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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12 03:11
[북한] 독립운동가 손,씨 가문과 김일성의 우정.(상) 편
 글쓴이 : 돌통
조회 : 732  

일제침략과 남북분단속의 애국과 우정 비화  -손원태와 김일성의 휴먼드라마를 중심으로- 

 

☆☆☆ 손정도 목사의 둘재 아들 손원태 박사

 

고 김일성 주석이 만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때의 형제처럼 지낸 재미 원로의사(병리학 박사) 손원태가 2004 년 9월 28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시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90세에 별세했다.

 

북한에서는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즉각 미국의 손 박사 유가족에게 조전과 화환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당일 북한 중앙방송과 양방송이 전했었다.

 

미국에서도 오마하시 호프 프레스피테리안 교회에서 손 박사 장례 예배를 가질 예정이라고 그 당시 `손정도 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 전 총리)가 발표하였었다. 손 목사는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냈고, 대한적십자회를 창립한 독립운동가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과 가까웠던 손정도 목사는 임시정부에 실망하고 지린성 룽징으로 가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김일성 주석은 이 교회에 어머니를 따라 다녔으며 손 목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손 목사의 자녀들과 김일성 주석이 친형제처럼 지낸 특별한 인연은 한국에서는 금서로 못 박혀 있지만,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2권 「손정도 목사」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김일성 회고록에서 김주석은 지린성에서 일제에 의해 투옥됐다가 "감옥을 나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달 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 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면서 "아버지처럼 따랐던" 손씨 일가와 친교를 회상했다. 

손 박사는 1991년 북한 해외동포영접부의 초청으로 부인 이유신씨와 함께 처음으로 방북해 김 주석으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 주석의 생전 약속에 따라 1994년 8월 11일 김 주석 상중에도 불구하고 손 박사를 평양으로 불러 고위 당ㆍ정 간부들을 대거 참석시킨 가운데 80회 생일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줬으며, 손 박사의 기거를 위해 호화판 시설(철봉초대소)을 지어주기도 했다.

 

당시 손 박사는 "상중이라 안된다"면서 극구 만류를 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버지의 뜻"이라며 생일잔치를 강행토록 해 손 씨 일가에 대한 김일성 부자의 배려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했었다.

 

손 박사는 영문으로 `김일성 주석과 조선의 투쟁'(Kim Il Sung and Korea's Struggle)을 저술했으며, 그의 김일성 주석과의 인간관계는 형수인 홍은혜 권사가 보관한 a-4용지 140매 분량의 회고록에 상술되어 있다.

 

손원일 제독과 손원태 박사 내외분은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하였지만, 손제독의 부인은 현재 96세로서 아직 건강하며, 지난 10월 12일엔 해군회관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무궁화와 사꾸라”란 일제시 마산여고 동창생인 일본 친구와의 각별한 우정을 되 색이는 내용의 단행본을 내놓고서 직접 그 친구의 저음하여 불러 준 찬송가(하늘가는 밝은 길)를 피아노로 연주함으로서 갈채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의 은인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있다. 1926년무렵 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을 손정도 목사가 친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칭송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2003년10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같이 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한 바도 있다.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친 김형직의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 큰 아들 손월은, 김일성보다 두 살 위였고, 특히 둘째 아들인 손원태는 김일성보다 2살 아래였으나 중학시절엔 친형제처럼 다정하였다.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 유길 학우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공안당국이 그를 체포하여 7달 동안 감옥살이를 시킨 사실과도 연계된다.

 

이때 해석(손정도 목사의 호)은 김일성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어 그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일본군경의 위협이 다가올 것이니 피하라고 권고하여 파신함으로서 재판에 회부되었으면 10년형을 살게 될 것을 면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해석을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김일성의 집권 시인 1991년 5월 초청을 받아 네브라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북조선의 청와대로 불리는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아 여생을 평양에서 보내도록 특혜를 베풀었다.

 

김일성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김일성 사망)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이기도 하였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게, 손정도 목사의 아버지와 큰 아들(원일)은 서울 현충원에 묻혀 있고, 둘째 아들(원태)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이 기막힌 사연의 줄거리가 다큐멘터리로 CBS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CBS TV가 제작한 ‘창사 55주년 특집다큐’ <세 개의 무덤, 역사가 나눈 三父子의 길>이 담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손정도 목사(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역임)와 큰 아들 손원일 제독(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이자 해군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내 '해군의 아버지'로 불림),

 

그리고 둘째 아들 손원태 박사(재미 의사)였었다.  이들 제작진이 주목한 손정도 목사는 상해임시정부의 입법부 역할을 맡았던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1920년대 만주 길림으로 가 독립운동가들의 투쟁활동을 지원하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인 동시에 한인동포들의 삶의 터전이 될 ‘이상촌’ 건설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상촌 건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속에서 보내던 중 병세가 악화돼 60세의 나이에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손정도 목사의 큰 아들인 손원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의 꿈을 다지며 독일 유학길을 떠났다. 훗날 남한의 대한민국의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여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 둘째 아들 손원태는 제4성림중학교에 다닐 때 육문중학교서 공부하던 김성주를 형처럼 따랐고 김성주는 손원태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결국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노년에 돌연 평양의 김 주석 초청을 받아 옛 추억을 되새기며 미국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삶을 마쳤다. 

 

조선의 청와대라 할만컴 초호화판 저택까지 마련하여 손원태 부부의 노후를 편히 보내도록 최선의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나라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하게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생명의 은인’이 된 손정도 목사는 우리에게 남과 북의 분단과 갈등을 풀어가는 '사랑의 치유자'가 될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다.

 

손정도 목사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은 둘로 갈라진 남과 북을 하나로 되게 하는 씨앗이 될 거라는 기대감이다. 

 

이상..    (중) 편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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