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2. 통전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번역:그 땅은 후한때에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
통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동서 6천리(2400 킬로미터)에 달하는 명실상부 대국이었는데 어째서 구당서에서는 3100리라고 줄여쓴 것인가.
이것은 구당서가 실제로 줄어들었거나 구당서가 고의로 줄여 쓴것 둘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구당서의 기록인 3100리가 나름 자세한 면이 있으므로 이를 믿고 통전의 기록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수당 시기에 한때 동서 6천리에 달했다가 어느 순간 3100리로 축소된 때가 있었던 것이다.
사방 6천리로 늘어난 때는 영양태왕 대일 것이며 고수전쟁 이전에 영토를 확장했거나 전쟁(1차 혹은 2차)에서 대승을 거둔 후 기회를 맞이해 사방으로 뻗어나간 것일 테다.
수나라가 1차에서 30만을 갖다죽여서 군사력의 큰 손실이 있었음에도 2차때는 아예 전투병력만 113만 3800, 병참을 맡은 인원은 그 2배인 도합 340만 대군을 휘몰아 쳐들어온 것에서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사활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본인은 그 이유를 2가지로 생각하는데
1. 그릇된 역사인식
양광이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돌궐(튀르크)을 방문하던 때에 황문시랑 배구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의 땅입니다. 주나라 때 기자를 봉했고 한나라에서 삼군을 설치하였으며 진나라때 요동이 되었습니다----'라 하였는데 여기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자신들의 되찾아야 할 고토로 인식하였음이 드러난다.
후일 당나라에서 현장이라는 사신이 와 말하기를 '(연개소문이 신라에 빼앗긴 고토를 되찾기 전까지는 신라 침공을 중지할 수 없다고 하자)그렇게 치면 요동은 모두 우리의 군현이었는데도 우리가 오히려 그것을 따지지 않는데--'운운하였으니 고구려 영토 특히 요동지역(현 난하 혹은 영정하 동부)을 수당 정권에서 그들의 고토로 여겼거나 적어도 이를 대외에 선전 혹은 주장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나중에 이세민은 직접 사서 편찬에 참가해 동이족에 관한 역사를 대폭 왜곡 기술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작업의 목적은 전쟁의 명분을 만들고 전 인민의 적개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수당은 그전의 어느 중원 왕조보다도 치열하고 필사적으로 쳐들어왔고 고구려는 그 여파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대한 고구려가 그랬을 진대 이는 우리가 약소국의 위태로운 상황으로 전락한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교훈이 아닌가?
2. 천하관
이것은 흔히 알려진 전쟁의 원인이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손의 후예라 믿었으며 나중의 외왕내제를 행한 고려와 달리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옳겼다. 수나라로 가는 사신을 막고 조공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과감히 선제공격을 하여 1차 고수전쟁을 유도하였다. 단순히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기반한 국력 뿐만 아니라 음악, 미술, 문학, 역사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큰 진전을 이루었으니 그 자체로 일대 제국이었음은 물론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었으니 튀르크나 티베트와는 궤를 달리한 점이다.
위의 두자리 요인으로써 보면 영양태왕 대에 고구려는 여전히 2번 항목, 즉 천손민족이라는 천하관을 유지하였음은 물론이고 거기에 더해서 동서 6천리라는 기록에 나와 있듯이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이를 현실에 옳겼다. 이에 수나라는 매우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고구려에 비하면 신생국인데다 '중원의 정통'이라 보기 애매한 관롱집단(선비족+한족)이 다스린 정권이었으니 그들이 주장하는 '천자의 나라'라는 정체성과 자긍심에 있어서 고구려는 그 존재 자체가 걸림돌이요 그 행동 하나하나가 위협이었던 것이다.
모처럼 선비족이 중원을 장악하여 천대만대 천자국으로 행세하려던 와중에 고구려가 있어 하늘에 2개의 태양이 있는 셈이니 만약 그런 고구려를 놔두거나 강제로(국력의 차이 혹은 전쟁의 승패로 인해) 인정하게 되면 그 누가 마음으로 복종하고 따랐겠는가? 초창기 시대에 그럴진대 2000년은 커녕 30년은 지속될수 있겠는가?
고로 선비족의 왕조인 수당의 경계심과 침략에 대한 필요성은 기존 중원 왕조인 한나라나 위나라의 그것들과는 궤를 달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구려에 대해 대항할 새로운 방법이 나타났으니 1번 항목, 즉 역사 왜곡을 통해 전쟁 명분을 만들고 최우선적으로 중요하달 수 있는, 인민의 복종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것이었다. 고구려는 더 이상 천자국이 아닌, 식민지로 시작했으면서 국력이 강해지자 본 주인(중원)을 거역하고 활개치는 근본없는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단 인민으로 하여금 천하의 유일한 주인은 아국(수당)이라고 믿게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여러모로 고구려와 수나라는 양립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 와중에 고구려는 수나라를 상대로 도리어 강경책으로 나갔다. 양견이 보낸 국서를 보면 그 상황에 한줄에 들어있는 부분이 있다.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금고시켜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예서 알아낼 것은 1. 말갈을 구축한 것은 곧 말갈을 내속시켰음이고 2. 글안(거란)을 가둔 것은 역시 거란을 복속시켰음이다 3. 내조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은 그 말갈이나 거란 세력이 다시는 수나라와 통하지 못하게 철저히 봉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말갈의 돌지계란 놈과 거란의 출복부란 족속 등이 수나라에 내부하였으니 그들은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반발한 세력이었다. 동으로는 말갈, 서로는 거란을 복속시켰으니 그 주위의 해족, 실위같은 부족들도 지배하거나 적어도 간섭을 행하였을 것이며 거란과 말갈의 통교를 봉쇄하였을진대 백제와 신라 등의 사신들 또한 길이 막히거나 고구려 수군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 콧대높은 양견이 길길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고구려의 영양태왕은 기어코 단기 2931년, 불과 1만 군을 이끌고 수나라를 공격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것이며 이어진 수나라의 반격을 철저히 분쇄하여 30만 침략군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일구어냈으니 영양태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고 그 강해진 국력을 헛되이 하지 않아 만대에 길이 보전될 영광을 이룩한 명군이며 명장이었다.
선제공격은 국력이 충분히 다져졌다고 판단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결단이었으니 고구려는 유사시 수나라에 붙거나 고구려에 칼끝을 겨눌 군소세력들을 미리 제압하여 지역의 패권자로 우뚝 서서 그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양태왕 대에 팽창정책을 밀어붙인 것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예견하고 그 준비작업으로서 한 것이 아닌가? 영양태왕의 결단과 실행력은 참으로 위대했다.
고구려의 이상의 전쟁에 대비한 것이었을 정책은 수나라에는 심대한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상의 그릇된 역사인식과 천하관의 갈등은 이런 현실적 위협과 맞물려 대전쟁을 예고하였다.
여기서 멈추고 통전의 동서 6천리라는 기록을 해석하여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으로도 6천리였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구당서의 기록은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로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의 길이가 나오니 어째서 통전은 동서 길이만 나오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일단 저들 중원측에서 이를 누락시킨 것은 1. 고구려의 면적이 넓다고 인정하기 싫어서이거나 2. 북계의 끝을 알 수가 없어서일 것이니 1번 항목의 경우는 이왕 동서가 6천리라고 거하게 인정을 한 마당에 남북 길이를 굳이 축소시키거나 은폐할 생각이 문득 들었으리라고 상상하긴 어렵다. 그러니 2번 항목, 즉 북계가 어디까지 뻗쳐있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남북 길이는 누락시킨 것일 테다.
그러면 또 2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1. 정말로 넓고 광대해서 알수가 없는 것과 2. 인식은 하고 있지만 인정하기 애매해서인 두 가지이다. 2번 항목을 설명하자면 고구려가 말갈을 복속시켰음은 이미 드러났으며 동시에 그 반발세력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으니 순순히 복종하는 세력과 저항하는 세력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과 갈등을 벌이고 복속시킴과 배반당함을 반복하였으니 중원측에서는 과연 어디까지 잡아야 하냐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고 그냥 고구려 북방을 지역을 영토 갈등 혹은 심지어 내전 상태로 봤을 수도 있다.
허나 그 북방이 이리저리 충돌하면서 시끌벅적했다면 고구려가 1, 2차 전쟁때 전력을 집중해 수나라를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북방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서쪽에도 군을 보내 적과 싸울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걸 인정한다면 도리어 고구려의 군사력이 막강했을이 다시금 입증되는 것이라 전혀 나쁠 것이 없지만 역시 영양태왕이 자신있게 수나라 본토를 친 상황과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과는 별개의 이러한 분쟁상태는 서로 맞지가 않으므로 1. 영토가 넓어서 중원인들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버린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고구려는 동서로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도 길게 뻗친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영토가 어째서 나중에 동서로 3100, 남북으로 2000리에 불과하게 되었는가?
아마도 고구려가 1, 2차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4차례에 달하는 전쟁을 치러 국력의 소모가 극심해져서 지방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복속시킨 민족들이 이탈하였을 것이다. 혹은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고구려 측에서는 자국의 국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인식하였을 것이고 그런 와중에 복속민들의 민심을 살펴 결국 그들을 다시금 전 상태로 복귀시켜서 독립국 행세를 하게 만들고서 다만 적어도 조공관계는 유지하여 명목상의 주종관계는 확실히 하였을 수도 있다. 이 편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 명색이 승전국으로서 대륙을 호령해야 할 고구려가 복속민들이 떨어져 나가게 두었겠는가? 고로 현실적인 국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존심과 현실을 모두 감안해 차선책을 택하였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가 만주대륙 제 민족들(거란 말갈 실위 해족)을 지배하는 상황은 변함이 없지만 이후 중원측에서 정보 수집 등을 통해 상황을 뚜렷이 파악하고 고구려의 본토와 복속 민족들의 영역 혹은 자치구 형식으로 운영되는 지역을 분리시켜 고구려의 본토로 파악되는 지역 만을 일컬어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라 했을거란 추론이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본토에 대한 고의 혹은 실수에 의한 축소가 있었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고로 저것이고구려 본토라는 땅의 최소 면적이라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가정이라면 앞서 통전에서 동서 6천리 운운하다가 남북은 빼먹은 것이 이해가 되는 면이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니 위의 2번 항목의 '인식은 하고 있지만 인정하기 애매'란 부분의 이유가 분쟁이나 갈등으로 인해 복종 관계를 맺은 지역과 아닌 지역이 불명확해서라는 것만 있지만 여기서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바로 고구려 본토와 복속된 민족들의 본래 땅의 경계를 명확히 알 수가 없어서인 것이다.
다만 이것은 무리인 것이, 그렇게 치면 동서 6천리란 기록은 분명 고구려 본토와 피지배 민족의 땅을 다 합친 것인데 그것은 그대로 기술하고 남북은 본토와 피지배 족속의 지역으로 나누기 어려워서 일부러 기술하지 않는 것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고로 남북 길이를 논하지 않은 것은 그 북쪽의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여전히 합리적이다.
아무튼 고구려의 영토는 고수전쟁 이후에 그대로였을 수도 있고 동서 3100리, 남북 2000리로 줄어들었을 수도 있어 정답은 없다.
다만 고구려 영토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을 이후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임금으로 알려진 영류태왕의 굴욕외교와 수세적 자세로부터 상상할 수도 있다. 영류태왕은 당나라를 상대로 1. 봉역도를 바치고 2. 태자 고환권을 유학(사실상 인질)보내고 3. 경관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다. 고수전쟁때 활약한 영웅이 어째서 이렇게 나약해진 것인가?
또한 동시에 천리장성을 급히 쌓는데 고수전쟁 때도 필요 없었던 천리장성이 어째서 갑자기 필요하게 된 것인가?
예서 고구려의 복속민족들이 이탈, 배반하여 서쪽으로는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동과 북으로는 유사시 황실이 피난갈 수 있는 지대가 좁아진 것이 아닌가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천리장성이라는 서부의 방파제가 필요하게 된 것이고 고구려 황실이 위태로운 평양성(혹은 남평양)에 그대로 머물다가 잡힌 것이 아닌가? 참고로 동쪽으로 피난처가 사라졌다는 것은 유사시 황실이 그들이 복속시킨 말갈의 땅으로 갈 수 없게 됐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렴 지배를 하고는 있어도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된 종족이 아닌데 그들의 땅으로 위험한 행군을 할수 있겠는가? 동쪽의 고구려 본토가 본래 그리 넓지 않아서 그리로 피난을 갈려면 반드시 그 경계 너머의 종족(말갈)이 복속되어서 위협적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없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중에 고당전쟁때 말갈 기병 3천명이 사로잡혀 생매장이라는 비참하고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나중에 걸사비우가 우리의 동지로서 활약한 것 등에서 보듯 말갈은 분명 우리의 형제였다. 다만 같은 형제끼리도 싸우고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수 있으니 일부 완고한 세력들이 있어 그들을 복속시키지 못했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태껏 운운했던 말갈이란 대상, 즉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할 수 있는 이종족으로서의 말갈은 우리에 협력했던 한가족같은 그 말갈(내말갈)이 아니라 나중의 흑수말갈 등에 해당할 외말갈이었다.
아무튼 이 동쪽으로의 피난이란 주제는 너무나 지엽적이고 불필요한 것이라 더 이상 논급할 필요가 없다.
영류태왕에 대해서도 여러 이견이 있는 마당에 그를 어느 한 성향(현실주의자)으로 고정시키고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것은 어찌보면 모험이다.
본인이 이 글을 쓴 목적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연히 본 당대의 고구려 영토관련 기록을 기반으로 지도를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보여 당시의 생생한 활사진과 웅지와 기상을 느껴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허나 지도만 만들어 놓으면 그 의미가 반감된다 생각하여 부가적으로 설명을 붙였다. 그러다 글을 쓰면서 떠올리게 된 목적이 있었으니 고구려 영토에 대한 상반된 기록들을 나름 근가히 해석하고 그것을 가지고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본인은 이 글이 정답만을 담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 글이 해석과 탐구를 하는 모습을 보이고 방식을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이 글을 3시간동안 썼는데도 활시위를 떠나 어느새 잠이 든 화살이 된듯한 느낌이고 어스름한 저녁에 천막을 나와 한참을 말달리다 불안해 뒤를 돌아본 초원의 기사의 기분이 이랬을듯 싶다. 그럴진대 아까 감방친구 박사님이 예전에 쓴 거란어 관련 글에서 5시간 동안이나 글을 썼다고 하셨으니 그분은 남다른 시간여행을 하고있는 셈이다. 아무튼 이런 사고와 탐구를 할 교양을 쌓게 해준 박사님을 존경하며 감사드린다.
-끝-
암튼 제발 이 빌어먹을 게시판에서 글을 쓸때 자동 저장되는 기능이 있었으면 바랄게 없겠다. 글쓰기를 누르니까 글을 쓸 권한이 없다며 그전 글쓰는 화면으로 돌아가는데 글은 온데간데 없으니. 도대체 외국 반응 보면서 유치하게 웃어대는 것 하며 사이트 글쓰기가 불편한 것 하며 어째 시대에 뒤쳐지지 않은 것 하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