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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5-24 23:24
[한국사]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가 661년부터 헷갈린다는 분에게..
 글쓴이 : 고구려거련
조회 : 1,640  

기존 사학설

고구려는 장수왕부터 수도를 서북한 평양(현 북한 평양) 안학궁으로 천도하였고

평원왕 때 비로소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에 장안성(현 북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새로운 수도 요양설1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 수도를 요양으로 천도하여 평양성으로 불렀는데

평원왕 때 대동강과 보통강 사이에 장안성(현 북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새로운 수도 요양설2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 수도를 요양으로 천도하여 멸망할 때까지 요양을 수도로 삼았다.


새로운 수도 요양설3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 수도를 요양으로 천도하였다가

후기 보장왕 때 661년부터 수도를 서북한 평양(현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감방님의 의견은 661년부터 고구려 수도가 요양과 평양으로 헷갈리신다는 건데

당 태종 때까지 기사를 보면
여러 자료를 비교분석하여 맞춰보면
적어도 당 태종 때까지는 고구려 평양이
본계와 요양 사이라 추정이 가능한데

당 고종 때부터 고구려 멸망할 때까지를 보면
특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라본기, 열전, 지리지 일부 기사 등을 보면
영락 없이 현 서북한 평양으로 보인다


평양은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고

현 서북한 평양지역은 궁계시절 후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고려 왕건 때 개발하여

현 서북한 평양의 유적 태반이 이 시기에 조성된 고려 유적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시는데


고구려 수도가 장수왕이 현 서북한 평양으로 천도한 게 아닌가요?

아니면 광개토대왕, 장수왕 시절에 요양으로 천도했다가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으나(평원왕일 때 확률이 높은 것 같은데..)

어느 시기에 현 서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건데


제 의견은 위에 기존 사학설과 요양설1과 요양설2 셋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661년부터 서북한 평양이라면 글쎄요..


그리고 생각해보세요

고구려 수도가 요양이면 수나라, 당나라가 굳이 수군까지 동원했을까요?

물론 첫번째로 수군이 요하로 들어가 육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과


두번째로 수군이 압록강 유역에 상륙해 요서에서 요동으로 들어오는 육군과 합동 포위 공격했을 것 같구요.


아니면 고구려 수도가 서북한 평양(장안성)이면 수나라, 당나라가 수군을 동원한 목적이 맞을 것 같은데

수군이 먼저 상륙해있다가 육군과 합동 포위 공격하면 맞을 것 같기도 함..


저도 헷갈리네요

고구려 수도가 요양인가 평양인가

만일 비교분석하여 당 태종 때도 수도가 현 서북한 평양이라면 수군과 합동 공격할 목적이 맞을 것 같지 않나요?


여기 고구려 수도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감방님이나 고구려 연구하시는 분이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고구려 수도 평양은 북한땅에 없었다”  출처: 이정훈 기자 / 신동아 요약

 

거란 역사서 ‘요사(遼史)’ 의 놀라운 증언 


우리 교과서는 장수왕 이후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을 수도로 삼았다고 밝혔으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에는 광개토태왕 이후 패망할 때까지 요양을 평양으로 부르며 수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고대에는 지금의 요서를 요동으로 불렀으니 고구려 영토는 요하를 건너 서쪽까지 미쳤다. 


‘요사(遼史)’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복기대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遼史’와 ‘금사金史’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遼史’ ‘금사金史’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요遼는 고려와 3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요사遼史’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東京道)’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遼史’ 지리지 동경도(東京道)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단군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遼史’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遼河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遼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遼河의 ‘요(遼)’는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遼河’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遼河’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遼河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城)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隨)와 당(唐)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遼河’ 지리지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遼河’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遼河’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혈전’ 
 
고구려를 굴복시킨 전연은 고국원왕이 살아 있던 370년 새로 일어난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고국원왕은 원수를 갚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로 진나라를 부추겨 전연을 공격해 무너지게 했다. 전연을 무너뜨린 진나라는 진시황의 진나라 등과 다르다. 사가들은 이 진을 다른 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前秦)’으로 적고 있다.
 

전연前燕이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기 전, 모용황의 동생 모용수가 전진에 투항해, 부견의 부하가 됐다. 전연前燕이 무너진 이듬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국원왕은 평양(평양 동황성인 듯)까지 쳐들어온 백제군과 싸우다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371년). 기사회생을 위해 애쓰던 풍운아 고국원왕은 그렇게 스러졌다.
 
이로써 백제는 무너진 전연前燕을 대신해 고구려의 새로운 원수가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등극하면서 국력을 회복했다. 그러던 382년 전진前秦이 동진(東晉)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그러자 전진前秦에서 부견의 부하로 있던 모용수가 독립해 384년 다시 연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이를 ‘후연(後燕)’으로 부른다.


후연後燕이 출범한 해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이 죽고 동생인 고국양왕이 등극했다. 이듬해(385년) 1월 고국양왕은 후연後燕을 공격해 승리했다. 그해 11월에는 후연이 반격해 승리했다. ‘고연전’이 재개된 것이다. 391년 고국양왕이 죽자 그의 아들 광개토태왕(391~412)이 등극했다. 396년 후연에서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황제가 됐다.
 
광개토태왕은 400, 402, 404, 407년 연거푸 공격해 후연後燕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광개토태왕 군은 지금의 내몽골과 하북성 지역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광개토태왕비는 선비족을 ‘비려(碑麗)’로 표현하면서 광대토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고 적어놓았다. 지리지는 모용보가 이끄는 후연이 광개토태왕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게 된 것을, ‘모용보가 고구려왕 고안(高安·광개토태왕의 이름)을 그곳(요양)에 살게 했다’고 적어놓았다.



후연後燕은 광개토태왕 군과 함께 탁발 씨가 세운 또 다른 선비족의 나라 위(魏·북위)의 공격을 받아 그로기 상태가 됐다. 탁발 선비는 위나라를 세운 뒤 성을 원(元)씨로 바꿨다. 이 위나라를 조조가 세운 위魏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북위’ 또는 ‘원위’로 표기한다.

‘요사’ 지리지는 ‘원위의 태무제가 그(광개토태왕)가 살고 있는 평양성으로 사신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것도 광개토태왕 때 고구려가 요양으로 재천도 했음을 보여준다.

 
407년 ‘고연전’이 끝나자 후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고구려 출신인 고연이 새 왕조를 열었다. 고연은 연을 그대로 국호로 삼았는데, 사가들은 이를 ‘북연(北燕)’으로 명명했다. 광개토태왕의 복수심은 대단했다. 그는 할아버지(고국원왕)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를 공략해 아신왕을 생포해 항복을 받았다. 백제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광개토태왕비는 백제를 ‘백잔(百殘)’이라 새겨놓았다.
 

고구려와 합세해 후연을 무너지게 한 북위는 5호16국 시절 선비족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했다. 이러한 북위는 고구려와 싸우지 않고 외교 관계로 경쟁했다. 고구려와 북위가 양대 효웅이던 시절 또 다른 선비족인 거란이 등장했다. 광개토태왕은 이들을 공격해 굴복시켰다. 그 후 거란은 고구려가 약화될 때만 반기를 드는 고구려의 반(半)복속 종족이 됐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장수태왕 때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기록했다. 시차는 있지만 평양 동황성에 있던 고구려가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지리지에서, 장수태왕 때 옮긴 평양은 서경이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고려 때 서경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 국사학계는 장수태왕 때 고구려가 북한 평양으로 천도했다고 보게 됐다. 북한 역사학계는 평양이 고향인 김일성 가계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사遼史’ 지리지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때 평양으로 불렀던 원래 수도 요양으로 재천도했다고 밝혀놓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큰 혼란이다. 고구려와 싸운 거란이 요양을 고구려의 수도라고 해놓았는데, 우리 역사학계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북한의 평양인가, 중국의 요양인가.
 


고구려 말기인 영양왕 때 수나라가 대군을 보내 공격했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 군에게 대패했다. 내호아가 이끈 수나라 수군은 패수(浿水)를 따라 들어가 평양을 공격하려다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에게 일격을 당했다. 우리는 고구려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기에 패수를 대동강으로, 살수는 청천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중국 사서들의 기록은 다르다. 살수에 대해 거론한 중국 사서는 거의 없지만, 패수를 거론한 사서는 많다. 중국 사서들은 패수가 요령성에 있었던 것으로 서술해놓았다. ‘요사遼史’ 지리지가 요양 인근의 강 이름을 거론하는 중에 패수가 있다. 패수가 요양 인근에 있다면 수나라와 싸울 때의 고구려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수도인 요양이라는 얘기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들은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가 고구려 수도인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뒀다고 했다. ‘요사遼史’ 지리지도 마찬가지인데 안동도호부는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았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을 수도인 평양으로 삼고 있을 때 당나라에 패망했다고 밝힌 것이다.
 
요양이 광개토태왕 이후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고구려의 서쪽 경계선은 지금 요하를 건너 훨씬 서쪽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곳을 요동으로 불렀으니 전방 성들은 그곳에 있고, 고구려는 지금 요하 혼하 태자하 등을 해자(垓字)로 삼아 수도인 요양을 보호했을 것이다.


발해 중경 현덕부 위치가 다르다. 
 

‘요사遼史’대로라면 발해의 중경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1000여 km 떨어진 요양에 있어야 한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요하를 건너 당(중국) 쪽으로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고구려에 복속한 종족 중 가장 충성한 것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구려가 수, 당과 전쟁할 때 적극 참전했다. 대(大)씨 성을 쓰는 말갈족이 고구려의 귀족이 됐다. 이 때문에 고구려가 무너지자 대씨 집안의 대조영이 일어나 ‘대진국(大震國)’을 세웠다. 중국 사서들은 대진국을 ‘발해’로 표기했다.
 
대진국은 과거보다 세력을 키운 거란을 지배했다. 대진국은 당나라와 통일신라가 스러질 무렵 위기에 처하는데, 그때 야율(耶律)씨가 이끄는 거란족이 일어나 대진국을 무너뜨렸다. 그 후 요나라를 세우고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국이 됐다. 요나라와 남중국의 송나라, 그리고 고려는 위-촉-오가 다툰 중국의 삼국시대처럼 삼각체제를 형성하며 부딪쳤다.
 
황제를 자칭한 나라들은 3경이나 5경 제도를 택했다. 발해는 대이진(大彛震)이 이끌 때 5경 제도를 택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조선 실학자들의 추정을 근거로 중경 현덕부가 중국 길림성 서고성자(西古城子)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발해를 무너뜨린 거란은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겼다.
 
요사 지리지는 ‘당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요양)을 홀한주로 바꾸게 했다.…대이진 때 옛 평양인 홀한주를 중경 현덕부로 불렀다’고 적었다. 요양이 발해의 중경이라면 우리는 중경 현덕부를 서쪽으로 1000여 km 옮긴 새로운 발해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 중경이 요양에 있었다면 서경은 중경 서쪽에 있을 테니, 발해의 서쪽 국경선은 지금의 요하 건너 훨씬 서쪽에 그어져야 한다.
 


우리 역사학계는 우리와 다툰 인접 국가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작은 영토선을 그려놓았다. 이는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가깝다. 이렇게 하니 중국은 “얼씨구나” 하며 동북공정을 밀고 들어온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수도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었다고 고집하는 것은 한민족이 한반도에서만 살았다는 전형적인 반도사관이다. 반도사관은 소중화를 자처한 조선 때 생겼다. 우리가 정사(正史)로 인정하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 중종 때 인쇄된 것이 전해진다. 중종 이전 ‘삼국사기’는 여러 번 개수(改修)됐으니 여기에도 소중화 사관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고구려와 발해사를 또 축소했다. 조선을 지배하게 된 일제는 이를 적극 전파해 식민사관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그것에 짓눌려 대륙사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산해관에서 끝나는 만리장성을 동쪽으로, 동쪽으로 자꾸 확장하고 있는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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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키가이 20-05-25 12:40
   
고구려 평양은 여러 곳에 존재 했다는 학설이 거의 확실하다고 몇십년전 읽은 기억이;;;

마치 서울=수도 인거처럼 평양=도성 같은 뜻 같은 고구려의 수도
구름위하늘 20-05-25 16:24
   
수군 문제는 다르게 볼 방법이 있습니다.
고대 수군은 자체 공격의 목적보다는 수송이나 병참의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거기에 전략적 목표가 있기 때문에 수군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병참 지원을 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수군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로를 보면 모두 해안/수로에 근접하는 경로 입니다.
신서로77 20-05-25 16:26
   
그런거죠...우리 어릴적만해도 수도를 서울로 쓰는 경우가 허다했죠...영국의 서울은 런던,중국의 서울은 북경..
감방친구 20-05-27 06:37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려면 근거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 근거는 교차근거가 있어야 성립합니다

빨리 어떻게든 이렇다 저렇다 누군가 설명해 달라 하시는 것이면
그거는 참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고구려거련 20-05-27 06:43
   
위에 근거로는 거란 역사서 요사의 놀라운 증언부터 되지 않을까요?

흠.. 설명이 아니더라도 님 생각이 어떠신지 요약해서 답글해주시면 되는데..
굳이 생각이 필요없으면 답글 안 해주셔도 되요..
패닉호랭이 20-05-27 21:38
   
고구려 평양 위치는 인하대에서 졸라게 팠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투브에 강연도 있어서 좋더군요.
고구려의 평양이 여러군데로 천도되어 이동했다는것에 동의합니다.
영종햇살 20-05-29 16:12
   
통전 通典-총 200권. 당의 두우(杜佑 : 735~812)가 편찬했다.
일찍이 당의 유질이 〈정전 政典〉을 펴냈는데, 두우는 이 책이 완비되지 못했다고 여기고
경사서를 널리 수집하여 착수한 지 35년 만인 801년(정원 17)에 〈통전〉을 펴냈다.

통전 주군전에

儀州今理遼山縣 春秋時屬晉 戰國初屬韓 後屬趙
秦爲上黨郡 二漢因之
晉爲樂平郡 後魏爲遼陽郡 隋屬太原郡
大唐武德三年(620년) 分幷州之地置遼州 八年 改爲箕州
先天元年 改爲儀州 或爲樂平郡 領縣四.
     
영종햇살 20-05-29 16:14
   
의주는 지금  치소가 요산현인데 춘추시에는 진(晋)에 속했고,
전국 초에는 한(韓)에 속하다가,  후에 조(趙)에 속했는데,
진(秦)은 상당군으로 했다. 전․후한은 이를 이어받았고,
진은 낙평군으로 했다. 위는 요양군으로 삼았고, 수는 태원군에 속했다.
당 무덕3년(620년) 병주땅을 나누어 요주를 두었다. (무덕)8년에 기주(箕州)로 바꾸었다.
선천원년(712년) 의주로 바꾸었는데 혹 낙평군이라고도 한다. 현은 4개다.
          
영종햇살 20-05-29 16:16
   
遼山漢垣縣地 晉爲遼陽縣 隋置今縣 北有鬼谷
요산현은 한의 원현땅인데 진은 요양현으로 했고, 수는 금현을 두었는데 북으로 괴곡이 있다.
영종햇살 20-05-29 16:17
   
1.통전 주군전에
"의주의 치소가 지금 (801년,통전이 완성된 해) 요산현인데
진은 낙평군으로 했다. 위는 요양군으로 삼았고, 수는 태원군에 속했다."
즉 요양은 중국 산서성에 속했다.
"당 무덕3년(620년) 병주땅을 나누어 요주를 두었다. 무덕8년(625년)에 기주(箕州)로 바꾸었다.
선천원년(712년) 의주로 바꾸었는데 혹 낙평군이라고도 한다. 현은 4개다.
大唐武德三年(620년) 分幷州之地置遼州 八年 改爲箕州
先天元年 改爲儀州 或爲樂平郡 領縣四 "
즉 병주, 요주, 기주 모두 산서성에 있는 지역이다.
     
영종햇살 20-05-29 16:18
   
2.위서 지형지2상 제5(魏書 地形志二上第五 )에
"평주 요서군 비여현에  고죽산사와 갈석, 무왕사,영지성,황산, 유하가 있고
  평주 요서군 해양현에는 횡산, 신부산 청수가 있다.
肥如〈二漢、晉屬。有孤竹山祠、碣石、武王祠、令支城、黃山、濡河。〉
海陽〈二漢、晉屬。有橫山、新婦山、清水"
그런데 여기서 청수라는 강은 수경주9권에 기록된 강이름으로
淸水 出河內脩武縣之北黑山 청수는 하내군 수무현 북쪽 흑산에서 나온다.
하내군은 지금 하남성 황하 북부 지역이다.

수경주권14에서 "고하와 습여수가 합해서 로하가되고, 청하와 합해지고
동으로 흘러서 바다(황하)로 들어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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