광이 죽으니 추증하여 태자태보로 삼고 이어서 좌찬선대부 형숙을 시켜 조재(弔祭)하게 하고 아울러 그의 아들 승경(承慶:효성왕)을 책봉하였다. 상께서 숙(璹)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그대는 그 나라에 가서 마땅히 경서의 글을 강의하여 (대국의)유교가 아주 성한 것임을 알려 주도록 하라”라고 하고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을 들으시고 즉시 바둑에 능한 솔부의 병조 양계응(楊季應)으로 숙의 보좌관을 삼아 보내도록 하였다.

천보 2년(743)에 승경이 죽으니 찬선대부 위요(魏요)를 보내어 조문과 조제를 하고 이어 그의 아우 헌영(憲英)을 책봉하여 신라왕을 삼았다. 대력 2년(767)에 헌영이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그의 아들 건운(乾運:경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는데 대신 김은거(金隱居)를 보내와 표를 올려 조공하고 책명해 줄 것을 청하자 3년에 사신을 보내 책립하고 건운의 어머니를 태비(太妃)로 삼았다.    

건중 4년(783)에 건운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그 재상 김양상(金良相:선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정원 원년(785)에 양상을 임명하여 검교태위.도독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을 삼았다. 그해에 양상이 죽어 재상 김경신(金敬信:원성왕)을 세워 왕을 삼았는데 경신은 바로 그의 사촌 동생이었다.  14년(798)에 경신이 죽었는데 그의 아들이 경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경신의 적손 준옹(俊邕:소성왕)을 세워 왕을 삼았다. 16년(800)에 사봉랑중 위단(韋丹)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책명하려고 하였으나 단이 운주에 이르렀을 때 준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 왔다. 영정 원년(805)에 병부랑중 원계방(元季方)을 보내어 준옹의 아들 중흥(重興)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원화 3년(808)에 신라 사신 김력기(金力奇)가 황제에게 아뢰기를 “전에 정원16년(800)에 조서를 내려 신의 죽은 임금 김준옹을 책봉하여 왕을 삼고 왕의 어머니 신씨(申氏)를 태비로 삼고 아내 숙씨(叔氏)를 왕비로 삼으셨는데 책봉사신 위단이 도중에서 준옹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책명이 중서성에 있아온바 청컨대 이번에 신이 귀국하는 참에 신에게 주어 가지고 갈수 있도록 해 주십시요”라고 하였다.  7년(812)에 중흥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재상 김언승(金彦昇:헌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언승을 임명하여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을 삼고 그 아내 정씨(貞氏)를 책립하여 왕비로 삼았다.

직방원외랑. 섭어사중승 최정(崔廷)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조문과 제사를 하고 책립을 해 주면서 이곳에 볼모로 와 있던 김사신(金士信)을 보좌로 딸려 보냈다.

태화 5년((831)에 언승이 죽으니 그의 아들 김경휘(金景徽:흥덕왕)을 임명하여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도독계림주제군사.충영해군사.신라왕을 삼고 경휘의 어머니 박씨를 태비로 삼고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다. 태자좌유덕 원적(源寂)에게 분부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조문과 제사를 하고 책봉하라고 한 것이다.

-신당서(新唐書): 신라국은 동쪽은 장인국(長人國)과 서로서로 떨어져 있는데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에 면해 있으며 북쪽은 고구려이다. 왕은 금성에 산다.  장인(長人)은 사람과 유사하고 그 키가 3장(丈)이나 되며 간혹 사람을 붙들어다 잡아먹기도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씩 연이어 있고 골짜기에는 쇠 문짝을 굳건히 달아 관문(關門)이라고 하며 신라에서는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시켜 이곳을 지킨다.

정관 2년(628)에 여악(女樂:가기歌妓)2명을 바치니 태종이 말하기를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고향이 그리워서 보내달라고 애걸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인들 오죽 하겠는가”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보냈다.

그 나라 왕 김진평이 아들이 없자 딸 선덕(善德: 선덕여왕)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나라 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정관 21년(647)에 그 누이동생 진덕(眞德: 진덕여왕)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듬해 그 아들 문왕(文王)과 아우, 이찬의 아들 춘추(春秋)를 보내어 조회 하니 문왕을 임명하여 좌무위장군으로 삼고 춘추를 임명하여 특진(特進)을 삼았다. 이어 장복(章服:관복)을 바꿔 중국의 제도를 따르기를 청하므로 궁중에 있는 진귀한 옷을 내주어 이들에게 내렸다.

용삭 3년(663)에 조서를 내려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鷄林州都督部)를 삼고 그 왕 법민(法敏)을 임명하여 도독을 삼았다.

함형 5년(674)에 신라가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들을 받아들이면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지키게 하매 (당 고종은 크게 노하여)조서를 내려 법민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 아우 우효위대장군.임해군공 인문(仁門)을 임명하여 신라왕을 삼아 장안으로부터 귀국시키고 유인궤를 임명하여 계림도대총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끝까지 토벌하라고 하자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여 사죄하였다. 인문은 결국 돌아가자마자 왕의 자리를 내놓으니 조서를 내려 다시 법민의 관작을 회복해 주었다. 그리하여 백제의 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드디어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개원 연간(713~741)에 왕이 자주 입조하니 황제께서 서문금(瑞文錦), 오색라(五色羅), 자수문포(刺繡紋袍), 금은정기(金銀精器)를 내렸고 흥광(興光:성덕왕)도 역시 이구마(異拘馬)와 황금, 미체(美髢:훌륭한 가발) 등의 여러 가지 물건을 바쳤다. 처음에 발해. 말갈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자 흥광이 이를 쳐서 물리치매 흥광을 영해군대사로 올려주면서 말갈을 치도록 하였다.

25년(737)에 흥광이 죽으니 그 아들 승경(承慶:효성왕)을 왕으로 책봉하고 승경의 아내 박씨를 왕비로 삼았다. 승경이 죽으니 이 아우 헌영(憲英:경덕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 당시 황제께서 촉(蜀)지방에 가 계셨는데 사신을 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까지 가서 정월 초하룻날에 황제를 조견하였다.

대력 초에 헌영이 죽어 그의 아들 건운(乾運: 헤공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아직 어려 마침 재상들이 서로 정권을 다투어 서로 공격하느라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는데 3년 만에 겨우 안정되었다.

건중 4년(783)에 건운이 죽고 아들이 없으니 나라 사람들이 함께 재상 김양상(金良相: 선덕왕)을 왕으로 세웠다.

정원 원년(785)에 호부중랑 개훈(蓋塤)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김양상을 책명 하도록 했다.

영정 3년(808)에 사신 김역기(金力奇)가 그 나라 재상 김언승(金彦昇). 김중공(金仲恭), 왕의 아우 소김첨명(蘇金添明) 등이 문국(文戟)을 요청하므로 조서를 내려 다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모두 두 번 조공하였다.

7년(812)에 언승(彦昇: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장경 보력 연간(821~827)에 다시 사신을 보내 조회하니 숙위로 머물게 하였다.

개성 5년(840)에 홍려사(鴻臚寺)에 적을 둔 볼모 및 학생들로서 연한이 만기가 된 150명을 모두 돌려보냈다.

장보고(張保皐)와 정연(鄭年) 이란 자가 있었는데 모두 싸움을 잘 하였고 창을 잘 썼다. 정연은 바다에서 잠수할 수 있는데 그 땅 밑 50 리를 걸어가서도 숨이 막히지 않았으며 그와 용맹을 겨룸에 있어 장보고도 그만 못했다.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부르고 있으나 보고는 나이로 하여, 연은 재주로 하여 항상 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나라에서 중국에 들어와 무령군(武零軍)의 소장(少將)이 되었다. 나중에 보고는 신라로 돌아가 그 나라 왕을 뵙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도처에서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원컨대 청해(淸海)에서 지킬 수만 있다면 적들이 사람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해로의 요충이므로 왕응 보고에게 1만명을 주어 이를 지키게 했다. 태화(문종)이후로는 해상에서 신라인을 사고파는 일이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그 나라에서 귀하게 되었는데 연은 연수(漣水)라는 곳에서 춥고 배고픈 뜨내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수주(戍主)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 보고 한태서 빌어먹을까 합니다” 라고 하니 원규는 “네가 보고 한태서 믿는 것이 무엇이기에 어째서 자진해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연은 춥고 배고품에 떨며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시원하게 싸움이나 해 보고 죽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신라로)가서 보고를 만나 보았더니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환대가 극진했다. 먹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대신이 왕을 죽여 나라가 어지럽고 왕이 없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보고는 군사 5천명을 떼어 연에게 주면서 그를 붙잡고 울면서 ”그대가 아니면 화난을 평정할 수 없네“라고 하였다. 연은 그 나라에 이르러 반란한자들을 죽이고 왕을 세워 이에 보답했다. 왕은 드디어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그 대신 연으로 하여금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회창(무종) 이후로는 다시 조공이 이르지 않았다.


-당회요(唐會要): 신라는 원래 변한의 땅이다. 그 선조는 고구려에서 왔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자 그 무리들이 옥저로 달아나 그곳에 의지하여 지켰다. 나중에 고국으로 다 돌아가고 거기에 남아있던 자들이 신라로 되었다. 그 나라에는 김. 박 두 성씨가 가장 많고 성씨가 다른 사람들과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  

이하 신당서나 구당서에 없는 내용, 다른 내용만 적고 비슷한 내용은 생략   영휘 원년(650)에 신라왕 김진덕이 백제를 크게 격파하고 김법민을 사신으로 보내 조회하였다.

5년(654)에 진덕이 죽으니 고종은 영광문에서 거애(擧哀)하고 태상승 장문수를 사신으로 보내어 그를 조문. 제사 하도록 하고 추증하여 개부의동삼사를 삼았다. 이어 능라. 비단 2백 필을 내리고 조서를 내려 그 아들 춘추로 왕위를 잇게 했다.

인덕 2년(65) 8월에 법민이 웅진도독 부여융과 더불어 백제의 웅진성에서 회맹하였다.

-장구령집(張九齡集).여신라김흥광칙(與新羅金興光勅): 경이 패강(浿江)에 군영을 서치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은 발해의 요충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록산(安祿山)과도 마주 바라보고 있어 여전히 원대한 계책이요 원래부터 좋은 계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저 조그만 발해가 오래전에 벌써 주벌(誅罰)을 모면한 점을 매양 미워하고 있었는데 이 점은 매우 가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장구령이 당 현종의 명을 받아 지은 신라 왕 김흥광에게 보내는 칙서로 장구령집 곡강집(曲江集)에 수록된 듯 하다. 신라가 패강에 군대를 두어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는 하편 당의 안록산과 함께 발해를 견제하고자 한 것이다)


*오대(五代)시대

-오대사(五代史): 신라는 당고조 때 김진(金眞)을 책봉하여 낙랑군왕를 삼은 뒤로부터 그 후대 사람이 항상 임금이 되었다. 동광 원년(923)에 신라국왕 김박영(金朴英)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장흥 4년(933)에 권지국사 김보(金溥)가 사신을 보내왔다 김박영. 김보의 연대와 왕위에 오르고 죽은 기록은 역사에서 빠졌다. 진(晉) 이후로 부터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동광 원년(923) 신라국왕 김박영은 54대 경명왕에 대당되는데 삼국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승명(昇明)으로 되어있다. 金溥는 56대 경순왕으로 삼국사기에는 김부(金傅)로 되어 있다.溥는 보. 부, 박으로도 읽는다 )

-책부원구(冊府元龜): 후당(後唐) 동광2년(924) 11월에 국왕 김박영(金朴英)이 창부시랑 김락(金樂),녹사참군 김유경(金幼卿)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송(宋)시대 

-제번지(諸蕃志): 신라국은 천주(泉州)의 해문(海門)과 마주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양가들이 자오지설(子午之設)을 꺼리고 싫어하기 때문에 장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명(四明)에 먼저 들렀다가 나중에 다시 출발하였다. 일설에는 천주의 물살이 차츰 낮아졌기 때문에 꼭 사명을 거쳐 가게 되었다고 한다.(제번지는 남송시대(1225) 조여괄이 쓴 지리서로 58개국의 풍토. 물산과 무역에 관한 정황을 기록한 책이다. 천주는 중국의 동남부 복건성에 있는데 신라와 마주보고 있다하니 의아하다. )

대성으로는 김, 박씨가 있다. 그 나라에서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므로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적어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고려가 신라를 병탄한 뒤에는 동북쪽이 조금 넓어지면서 그 서북쪽이 거란과 닿게 되었다. 옛날에는 요나라와 경계를 이루었다가 나중에 침략을 당하자 압록강으로 물러나 지키면서 요충지로 삼았다.

-통고(通考): 고려는 신라를 동주낙랑부(東州樂浪府)로 삼아 東京이라 하였다. 건염(남송 고종) 2년(1128)에 멀리 떨어진 외국으로 갈 사신을 널리 구했던바 절동부총관 양웅침이 자기가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과 우호관계를 맺어 연운(燕雲)에 가겠다고 자청하니 가형부상서로 삼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고려에서 조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곧 돌아왔다.

(연운(燕雲):하북 및 산서북부의 유주(幽州)와 운주(雲州)를 가리킨다. 양웅침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기를 자청한 것은 금나라에 붙잡혀간 휘종과 흠종 황제를 맞아오기 위하여 고려의 힘을 빌리려고 하였으나 송나라와 금나라의 분쟁에 괜히 휘말리지 않으려는 고려측의 현명한 대처로 2개월여를 고려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송사 고려전 참조)


*요()시대

-요사(遼史): 태종 천현 원년(926)에 왕도(王都) 등이 신라를 치는데 종군하여 출중한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상을 내려 주었다. 3년(928)에 동단(東丹)의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동평(東平)으로써 채우려 하니 그 백성들이 신라 혹은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성종 개태 원년(1012)에 귀주(歸州)에서 보고하기를 “주민들이 원래 신라에서 옮겨온 사람들이라서 아직 문자를 잘 모르니 청컨대 학교를 세워 이들을 가르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요사. 병위지(遼史. 兵衛志): 속국(屬國)으로 기록할 수 있는 것이 59개 인데 그 가운데 21번째가 신라이다.

-요사. 지리지(遼史. 地理志): 당나라 원화 연간(806~820)에 발해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해주(海州) 암연현(岩淵縣)의 동쪽경계가 신라요 옛 평양성은 이 현의 서남쪽에 있었다. 또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조천관(朝天館)을 설치하여 신라의 사신을 접대했다고 하였다.

-거란국지(契丹國志): 태조가 여러 부(部)를 병탄하니 발해왕 대인선(大諲譔)이 이를 매우 꺼려하면서 신라와 더불어 서로 돕기를 하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신라의 말과 물건의 이름은 중국과 비슷하다. 그 나라 왕송(王誦:고려 목종)이 거란 승천태후 이후로 공물을 바쳤다 그 후 그 나라 왕인 송이 부하에게 살해되니 그 아우인 순(詢:고려 현종)을 세웠다. 거란에서는 왕송이 공물을 갖다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일으켜 북쪽을 쳤고 10년이 되어서 비로소 전쟁이 그쳤으며 신라도 여전히 조공을 하였다. 거란의 사지(四肢)는 동남으로 신라국에 이르렀으며 압록강 동쪽 8리에 있는 황토령(黃土嶺)을 경계로 하였다.(이미 이때 신라는 고려에 병합되어 없는데 조공 등은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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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9-06-08 16:01
   
*원(元)시대
-원사. 고려전(元史. 高麗傳): 고려의 영토는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백제에 이르며 모두 대해에 걸쳐 있다. 나중에 땅을 넓히고 더욱 넓혀서 옛 신라. 백제. 고구려를 병탄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편자의 주
-신라는 魏나라 때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이를 일러 사로(斯盧)또는 신로(新盧)라고도 하였는데 실은 같은 나라였다. 당나라 초기에 백제. 고구려 두 나라의 땅을 병합하였다.
-용삭 원년(661)에 처음으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鷄林州都督部)로 삼고 신라왕 김법민 으로써 대도독을 겸하게 하였으며 그 후 임금의 자리를 잇는 사람은 모두 계림도독이라는 칭호를 겸하였다.
-신라 옛 땅은 원래 백제. 고구려와 더불어 이웃하여 있었다.
-신당서 고려전을 보면 고구려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遙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해있고 북으로는 말갈과 접해있다고 하였으니 지금 봉천(奉天),요양(遙陽)으로부터 남쪽으로 봉황성(鳳凰城)까지, 압록강을 건너 지금 조선의 함경, 평안 등의 道까지가 고구려요, 지금 개원(開原), 광녕(廣寧), 금주(錦州), 의주(義州), 영원(寧遠)으로부터 남쪽으로 개평(開平), 복주(復州), 영해(寧海)까지, 또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조선의 전라, 황해, 충청 등의 道가 끝나는 곳까지가 백제이다. 그리고 신라의 지경은 동남쪽으로 조선의 경상, 강원 두 道를 겸유하고 서북쪽으로 길림(吉林), 오랍(烏拉)에 직접 이르게 된다. 또 서쪽은 개원(開原), 철령(鐵嶺)에 가깝고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툭 튀어나와 있으니 옛날의 백제의 동북과 동남은 모두 서로 고구려와 가깝게 인접해 그 안에 끼어있었기 때문에 통고에서도 역시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고 했던 것이다.
-봉사행정록(奉使行程錄)에 “함주(咸州)에서 출발하여 동주(同州: 지금의 개원. 철령의 경계)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라다 보이는 큰 산이 곧 신라의 주이다“라고 한 것이라든가 요지에 말한바 해주(海州)의 동쪽경계는 신라이다”라고 했던 것들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당나라 현경. 건봉 이후에 백제. 고구려의 땅이 대부분 신라에 들어가게 되어 동서의 길이가 9백리나 더 늘어나고 남북의 길이가 1천여 리나 더 늘어나서 영토가 더욱 넓어진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 사람들의 글에서 해외에 대하여 말하는 것들이란 대게 서북은 발해. 거란으로 막혔으므로 반드시 바다를 통해서야 비로소 그 南境에 달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개원. 원화(헌종)의 무렵에 이르러 발해가 더욱 융성하여 압록강 이북은 모두 발해의 차지가 되었던바 요지(遙志)에 발해왕 대인수가 신라를 평정하여 군읍을 설치했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후당 청태(말제) 말에 고려가 다시 일어나 왕건이 신라의 변읍을 그대로 차지하고 송악(松嶽)에 도읍을 정하였던바 원사에 압록강 동쪽 1천리에 있었던 이전의 평양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신라의 소유로 되어 거의 해성(海城) 이동 및 조선의 여러 道는 더는 당나라의 지경이 아니었으며 오대(五代)로부터 遙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전하여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계림(鷄林)에 관하여는 오늘날의 길림(吉林)으로서 계(鷄)와 길(吉)은 음이 서로 부합되며 여러 지리 관계를 조사해 보아도 역시 딱 들어맞는다. 대개 용삭(당 고종) 때에 두 나라를 겸병하고 나서 말갈. 발해와 더불어 땅이 서로 엇갈리는 곳이므로 이곳에 중요한 진을 설치하여 왕이 몸소 이를 다스렸던 것이다. 이후로 그대로 답습하여 그 칭호를 세습하여 비록 신라의 옛 땅인 길림이 발해로 돌아갔을지라도 그 도독의 칭호는 여전히 신라였고 계림은 결국 신라의 통칭으로 되었으며 요. 송 이후에 고려에 병탄되어 곧 모두가 고려에 속하게 되었다.(당고종(661~663) 무렵 계림 곧 길림이 신라의 관활이 되어 중요한 진을 설치한 것이라고 하였다. 신당서에 용삭 3년(663)에 조서를 내려 신라를 계림주도독부(鷄林州都督部)를 삼고 그 왕 법민(法敏:문무왕)을 임명하여 도독을 삼았다.)
-왕운이 찬한 계림지(鷄林志)에는 왕희(王熙). 왕후(王煦)가 계림군공으로 봉해지기도 하였는데 역시 옛 이름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뿐이다.
(계림지는 송나라 왕운이 찬한 것으로 원풍 연간에 고려에 사신으로 갔다 온 이래 사적 및 회견하는 예절, 방문보고서 등을 기술하였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충숙왕 3년(1316)에 왕의 아우들인 왕후(王珛)를 단양부원대군으로 왕훈(王塤)을 연덕부원대군, 왕후(王煦)를 계림부원대군으로 임명한 사실이 있는데 왕운이 이러한 사실을 사신으로 와서 견문하고 기록한 것이다 )
-여러 사서에서 신라는 맨 처음 옥저(沃沮)에 의지하여 지켰다(보거保據) 고 하였다. 후한서, 위지, 통고 등을 상고한바 모두 동옥저, 남옥저, 북옥저 등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대 군장은 없지만 읍락마다 각각 통수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땅은 읍루에 있다. 혹은 부여의 남쪽에 있다. 혹은 읍루의 북쪽에 있다. 혹은 현도에 속한다거나 혹은 낙랑에 속한다거나 혹은 고구려에 속한다거나 동쪽으로 바다에 면해 있다거나 남으로 예와 접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두 조선, 고구려 및 한나라의 낙랑 등 여러 군에 관한 일들을 기록 하였은즉 옥저란 지금 와집(窩集)으로 생각되며 盛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경지대의 동. 남. 북의 여러 곳에는 어디에나 이런 곳들이 많았다.
(와집(窩集): 우거진 숲, 쌓인 낙엽(가을과 겨울에는 얼어붙는)진창 따위로 통행이 어려운 산림지역)
-신라가 보거(保據)하였다는 곳은 관구검전에 숙신의 남쪽경계 1천여 리에 있었은즉 길림. 오랍지역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장백산과 가까운 아마도 납심, 고열눌, 납로 등 여러 와집지역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나라 초에 30여 대가 되었고 당나라 고종 때부터 무종 때까지 또 18대가 되었는데 五代 이후에 사서에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나라 산림에 관해서는 서로 잇닿아 있었다. 법령의 집행이 공정하여 물건이 길에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이 서예와 활쏘기를 잘 하였는데 사서에서 군자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결코 빈말이 아니다. 휴인(休忍). 탐라(耽羅)같은 여러 나라는 모두 신라에 병탄되어 그 유적은 오늘의 조선 남쪽 경내에 있다고 한다. 
[출처] 흠정만주원류고(민족.강역)를 통한 한국사 조명 (펌)|작성자 민주시민
진짜인간 19-06-08 20:41
   
이거 청나라판 동북공정 같네요 흠정이라는 뜻이 황제가 검사?했다는 정도? 역사책이 정치주관이 들어가면 객관적이지 않을뿐더러 가장 중요한 만주의 주인 고구려 얘기가 없네요
여진이 중국을 멸하고 패권잡으니 정체성 발휘하기 위한 책
지금 중국이 딱 이용해먹겠군요 중국은 하니의 중국이라는 개소리로 인접국 쳐들어가는 명분 쌓아놓았지요 일본 인도베트남을 쳐들어가도 하나의 중국 이럴넘들입니다
     
감방친구 19-06-08 20:58
   
그렇지 않습니다
만주원류고에서는 고구려가 당연히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9-06-08 21:02
   
만주원류고에서는 전혀 조선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만주지역의 연혁을 기술하며 고구려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주의 원류에 대하여서 고구려를 언급하고 있지 않을 뿐이지
오히려 숙신, 물길과 함께 부여, 삼한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진짜인간 19-06-08 21:12
   
날잡아서 정독한번 해보겠습니다 ^^
북문 19-06-09 02:01
   
역사서와 하플로그룹, 언어’ 문화유적을 교차연구 하면 많은 것이 검증될 것 같네요 예를들어 하플로그룹C 는 고구려에서 온것이 맞다고 볼수 있다던지
영종햇살 19-06-09 08:18
   
수서의 기록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
신라는 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한나라때 낙랑 땅에 살았다. 혹 '사라'라 하였다.

고구려 동남쪽이면 경상도 지방인데 경상도가 '낙랑 땅'이라는 얘기.
이 모순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힐까요?
hell로 19-06-09 13:07
   
신채호의 조선상고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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