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에 김일성은 지방에 있는 자체의 유휴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여성들이 직장에 나와 일할 데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시기에 공장 기업소들과 기관책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김일성은 지배인들에게 가정부인들을 직장에 진출시킬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설명해 주고 각 직장에서 여성들을 대담하게 채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지배인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력이 부족하여도 남자들끼리만 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배인은 "여성을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여성들에게 선전산후에 유급휴가를 주어야 하며(처음에는 90일이었으나 그 후 150일로 늘어났다.),
둘째는 어린아이가 조금 감기만 걸려도 직장에 나오지 않으며,
셋째는 말만 많이 하고 일은 안하며 특히 뒤에서 간부들의 흉을 보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은 그 지배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가 여성들을 직장에 내보내자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이 부족 되어서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집에서 부엌일만 하고 있으면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면 자연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여 방해하게 된다.
사실상 부엌일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들을 부엌에서 해방하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아이들을 기르는데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 모든 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 후 도시와 농촌 곳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가 줄줄히 운영되었고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59년이었다. 그 해에는 공업은 발전되었지만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논의되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김일성은 "나는 여러 가지 잡곡을 다 먹어보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것이 고량(수수)같이 생각되었다. 고량을 사오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든 어려운 생활을 다 겪어 본 분이 다르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어느해 평안북도 창성군의 농촌을 현지지도 했을 때의 일이다.
리(理)당 비서가 김일성을 안내하였는데 리당비서의 집이.. 지주집을 몰수한 것으로서 좋은 기와집이었다. 리당비서는 해방 전에 그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집을 돌아보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형편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도 들렀다.
그 옆집은 작은 집이었는데 깨끗이 꾸려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가마 안에 점심 밥그릇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밥이 식지 않고 따끈따끈 하였다.
또 장 단지와 채소절임단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리당비서는 "그는 해방 전부터 목수일(목공)을 해온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월수입은 리당비서의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 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있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치대표단들 뿐 아니라 학자대표단, 예술인 등 외국인대표단을 많이 만났다.
김일성은 대중집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부들과 협의회도 많이 하였고 협의회 참가자들의 의견도 열심히 들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였으나 동료들과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회합 이외에 측근자들만 모아놓고 술파티같은 것을 조직하는 일이 없었다.
김일성은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서기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 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 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굳이 부정적인 면을 찾아야 된다면..<자기 친척들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이상.. 0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