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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1-15 18:04
[북한] 악의신.이오시프 스탈린.독재의 최고봉.13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234  

사실 대숙청에서 지역 행정기구의 숙청은 제1차 5게년 계획 때부터 뿌려져 있던 씨앗이었다. 지역 지도자들은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막대한 중앙 투자를 받기 위한 열정으로 넘쳤을 때 사기친 것들이 걸려나왔던 것이었다.

 

지역 지도부가 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지역중심적 행정이었으나 스탈린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그를 위해서 자신들의 제도적 이점을 활용해 중앙정부를 속여왔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짓으로 장부를 작성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탄전을 있다고 속이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명령행정 시스템"이 진화해가면서 모스크바는 계속되는 실패와 그에 대비해 야심찬 계획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역도 이런 현상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들은 투자를 받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권한을 넘겨받으면서, 그리고 권한을 실행할 능력을 갖추면서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 이제 중앙 내부에서의 갈등도 사라져서 트로츠키나 부하린을 쳐내기 위해 지역당의 협조를 받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리고 계획을 만드는 것은 중앙 정부 부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모스크바는 지역에 대한 대규모 테러를 감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역 간 결탁이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어떤 범죄적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지역 지도자들이 행한 중앙 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조작된 보고서를 올려보내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위기가 심해질 때 그들은 희생양들을 찾았으나, 이런 것으로도 버티지 못할 임계점에 도달하자 물결이 바뀌고 말았다.



사실 희생양을 찾아서 모스크바에 제물로 헌납하는 전략은 자기파괴적인 전략이었다. 경제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죽어야만 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지소되자 긴장과 갈등과 불만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는 하부 단위에서의 상호 비방과 기소의 물결을 촉진시키며 모가지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계산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들도 예상 못한 건 그간의 희생양 만들기 관행이 빚어낸 화학적 결합이었다. 즈다노프가 만들어낸 이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예조프와 몰로토프의 작품이었다.

 

3월 지역당 회의에서 시작된 거센 비판의 물결을 버티고, 심지어 얼마 안 가 시행된 선거에서도 상당수의 간부당원들이 그대로 살아남자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6월 지역당 회의에서 일반 당원들이 트로츠키주의자와 파시스트 첩자라는 레토릭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보타주, 외국 첩자, 반대파, 인민의 적 등의 라벨링 관행이 이 폭발적 비난의 물결과 맞물려버린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군부 대숙청의 불길이 지역당에 옮겨붙기 시작한다.

 

소련군은 군관구 체제라 군관구 장이 지역당 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는데.(여기서 이를테면 벨로루시 군관구 장인 우보레비치는 스몰렌스크가 수도인 자파드나야 주의 당회의에 참여하였다.) 이들이 파시스트 첩자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동안 "니들 이런 첩자를 당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시켰냐?" 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기 때문.

 

스탈린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을 염려하면서(물론 쾌재도 불렀겠지만) 카가노비치와 말렌코프와 같은 그의 심복을 지방 당 대회에 참관시켜 적절한 교통정리를 시행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갈아버렸다.

 

말렌코프는 벨로루시로 갔고,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로, 베리야는 그루지야로, 미코얀은 아르메니아로 갔다. (여기서 재밌는 건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 베리야도 그루지야 출신, 미코얀도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그와 동시에 이제 숙청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바로 예조프시나였다.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대숙청의 모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소하고, 10년 전의 생각 없이 했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며 비판받고, 출신 계급이 어디냐에 따른 충성도 체크가 이루어지는 그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것이었다.

 

소련 사회 구석구석까지 숙청의 칼날이 기어들어왔는데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곳은 지역당의 수뇌부였다. 고참 볼셰비키는 그들의 명망이 높아서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예조프시나의 당 지도부 타격 때 지도부에 들어가 있어서 걸린 것에 가까웠다.

 

한편 중앙당의 스탈린 측근들은 이 대혼란을 기회로 조직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지도부는 이 비난의 물결을 아래로 돌려서 자신들의 곤경을 피하려고 하였고,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도 공포정치의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은 당시 국가 내부에 만연해 있던 사회적 긴장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것이 예조프시나 때 터져나왔던 것이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이나 도덕적 오류들은 있는 현실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첩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로 치부되었었고 이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적대관계가 폭발하고 표면화되자 서로가 서로를 진지하게 트로츠키주의자나 파시스트 첩자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고발해 댔던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1936년 경제위기로 소련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훨씬 극심해진 상황에서 이런 공포의 물결이 지속되자 상급 당원들은 하급 당원들이 자신들을 없애서 소련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었고, 하급 당원은 상급 당원들이 외국 첩자와 결탁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이 속수무책으로 털려나가자, 모든 사람들은 이 믿음이 결국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독일군 측에서 진행한 NKVD 포로 심문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당장 스탈린조차 이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고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독일군에게 전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숙청 기간 동안 저 간첩이 왜 체포되지 않았느냐고 분통을 터트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당무의 상당부분이 줄곧 대혼란이었던 것처럼 이 예조프시나도 계획된 공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조직들이 죄다 당원 관리도 안 되고 지리멸렬한 상태인데 숙청기관인 NKVD만 빠릿빠릿한 기율로 움직이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누구를 숙청해야 하나부터 어디까지 숙청해야 하나, 이 사람 숙청해도 되는 건가에 대해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이나 합의가 없이 숙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문단에서 상당부분 참고한 '대숙청의 기원'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기 이전에 쓰여진 80년대 말의 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은 관련한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높을 것이다. 

 

또한, 즈다노프와 예조프의 두 노선이 별개로 진행되다가 37년에 갑자기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대혼란을 촉발하는데, 스탈린이 이 둘의 화학반응을 예측하고 완전 의도적으로 두 노선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한 건지, 아니면 스탈린도 예측 못한 상태에서 두 노선이 결합하며 예조프시나가 터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머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정황상 스탈린이 이걸 무작정 확대해서 통제하지도 않고 전부 박살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왜냐하면 스탈린 본인의 성격이 모든 것을 통제 하에 두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료제가 예조프시나로 파괴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6월에 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서 "일반당원님들, 우리 조금만 속도 줄이죠. ㅎㅎ" 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설이 실리고 은연 중에 스탈린 본인이 과도한 비난 드라이브는 삼가자는 신호를 여러 방면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즈다노프 노선에 따른 소비에트에 대한 비밀선거 및 자유로운 입후보는 1937년의 하반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후퇴하였다. 모스크바 중앙당이 농촌지역에서의 반대표를 감당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더하여, 스탈린의 예조프에 대한 태도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숙청을 지휘하면서 NKVD가 너무 많은 힘을 쌓았기 때문이다.

 

예조프와 NKVD에 대한 온갖 찬양이 언론을 뒤덮었고, 레닌훈장이 NKVD 인사들에게 뿌리듯 수여되었으며 심지어 예조프의 이름을 딴 도시마저 생겼다.

 

마침내 10월, 예조프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예조프의 승승장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피에 굶주린 미친 개를 누가 좋게 보겠는가?  아마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최초로 목이 날아간 사람이 라브렌티 베리야인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야, 그래도 우리들끼리는 같이 스탈린 밑에서 개고생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는데, 쟤는 안 될 것 같지 않냐?"하는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흐루쇼프의 승리 이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말렌코프는 한직으로 밀려나 여생을 보내다 죽었지만 베리야는 짤없이 죽었다.



위에서는 이런 스탈린의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볼쇼이 극장에서 치러진 NKVD 20주년 행사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그 전에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국 고위 위원들이 그 해 12월 선거에서 최고 소비에트에 진출하게 된 것에 대한 취임연설이었다.

 

13명의 국원들이 연설을 했는데, 이 중 7명의 국원들은 NKVD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 한 번 언급이라도 해준 반면, 스탈린, 몰로토프, 즈다노프, 칼리닌, 보로실로프, 미코얀은 예조프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공치사를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예조프에게는 매우 불길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더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연설 중 일부가 검열당해 출판되었던 것이다. NKVD 20주년 행사는 그 얼마 뒤에 있던 일이었고, 이때 스탈린은 그의 치밀한 정치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일단 행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NKVD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박아놓은 것이 1타였고, 더 중요한 2타는 참석을 안 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참석을 하기는 했다.

 

행사 다 끝나고 음악 콘서트할 때(...).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음악 들으러 왔다는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이를 보도했는데, 프라우다의 편집을 감독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하면... 스탈린이 그 이전에 집단농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축하하는 자리나 최고 소비에트 투표장 등의 행사에도 참석한 걸 생각하면, NKVD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중간에 음악 들으러 왔다고 둘러댄 이 행보는 후에 있을 토사구팽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예조프의 팔을 잘라놓는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의 부관들은 임업인민위원회나 우편통신인민위원회 등으로 전출되었고, 그의 부하들을 따라 그도 몰락하게 된다.



예조프는 이런 움직임에 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된다. 특히 숙청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즈다노프를 비롯한 당 내 스탈린의 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당원에 대한 과도한 숙청을 비판하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이 이끄는 기관들도 과도한 숙청으로 조직력에 타격을 심대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예조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숙청을 더욱 심하게 진행하는 자충수를 두었으나, 내부 단속에 실패하였다.

 

NKVD 극동 지부에서 예조프가 일본 파시스트들과 연계 되어 있다는 증언이 나와버린 것. 예조프는 더욱 초조해져서 최고 소비에트에서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라고 바꿔야 한다!" 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냥 한 큐에 거부해버렸으며 예조프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지게 된다.



특히 결정타는 몰로토프와의 갈등이었다. 위에서 몰로토프오르조니키제 갈등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숙청 막바지에도 여전히 소브나르콤 의장이었던 몰로토프는 산하 기관의 장이었던 예조프에 대해 또 질책을 가했다. 정보기관이 왜 장관회의 의장 밑인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NKVD의 정식 명칭은 '내무인민위원회'였다.

 

NKVD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식 정부부처였고 예조프는 장관급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NKVD 또한 각 인민위원회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인민위원회 회의(소브나르콤)의 산하기관이었고 일단은 예조프도 오르조니키제도 서열상으로는 몰로토프의 아래였다. 여하튼 그걸 듣고 예조프는 그동안 느껴왔던 위기의식이 폭발해서 폭탄 발언을 던지는데...

 

"내가 당신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나는 유능한 기관에 그런 종류의 질문은 하지도 않을 겁니다. 소브나르콤의 전 의장이었던 알렉세이 리코프도, 내 집무실을 거쳐갔다는 걸 잊지 마시지요. 그리로 향하는 길은, 심지어 당신일지라도 닫혀있지는 않습니다.리코프는 부하린파의 일원으로 예조프가 그의 숙청을 담당했다.
 
 
몰로토프는 이걸 듣고 '저 새끼가 돌았나.' 라고 생각해 이를 스탈린에게 보고한다. 어쨌든 몰로토프는 그의 상관이었고 스탈린의 둘도 없는 최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상관에게 "너도 나한테 깝치면 숙청시켜 버린다!" 라는 엄포를 질러놓은 것을 스탈린이 묵과할 사람은 아니었다. 몰로토프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예조프를 불러서 몰로토프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예조프는 묵묵히 사과하였고 다른 데서 계속 숙청을 진행하였으나 이제 스탈린의 강철 빗자루를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예조프의 기세는 한 풀 꺾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1938년 1월, 예조프는 NKVD 자리를 유지하는 한편 수로운송인민위원회라는 아주 중요한 직책(...)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당원들에 의한 무자비한 너 고소를 억제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파들을 살려두는 안일한 일은 하지 않았다. 곧이어 니콜라이 부하린의 재판이 뒤따랐고, 1937년 2월에 그가 "한쪽 극단에서 벗어나서 다른쪽 극단으로 벗어나는 일을 여러분들은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듯이, NKVD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약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프만큼은 철저히 찍어눌렀다.
 
1939년 1월 이후, 그의 이름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예조프의 심복들도 제거되었고 그들은 베리야의 심복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18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이 모든 이야기를 그의 정치적 의도하에 정리하는 연설을 한다. 제1차 5게년 게획 이래로 너무나 많은 당원들이 들어와 조직이 혼란스러워졌으며, 그들이 관리가 안 된 상태였고, 그 이후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 사건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1935년의 당 문서 확인 작업, 1936년의 당 문서 교체 작업의 지연, 그리고 예조프시나까지 포괄하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 우리의 당에서, 당원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더 좋습니다. 이것은 큰 성취입니다.
 
'당원 교육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숙청으로 해결하려 한다.' 는 이유로 애초부터 예조프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았던 즈다노프는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희생이 있었다며 탄식하나, 스탈린은 당대회에서 즈다노프에게 "분명 무고한 희생이 우리 예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 작업은 어차피 했어야 하는 일이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 는 식으로 그를 다독였다. 마침내 소련 전 지역에 대해 강철같은 규율을 부과하려던 스탈린의 시도는,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대혼란으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수정주의적 시각에서의 대숙청은 (적어도 '대숙청의 기원'을 쓴 존 게티의 입장에서는) 제1차 5게년 계획을 거치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지역당을 제압하고 중앙당의 관료제적 상하관계에 입각한 통제를 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 개인의 휘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규율 같은 것도 없는 개판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앙지역의 갈등 뿐만 아니라 중앙당 내부에서의 몇몇 명망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사태를 혼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당 내부의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숙청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증거들은 모두 스탈린 시대마저도 일사불란한 규율로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정주의측에서는 키로프 암살부터 예조프시나와 예조프의 숙청으로 이어지는 스탈린의 엄청나게 기나긴 계획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그 본질적인 목표가 과연 스탈린의 정치사상적 반대파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또한 아래의 문단에서 언급되는,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으로 대숙청이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물론 대숙청은 스탈린 개인의 권력을 인류 역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을까? 흔히 대숙청하면 언급되는 키로프 암살과 이어지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에 대한 재판은 아주 자극적이고,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암살 혹은 처형하여 스탈린 본인의 절대 권력을 수립한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관료제 기율의 전국적 확립과 중앙당과 지역당의 위계설정이 스탈린에게는 더 중요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버가 말한 "폭력의 독점체"로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스탈린의 시도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숙청은 소련 사회의 거대한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는 문제로, 단순히 권력에 미친 독재자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숙청에 대한 스탈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단순히 젊은 세대들이 윗 세대를 쳐내고자 한 운동에 스탈린이 편승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그렇다.
 
 
몰로토프, 즈다노프, 예조프를 조종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끝내는 팽해버리는 모든 과정을 지휘한 자가 스탈린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자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 마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사실 대숙청의 키 플레이어이자 당내 급진파의 양대 노선의 대표라고 할만한 즈다노프와 예조프 모두 스탈린과 목표를 공유하는 측면은 분명 있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다들 스탈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이 되어버렸다.
 
 
예조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사구팽 당한 거로 이를 보여주었고, 즈다노프는 살아남긴 했으며 예조프의 노선에 줄곧 반대했으나 결국 예조프의 사업에 엄청난 버프를 걸어준 셈이 되었다.
 
 
 
키로프 암살 이후 즈다노프와 함께 당원 정치교육 사업을 같이 맡아서 그를 핵심 지도부에 끌어온 것도 스탈린이었고, 1937년 2월에 다분히 지역당 지도부를 공격하는 연설로 이 혼란을 촉발시킨 것도 스탈린이었으며, 야고다를 경질하고 예조프를 올린 것도 스탈린이었고, 끝내는 예조프를 죽인 것도 결국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한된 자료로 인하여 스탈린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였는가를 파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상.   끝.   제 1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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