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2-02-22 06:45
[기타] 조선의 약한 군사력이 폭로된 사건..임진왜란
 글쓴이 : 세라푸
조회 : 4,920  

임진왜란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동아시아의 나름 강국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중국의 경우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고구려 전쟁과 송나라와는 달리 몽골과의 전쟁에서
몽골에 병탄되지 않고, 부마국 형식으로 나마 스스로 강화를 요청해 어쩌튼 왕실을 유지한
고려의 전례, 명나라 초기에 요동을 공격하려했던를 전례등을 보아 조선을 상당한 군사력을
가진 동북아의 강국으로 인식을 해왔습니다.
임진왜란 전까지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 유교적 질서의 우위(형대접)만 챙겨주면 감지덕지하는
상황이였습니다. 물론 중화주의가 강한 명나라는 오만하게 국서를 보내고 사신을 보내왔지만..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이 순식간에 한양을 점령해서 조선이 명에 파병을 요청했을때도 주변국은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진족(후금)을 통일해가던 누르하치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붙으려고 했었구요..조선의 파병요청에도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일본에 격파당한게
아니라 일본과 손잡고 요동을 공략하려고 길을 열어준 거라는 오해의 주장이 주류였습니다..
근거는 당태종도 점령못하고 수나라가 100만이 넘는 대군으로 쳐들어 갔어도 점령 못한 고려를 
일본따위가 그렇게 순식간에 점령할리가 없다는 것이였죠.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파병왔을때부터 조선은 무시를 당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무시당하다가.. 청나라에게는 속국으로 전락하죠..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찰나무량 12-02-22 11:41
   
고려는
호족들의 사병보유등
호족연합으로 시작한
일본과 같은 무사시대이고
고려시대는 병농일치
조선은 초기까지만 고려시대에 군사력이 유지되었고
시대 자체가
문치주의의 다른 시대이니
무보다 문을 숭상
군사력이 딸린게 당연하죠
조선시대는 군역과 방군수포로 형식화 되어 같으니~!!
     
고전프라 12-02-22 12:01
   
호족의 사병들이 있는게 사실이지만,
특히 고려 후기로 갈수록 중앙군 체제가 와해되지만,
나라가 정상적이었던 고려 전기만 해도,
고려군사력은 호족연합이 아니라, 수도에 2군6위라는 4만5천의 직업군인을 뒀고, 북계에도 정예군이 버티는, 전형적인 왕의 명령에 통제를 받는 군사국가였음.
무인시대 용호군 응양군 하는게 왕의 명령을 듣는 직업군인임.
왕이 자주 바껴서 탈이지만..
고려 후기를 보더라도, 왕의 서찰을 조작해서, 고위급 장군들 목이 툭툭 떨어져 나감.
          
마음없는꽃 12-02-22 17:43
   
2군 6위가 들어선건 현종때이고 그전에는 광군을 어떻게 동원하느냐가 관건이었는데
이 광군이 호족연합세력이었습니다. 마치 고려가 중앙군의 편제로 이뤄졌다고 보는건 오해가 많을거 같네요. 이 광군동원이 얼마나 잘 이뤄지느냐가 관건이었는데 거란이나 여진을 물리친건
호족세력을 잘 규합했기 때문이고 무신집권기에는 이러한 세력의 협조가 없어서
몽골에게 쉽사리 무너진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입니다.
특히 현종같은 경우는 왕권강화와 더불어 이러한 광군의 동원을 동시에 이룩해서
수도에 성을 쌓으면서도 거란군을 효율적으로 대비했던걸로 유명하죠.
뭔가 오해가 있으신듯

그리고 임란때의 명증원군의 역할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명증원군이 왔을때에는 오히려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때이고
동원병력이 10여만명이었던 조선군의 군세가 명군을 보급하느라 1만여명급으로 떨어졌다고 하죠
더불어 명군의 역할도 척계광이 키운 월병의 경우 왜군에게 특화된 부대라
공훈을 많이 세웠지만 이여송 휘하의 부대는 대부분 북방 기마민족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왜군을 상대로 제대로 전공을 세우지 못해서 공훈을 나누려다가 오히려
왜군에게 도륙당해 전세를 악화시킨걸로 유명합니다.
명군의 역할을 너무 과대평가해도 곤란하죠
          
고전프라 12-02-22 18:10
   
거란 침입이 고려건국 80년 뒤 시점이라, 480여년 고려역사를 볼 때 고려 전기임.

고려의 군사제는 호족연합이 아니라,
사병을 거느린 지방의 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명에 의해 움직이는
중앙군대가 핵심이 됨.
개경수비에 4만5천 직업군인이 필요성 또한, 호족 사병들때문이었음.
조선시대에도 이괄이니 임경업이니 신립이니 주력 군대는 북방에 있었고,
고려시대 때 북쪽 변방 지키는 군대까지 합치면, 10만 가까운 군대가 왕명에 의해 움직이는
고려전기 상비군이었음.

오히려 고려전기를 거쳐 중기로 가면서, 호족세력이 커지고, 양민이 호족의 노비가 되어,
호족의 사병이 됨으로써,
몽고의 침입때, 거란전쟁때처럼 광군이 제 역할을 못함.
그 시절에도 노비는 군역이 면제되는지라, 전쟁시에 광군으로 편입이 안됨.

광군을 비롯해 고려의 전시동원체제가 무너진 이유가, 호족의 세력이 커져서,
양민의 수가 줄었기 때문임.
고전프라 12-02-22 11:57
   
적이 쳐들어오는 데 무가 어딨고 문이 어딨음?

임란은 이미 2년전에 일본에 사람을 보내서, 전쟁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각지에서 성도 정비하고 했었는데..
기습이 아니라 이미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전쟁임.

전쟁전에도 전쟁중에도 중앙에서 제대로 싸워보려는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음.

신라를 빼고, 우리나라 어떤 왕조가 적이 쳐들어왔다고 중국에다 파병해달라는 짓꺼리를 했음?
나중에 민비가 시아버지 쫓아내려고, 오로지 그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 불러서, 원세개가 반 왕노릇 하게
만드는데..
이여자는 반란군 동학군 잡는다고 일본군도 불러와서, 관군하고 협동으로 백성들 잡는데,
외국군대 불러오는거 즐기다, 외국군대에 디진 꼴이 됐음..

이런 전통은 고려에 없었음.
거란 성종이 당대 세계최강인 요나라 40만 몰고 와도, 송나라한테 원병 청하고 이런거 없었음.
여러번 실패한 요나라가 황실군 10만 정도로 급조해 전방의 성 공략안하고 들어오는 속도전,
마치 병자호란과 비슷한 규모, 비슷한 방식으로 쳐들어온 요 10만은 고려군이 다 골로 보냈음.(귀주대첩)

고려와 조선의 차이는,
내 나라 내 힘으로 지키겠다,
평상시 중앙에 군대를 많이 두지 않고, 지방에 지휘권도 주지 않고, 오로지 국내 반란무마용으로 군사를 유지하다,
중국을 상국으로 섬기다, 먼일 터지면 중국군대 불러오겠다, 그 생각의 차이임..

거란이 30-40만으로 쳐들어오면, 고려도 비슷한 수로 맞서고, 광군 20만을 북계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음..
윤관은 실제로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여진정벌에 동원함..

임란을 보면 전쟁중에도 병력이 없음.
바닷가에 있는 1만씩 따닥따닥 몰려있는 애들 밀어버림 될걸,
순천왜성에 4500, 울산성에 9000..
이게 조선육군이랍시고 보낸 병력임.
명군이 훨씬 더 많음.
내 나라땅에 전쟁인데..
왕 옆에서 입으로 떠드는 애들만 많지, 7년을 전쟁을 해도, 3만 단위로 움직이는 중앙병력이 없음.
농민들 몇만 모았다 와키자카 2천에 깨지는걸 봐도..
중앙의 왕 명령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병력이 없음.
7년이 아니라, 100년을 전쟁을 해도, 저런 왕과 신하의 정신상태로는, 저렇게 밖에 안됨.
mymiky 12-02-22 11:59
   
임진왜란 초반에 조선이 확 밀리긴해도 전개과정을 보면 초기엔 조선이 밀리다가 후반엔 일본군이 밀림
함경도에선 털려나오고ㅡ원래 조선기병과 유력군대들은 남부가 아니라 여진족과 푸닥거리 한다고 전통적으로 북쪽지방에
있었죠 전국시대 내내 전쟁하던 일본군과 달리 조선군대는 여진족들과 푸닥거리 외엔 실전경험 200년동안 전무했단 것도
감안해야겠죠 조선이 군대보단 문을 숭상한 이상 공격력보단 최소한의 방어구사가 원래 목표였고 뭐 크게 어딜 지배하겠다던가
정벌하겠다고 군대 늘리는 정복왕조도 아니였구요
하지만 명의 무시라;; 사실 그후엔 명도 조선 비웃고 있을 처지였던가요!? 제 코가 석자였던거 같은데;;
명청이 조선을 무시해서 사르후며 나진에 원병을 요청한다!?는건 앞뒤가 안맞는 소리인듯 ㅋㅋ
     
고전프라 12-02-22 12:15
   
보병 위주의 군대가 수백킬로 보급로를 유지하기는, 당시에 소달구지 끌던 운송수단으로는 힘든 일임..
부산서 서울로 달구지에 쌀 실어보내면, 수송병력이 달구지 쌀 다 먹어치울 판이라..

우리나라 쳐들어온 국가들 죄다 기병위주라 먼거리를 띤 것이고..
먼거리 띤 것 같아도, 심양에서 압록강까지가 6백킬로라..
거란이나 청이나 그 정도 선에서 내려온거라,
보병으로 부산서 평안도, 함경도까지 전선을 올리는 것은 무덤파는 짓임.
보병의 한계임.
풍신수길이 병력 부족하다고 한탄할 수밖에 없음.
일본처럼 보병군대로는 30만이 일시에 와도 보급로 유지하면서 조선하고 여진하고 붙다가는 만주도 벗어나기 힘듬..

평양성을 떨군 것은 대포를 앞세운 명나라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평양도 보급이 시원치 않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함경도는 보급이 어려웠을 것임.
정유재란때 파죽지세로 천안 직산까지 올라가다가, 다시 되돌아온 것도 명육군과
이순신 활약 때문임.
비록 명랑해전으로 일본군에 충격을 주긴 햇지만, 5-8만 수준의 명육군이 버티질 않음, 한양은 또 뺏겼을 것임.

이순신과 의병이 맹활약한거, 거기다 명육군이 대규모 상시 대치함으로써,
첫해 빼고는 해안가에 죽치고 있었던 것인데..
지나라 땅에서 명육군이 5-8만을 보태줘도, 그걸 못 몰아내는게 문제라는 것임.

4500 보내고, 9000 보내는데, 이게 나라인가?
문이면, 지나라 국민 5백만중에 백만정도 피해를 봤다는데,
고작 저걸 병력이라고 공성에 들어가나?

조선 국력으로 어떻게 10만 양병을 하냐?
전쟁때는 남자라면 다 나가 싸워야지..
안나가 싸우면, 안 죽나?

문을 숭상하면, 적이 칼로 내리쳐도 목 내밀고만 있을건가?
문 숭상하는 머저리같은 송도 100만 병력 이럼.
문이라고 해서 병력 없이 놀자 아님.
어떤 나라가 병력 없이 놀자 그러면, 국방을 다른 나라에 의탁하는거임.

7년을 전쟁하고도 가장 하이라이트에 4500, 9000이 뭐임?
울산성 같으면 명나라는 4-5만 내는데, 우리는 1만도 안되고..
이게 우리나라땅에 우리나라 전쟁임?
챙피한줄 알아야지.
조선인구 아무리 적게 잡아도 전쟁전에 4백만은 되는데.
그중 절반인 200만이 남자고, 그 절반만 잡아도, 백만 장정이 있는데.
다 어디가고, 2-3만도 안보임.
유성룡 시무차자를 보면, 1593년..
상비군 8천이라고 함..

신라도 막판에는 5만을 동원해서 총력전을 펼치는데..
그보다 인구나 땅이 3배는 되는, 조선이 지 나라 땅 들어와 죽 치는 애들에
저런 병력 내미는거는 나라 방어를 중국에 맡기는 정신상태라 저런 거임.
지 나라 땅 뺏기고도, 그렇게 조급하지 않고, 남 나라 전쟁하듯 여유가 있음.
왕 어디 튈 궁리나 하고, 다 뺏겨도 자기 혼자는 살겠다 그거라, 총력전이 아님.

중국 불러오는데는 선수고, 왕은 중국으로 튄다고 하고, 그러다 명황제한테, 니나라 버리고
어디로 가냐고 꾸중이나 듣고..
적이 쳐들어왔는데, 망명부터 생각하니, 먼 생각으로 전쟁을 쳐 했겠음.
존심은 쎄가지고, 이순신 말 안듣다고 죽일라 그러고. 원균이가 못 싸워서 살았지, 잘 싸웠음 죽었지..

같은 땅떵이 같은 쪽수로도, 당대 세계최강인 요나라 40만을 맞아 싸우는 고려하고,
3만 동원도 벅찬 조선하고. 챙피한건 챙피하다고 합시다.

고려가 무의 나라?
군인들이 휘어잡는 나라였음, 무신 난은 왜 일어남?
무신 머같이 취급하다 들고 일어난건대, 무의 나라???
고려 군사력이 가장 강했던 고려 전기는 문신위주로 국정을 보던 시절임.
조선하고 다른건 무와 문이 아니라, 지 나라를 누가 지키냐는 생각의 차이임.
개국때부터 큰 나라 섬기겠다고 다짐하는 정신으로,
지 나라가 지가 지킬 생각하겠음?

오히려 무신 난이 있고 나서, 무신들이 휘어잡고 나서부터 고려 군사력은 약해짐.
최씨일가가 선배들 전철 안 밟는다고, 쿠테타를 걱정해서, 정예 군사력을 줄이고,
최고 군사전력을 자기 집 지키는 가병으로만 끄집어 왔기에..
몽고와 전쟁에서 거란과 싸울 때처럼 제대로 싸우지를 못함.

무신이 대접을 못 받고, 문관이 휘어잡는 고려 전기가 가장 군사력이 강했음.
강감찬, 윤관 전부 문신임.
찰나무량 12-02-22 14:43
   
/ 고전프라

강감찬, 윤관이 전부 문신인것은 맞지만 군사체제 자체와 운영규모 및 동원능력이 확실히

임란당시와 다른것은 확실한데

문무가 어딧냐는 식으로 말하는것은 아니지~!!!

1592년 임란의 10만 양병설과

947년의 광군사의 30만의 군사동원능력에서 보듯이

확연히 차이가나는데 문무의 차이가 어딧냐니? ㅋㅋㅋ

광군사 30만은 호족들의 사병들을 순식간에 모으니 금방 30만이 되었는데

조선은 무엇이 있었을까?? 단지 군역 군역도 포를 대신 내면 하지 않게되고

결국 그냥 형식화대고 군인자체가 중앙군을뺀 나머지는 거의 없게되고 동원능력도

시망이 된게 그렇게 된것이지

태혜정광 경성목 현덕정문 순선헌 명신희강고원 렬선숙혜 목정공 우창공

2군6위의 중앙군은 고려 현종때 아닌가??

나는 분명히 호족들의 사병중심의 무사체계로부터 시작되었다는것을 이야기 하고있엇는데

사실그리고 중요한것은

조선시대 주력인 이괄의 기마병의 중앙군이 일본군의 조총에 힘을 못쓰고 주력이 궤멸당한대에서

승패가 갈렸다고 보는데~!!

화약무기의 등장이 기존의 싸움방식을 바꾼것도 이유이지

그렇지만 중요한것은 문치로 인해 대립제 방군수포로

병역이 형식화되고

병력동원능력이 안되니깐

무너진게 맞지!!!

송나라가 확연한 문치가 맞는데 송나때 성리학을 도입한 조선이 문치가 아닌가??

그리고 송나라가 문치주의라서 군대가 약했다는것도 보편적 주장아닌가??

근본이 다르면 확연히 차이가 있지

일본은 영주중심 무사중심의 국가였고 당시에
 
우리나라는 중앙집권을 수립한 이후

통치체계로 송나라때의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아서

확실히 차이가 있는데 없다고 부정하는 당신을 보면

어이가 없구만..

문무라는게 군사력 시스템의 차이를 예로 들고 있는데

확실한 시스템의 차이인데 문무가 어딧냐니???
     
고전프라 12-02-22 18:18
   
그대로 옮긴다.

조선시대 주력인 이괄의 기마병의 중앙군이 일본군의 조총에 힘을 못쓰고 주력이 궤멸당한대에서 승패가 갈렸다고 보는데~!!

-->이거 먼 소리냐???
    인조반정시 핵심역할을 하고도, 권력다툼에서 희생양이 되어 중앙에서 조사하러 나와,
    아들이 조사받으러 끌려갈 상황에, 북방 지키는 휘하 병력으로 반란일으켜,
    인조가 한양 버리고 톡튀게 만들었던 그 이괄이 얘기냐?
    그 이괄이가 임란때 기병 몰고 일본군 조총하고 왜 싸워??

    정신줄 놓고 사냐?
    써질러 논거 보면 지적할게 참 많다만, 견적이 안나와서 키보드 뚜드리는 것도 아깝다.
    남들하고 문답하면, 거기서 니가 알아서 답을 찾아봐..
          
찰나무량 12-02-22 22:21
   
신립이다 정신줄 놓지는 않았다 수정한다
ㅋㅋㅋ
찰나무량 12-02-22 14:49
   
무신의 난이 왜 일어났냐니?? 무중심의 국가에서는 힘이 곧 권력이니깐 빈번한 쿠데타가 일어난게 당연하지

일본에서 각 영주들이 하극상이 난립했던것은 어떻게 설명하실까?? 고전프라

그것이 전국시대

그러한 고려시대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단계 진보한

성리학 사상을 도입하여~!!

그당시 국내에 상황은 극복했지만

외부적 침략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된것이지~!!
찰나무량 12-02-22 14:58
   
그리고 명성황후이지 민비가 아니니깐

아무렇게나 끄적이지 말길 고전프라///
찰나무량 12-02-22 15:19
   
고전프라//

"최고 군사전력을 자기 집 지키는 가병으로만 끄집어 왔기에"

이말씀에서 웃고 갑니다.

중세유럽의 상비군이 언제나타났는지에서 부터 다시 공부하셔야 할듯~!!

헐~!!

정규군(正規軍)이라고도 한다.

평소부터 집단생활을 하고 엄격한 교육·훈련을 받으므로 단결심과 충성심이 강하고, 전술·무기도 비상비군에 비하여 월등하며, 제대 후에도 예비전력이 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대신, 경비면에서 그 규모가 제한을 받는다.

"상비군은 고대 왕후(王侯)들이 자신의 경호를 위하여 거느린 호위병에서 비롯되었고, 중국이나 로마 제국에서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실제적인 전투병력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징집하거나 지원을 받아 편성하는 것이 상례였다.

유럽에 절대군주제가 생기면서 용병(傭兵)으로 된 상비군이 출현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소규모의 것이었으며, 자국의 정규병으로 된 근대적인 상비군이 나타난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출처] 상비군 [常備軍, standing army ] | 네이버 백과사전

몽고부족도 집지키는 가병이었는데 어떻게 설명하실려고

엄청난 무리수~!!

임란중 일본군대는 집지키는 군대아니고여?? ㅋㅋㅋ

1. 다이로직(大老職) 5명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 : 江戶大納言(강호대납언)

-모오리 데루모도(毛利揮元 모리휘원) : 安藝宰相(안예재상)

-우끼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희다수가) : 備前宰相(비전재상)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전전리가) : 加賀宰相(가하재상)

-고바야가와 다까가게(小早川隆景 소조천융경) : 筑前宰相(축전재상)

2. 쥬우로직(中老職) 3명 72p   

-이꼬마찌 가마사(生駒親正 생구친정) : 雅藥頭(아약두)

-나가무라 가즈우지(中村一氏 중촌일씨) : 式部少輔(식부소보)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 굴미길청) : 帶刀先生(대도선생) 

3. 부교우직(奉行職) 5명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천야장정) : 彈正少弼(탄정소필)

-마에다 겐이(前田玄以 전전현이) : 德善阮(덕선원)

-마시다 나가모리(增田長盛 증전장성) : 右衛門尉(우위문위)

-이시다 미스나리(石田三成 석전삼성) : 治部少輔(치부소보)

-나가쯔가 마사이에(長束正家 장속증가) : 大藏大輔(대장대보)
맙소사 12-02-22 21:22
   
당시 조선의 군사력이 약하다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100% 맞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요..
조선 태조는 고려의 왕명을 받아 요동 정벌을 나섰지만 회군하여 조선을 세우고, 세종 이후에 삼촌이 조카를 폐위 시키고 왕이 되고 그야말로 왕 스스로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군가가 왜의 동태가 이상하다하여 10만 양병설을 내세우는데 그 왕은 이것을 액면 그대로 듣기에는 너무나 무섰웠던 거지요.....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볼때 누군가가 본토내에서 그야말로 명하고도 여진하고도 현피 한번 떠볼만한 10만 군대를 지휘한다고 생각하면 밤에 잠도 못잤을 거니까요.....

그리고 왜는 네덜란드 등으로 부터 딱총을 이용한 새로운 형태의 전투 방식을 배웠고, 조선은 이런 형태의 전투를 처음 겪는 터라 당황해서 수많은 전투에서 졌지만, 결국엔 보잘것 없는 병력으로 전쟁에서는 승리했다는 건 육해군 다 통틀어서 결코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지요.

 왜란으로 인해서 뽀록난것은 명의 형편없는 전투력이었죠. 이것은 후에 여진에게 해볼만 하다는 자신감을 준것이 명은 사라지게 된 원인인거죠.....그리고 왜란으로 인해 초췌해진 조선은 여진으로 하여금 후방의 걱정을 지워버린거고.....  청은 솔직히 왜란이 끝나고 그 상처가 다 치유되기 전에 쳐들어 온거고, 청은 사실 정말 적당한 시기에 기회를 잡은 거죠..... 그 이후  왜란 호란 두 차례의 전란은 영조 때까지도 전염병으로 시달렸던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정비가 다 되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심청이 12-02-24 16:02
   
청나라가 명을 정복할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가 조선 파병으로 국력이 약해진 것 뿐만 아니라
황제의 주색잡기와 부패로 인해
이자성의 농민 반락군이 북경을 점령 함
이때 호로관을 지키던 명나라의유일한 희망 원숭환을
환관을 시켜 누명을 씌워죽게 만들어 원숭환 부대가 청나라에 투항함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할때도 농민군을 토벌하고 황제를 xx하게 한
이자성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왔다는 교묘한 명분을 내세워 저항을 최소한 함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할수 있었던 것은 이런 복합적인 이유가 맞아 떨어진 천우신조의 역사적 사건임
쉐렌션 12-04-25 00:26
   
문무라는게 군사력 시스템의 차이를 예로 들고 있는데

확실한 시스템의 차이인데 문무가 어딧냐니???
 
 
Total 19,96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202
3391 [일본] 일제시대.. (8) 아마데우스 07-15 2210
3390 [다문화] 한국화 강요?를 꼬집는 파키스탄 국결녀 (15) 내셔널헬쓰 07-15 3901
3389 [중국] 10억불로 북한 정권유지 시키는 중국 (3) 심청이 07-15 2073
3388 [다문화] 다문화 반대에 대한 통찰력있는 글...[펌] (3) doysglmetp 07-15 2445
3387 [기타] 성노예라는 표현도 그다지 적절치 않은듯합니다 (1) 느느느느 07-15 1854
3386 [다문화] 성공한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나오는건 좋은데.... (2) 푼수지왕 07-15 2263
3385 [일본] 일본위안부의 참상 대한민국인이라면 읽어봐주세요 (3) 타키르사 07-14 2434
3384 [다문화] 미국 성매매여성 65%이상 중국계한인여성, 조선족 (13) doysglmetp 07-14 3225
3383 [다문화] 한국년을 어떻게하면 쫓아내지?( CN ) (6) doysglmetp 07-14 3486
3382 [중국] 중국부자? (1) gelaga 07-14 2203
3381 [다문화] 노동허가제를 요구하는 난민,,, (2) 내셔널헬쓰 07-14 2411
3380 [중국] “김영환 등 4명, 중국인 기결수 4~5명과 교환 석방” (5) 심청이 07-14 1956
3379 [중국] 수원 토막 살인 사건 조선족 커뮤니티 반응 (8) Kamenasi 07-14 5097
3378 [일본] 지금 왜구와 왜구돈받고 혐한질하는 놈들과 싸움중… (7) 사노라면 07-13 2477
3377 [기타] 식민지 경영전략 (6) 뽈큰 07-13 2170
3376 [다문화] 세계 어느나라도 전쟁중에 난민을 받아주는 나라는 … (17) 내셔널헬쓰 07-13 3275
3375 [기타] 이승만이 남한을 완전 포멧 했다면 (22) 뽈큰 07-12 2956
3374 [다문화] 다문화정책이 싫은 이유.... 정말 원초적인??? (4) 화니군 07-12 2058
3373 [일본] 일본은 왜 잃어버린 20년을 겪어야만 했을까? (4) 카로스 07-12 3396
3372 [다문화] 방글라데시 노동자에게 살해당한 한국소녀... (5) 내셔널헬쓰 07-12 3247
3371 [다문화] 무속인 시체거래 (9) 히야신스 07-12 2420
3370 [기타] 외규장각도서 환수식 및 석전대제(유교의성현을 기… (1) 심청이 07-12 1950
3369 [통일] 대한민국의 핵무장은 5천만 겨레의 생존을 위한 필연… (3) 굿잡스 07-12 3002
3368 [다문화] 조선족이 터트릴 진정한 폭탄 (1) 휘투라총통 07-11 3129
3367 [중국] 국제결혼 감소 추세 (6) 투후 07-11 1108
3366 [기타] 임진왜란과 혼혈 (14) 뽈큰 07-11 8825
3365 [일본] 독도는 일본땅 말뚝 가지고 어제 출발 했답니다 (6) kpop 07-11 2956
 <  611  612  613  614  615  616  617  618  619  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