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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2-25 17:10
[중국] 중국의 역사는 북방민족 정복의 역사다..
 글쓴이 : 심청이
조회 : 4,124  

17세기 중반 강희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시작된 중국 청나라의 전성기는 그 아들 옹정제를 거쳐 18세기 손자 건륭제 대에 이르면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강희, 옹정, 건륭 3대 134년에 걸친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르는데, 손자 건륭제는 조부의 위업을 이어받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등 국사의 전반에 걸쳐 강력한 국가를 이룩해냈다. 18세기 서양이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로 급변하는 새시대를 맞고 있었다면, 중국은 건륭제라는 걸출한 황제에 의해 또 다른 의미의 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제왕학을 배우고 태자밀건법으로 제위에 오르다

건륭제는 재위 내내 할아버지 강희제를 의식했으며 강희제를 본받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강희제가 뛰어난 군주였던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건륭제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할아버지 강희제의 힘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건륭제는 아버지 옹정제가 왕자였던 시절 뉴호록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당시에는 아버지 옹정제에게 제위가 예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어머니 뉴호록씨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건륭제는 황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도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황족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기관에 들어가면서 건륭제는 그 우수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학업은 물론이려니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사냥에 나가 태연하게 곰을 잡는다던가, 부모에 대한 존경과 효심을 잊어버리지 않아 아침 저녁으로 예를 다한다던가 하여 무예와 성품 면에서도 남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를 눈 여겨 본 것이 그의 할아버지 강희제였다.


 

강희제는 건륭제의 황제로서의 자질을 알아보고 어렸을 때부터 제왕학을 교육하였고 어떨 때는 강희제 자신이 직접 나서 건륭제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는 아들 옹정제에게 다음 황제는 반드시 건륭제가 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건륭제의 아버지 옹정제 또한 건륭제의 자질을 아끼고 북돋우었다. 다섯째 아들인 건륭제를 귀히 여기고 그를 직접 교육하였으며 때로 쉬운 국정을 맡겨 처리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코 옹정제는 건륭제에게 다음 황위를 약속하지 않았고 공식화하지도 않았다.

 

청나라는 장자가 황위를 세습하던 이전의 나라들과는 달리 황자들 중 뛰어난 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는 무한 경쟁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황태자를 미리 정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다가 가장 뛰어난 자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통치체제를 강건히 하여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드넓은 중국 본토를 빈틈없이 다스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옹정제는 건륭제가 지닌 황제의 자질을 알았지만 끝까지 그를 황태자로 봉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음 제위를 이을 황자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어 봉한 후 순치제가 ‘정대광명 正大光明’이라고 쓴 현판 뒤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옹정제 자신이 사망한 후 이를 열어보도록 하였다. 이것을 ‘태자밀건법’ 이라고 한다.

 

당시 다른 경쟁자에 비해 독보적이었던 건륭제가 다음 황위를 이어 받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만들지 않았던 것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최선을 다하게 하려는 옹정제의 깊은 뜻 때문이었다. 옹정제 사후 열어본 상자 속에서는 그동안 황제로서 교육받은 건륭제의 이름이 당연한 듯이 나왔고 25세의 나이에 건륭제는 청나라의 6번째 황제로 등극하였다.

 


태평성세를 향한 안정적 출발

재위 초기의 건륭제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제왕학을 교육받고 여타 경쟁자에 비해 독보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갖춘 데다가 선대로부터 강력한 뒷받침을 받은 탓에 건륭제의 치세는 출발부터 매우 안정적이었다. 건륭제는 키가 크고 자세가 바르며 단정하고 청빈한 생활습관, 강건한 체력과 활달한 성격,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취향 등 이상적인 모습을 한 군주였다.

 

그의 이러한 바람직한 모습은 신하와 백성들을 감화시켰고 비록 이민족인 만주족 지배자이기는 하나 피지배층이었던 한족 일반 백성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게 하기도 했다. 역대 청조의 황제들 중 건륭제는 그 치세가 긴 탓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애정과 인기로 인해 민간에 퍼진 무수한 에피소드와 설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그중 그가 젊은 시절 위구르를 정복하고 약탈해온 후궁 향비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건륭제가 향비를 강제로 범하지 않고 그 마음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결국 그 짝사랑은 향비의 자결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건륭제는 무지막지한 오랑캐 군주가 아니라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성 좋고 멋진 남성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 건륭제에 대한 민간의 인기를 가늠하게 한다.

  

이렇듯 민간에서부터 통치계급에까지 황제의 입지를 굳힌 건륭제는 우선 내치에 힘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는 아버지 옹정제가 쓰던 한족에 대한 가혹한 정책을 완화시켜 한족과 만주족의 융합을 도모하였다. 황족의 정치 개입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지방제도를 고치고 정확한 인구조사를 통해 세수를 확보했다. 당시 중국은 농법의 개발과 이에 따른 생산량의 증가, 경작지의 증대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통한 세원의 확보는 국가 재정과 군사력을 튼튼하게 하였다.

 

 

중국 영토를 최대로 확장

확보된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건륭제는 30대 후반부터 국외로 정복 사업을 시작하였다. 대금천 공격을 시작으로 하여, 몽골의 준가르, 대만. 베트남, 버마, 네팔 등에 원정하여 외몽골과 위구르족이 살던 지역인 신강(새로 얻은 영토라는 뜻)을 얻고, 티베트와 버마, 네팔, 베트남에 대해서는 일부 지배력을 행사하며 조공을 받아냈다. 이로써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160만 km² 늘려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이때 확장한 중국의 국경이 결국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건륭제의 정복 사업은 이전의 만주족 중심이 아니라 한족들을 함께 참가시켰다는 데서도 의의를 가진다. 한족과 만주족이 청나라의 깃발아래 함께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두 민족간 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건륭제는 자신이 나간 10번의 원정에서 모두 승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스스로 이를 ‘십전무공’이라고 일컫고 본인을 10번의 원정에서 모두 이긴 ‘십전노인’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또한 원정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전시해놓고 자랑하기를 즐겼다. 또한 그는 할아버지 강희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둘러보는 것을 매우 즐겼다. 순행은 황제가 전국을 돌면서 그 위엄과 권위를 보이고 지방 백성의 생활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건륭제는 한족들이 주로 사는 강남 순행, 즉 남순을 6회, 서쪽의 사천성 등을 돌아보는 서순을 4회, 산동성, 호북성 등으로 동순을 5회 진행하면서 수도 북경과 지방간의 교류를 꾀하였다. 이 순행들은 황제가 움직이는 만큼 큰 비용이 들어 황실 재정고갈에 한몫을 하긴 했지만, 넓은 중국 영토 내에서 지방과 중앙간의 정치, 학문, 예술의 교류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도 가지고 있다.


남순을 떠나는 건륭제

 

 

학문과 예술을 장려


건륭제는 자신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구파였으며 그다지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시, 서, 화(詩, 書, 畵)를 즐기는 풍류객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향으로 건륭제는 치세 당시 학문을 부흥시키고 예술을 장려하였다. 그는 학자와 예술가를 우대하였으며 그들과 토론하고 예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전국 각지의 책을 모아 문연각에 보관, 이의 목록을 작성하고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하여 [사고전서]를 편찬 하였다. [사고전서]는 명나라 영락제 때 만들어진 [영락대전]을 본떠 만든 것으로써 [영락대전]보다 그 분량이 3배가 넘었다. 이 사업은 시작한 지 12년이 걸렸으며 수록된 책은 3,458종, 7만 9582권이며, 참여한 학자는 3,800여명에 이르렀다. 이 [사고전서]는 당대의 서적을 국가에서 모두 모아 정리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건륭제는 만주족에 반대하는 한족의 글이나 책을 이를 계기로 모두 소각하거나 판목을 부수는 등 금서로 만들었으며, [사고전서]에 수록되면서 부분적으로 고쳐진 것도 있었다. [사고전서]는 여러권을 만들어 자금성, 원명원 등 북경내의 4곳과 양주, 진강, 항주 등의 한림원에서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백마를 조공품으로 받는 건륭제

 

 

한편 건륭제는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 궁궐을 증축하거나 새로 짓고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였다. 특히 서양의 건축술을 도입하여 후원인 원명원을 서양 선교사들에게 명하여 서양식으로 짓도록 하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호의로 대하며 우대하였고 선교 활동을 보장해주었지만 그 종교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서양의 과학과 예술만을 선택하여 취하려고 하였다. 건륭제 치세에 중국에 와있던 선교사들의 노력 등으로 중국은 서방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항해술의 발달과 산업혁명 등으로 서양으로부터 무역요구가 증대되자 이를 일부 수용해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면, 칠기, 도자기, 비단 등이 세계에 수출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이 늘고 백성들의 삶은 윤택해졌다. 이러한 무역을 통해 중국은 많은 은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1780년(건륭 45년)에는 450,000 kg의 은이 청조의 국고에 들어와 있게 되었다.

 


사치와 부패로 얼룩진 말년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며 60여 년간 태평성세를 구가하게 한 건륭제였지만, 치세 말년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하였다. 할아버지 강희제처럼 장수한 건륭제는 잘못된 인재 등용으로 인해 말년의 치세를 사치와 부패로 얼룩지게 했다. 건륭제가 말년에 등용한 화신은 개인적인 능력은 탁월한 인물이었으나 권력을 잡자 그 능력을 이용하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화신은 건륭제가 애지중지하는 딸을 며느리로 맞으면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주변에서 건륭제에게 화신의 부정을 고했으나 끝까지 화신을 총애했다고 한다. 화신은 결국 건륭제 사후 그 아들 가경제 때 가서야 제거되었다.

 

 

시를 짓고 있는 건륭제

 

 

나라의 부강에 힘입어 마음껏 누릴 수 있던 건륭제의 사치도 말년에는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었다. 거기다가 화신 등 부패한 관료들의 부정은 그동안 건륭제가 쌓아 놓은 업적을 그늘지게 하였고 민중들은 청 황실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건륭제 말기 일어난 백련교도들의 난은 부패한 통치계급인 만주족에 대한 한족 민중들의 항거였다. 이 백련교도의 난은 건륭제에 의해 진압되지만 가경제 때 다시 일어나고 이후 산발적으로 계속되다가 청나라 말 의화단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건륭제는 재위 60년이 되자 아들 가경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물러났다. 존경하는 할아버지 강희제보다 더 재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록 태상황으로 물러났지만 실제로 건륭제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아들 가경제를 앞세워 정치를 쥐락펴락하였으며 가끔은 조회에도 참석하는 등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건륭제 말기는 차는 달도 기운다는 것을 보여준 시기였다. 더할 수 없는 전성기를 구가한 후 스스로 만든 전성기가 족쇄가 되어, 나라가 쇠락의 길로 가는 문을 연 것이다. 60년간 황제로 그 후 4년은 태상황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건륭제는 88세를 일기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건륭제 이후 19세기에 접어든 청나라는 서양세력의 침입과 국내의 환란 속에서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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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ㄹㅇㄹ 12-02-25 17:13
   
금나라,청나라를 우리역사로 보는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금나라,청나라는 만주족(여진족)의 역사죠
     
심청이 12-02-25 17:27
   
고구려는 우리의 역사라고 하면서 인종으로 보나 활동 영역으로 보나 중국 한족과는 아무 관계도 없고 오히려 동이족인 한민족과 유사한 여진족임.. 스스로 조선을 부모의 나라고 섬겼고 임진왜란때는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왜를 섬멸 시키겠다고 했고 청태종이 병자 호란 때 조선을 쳐들어 올때도
왜 같은 동족인 청을 배척하고 명을 섬기느냐고 했다. 여진족은 누누이 혈육의 정을 호소 했으나
조선은 그 사대주의에 얽매여 청을 배척함.
          
ㄴㅇㄹㅇㄹ 12-02-25 17:39
   
혈연적 언어적으로 비슷하고 민족의 뿌리가 북방민족으로 같다고 해서 같은민족이 되는게 아녀요;;
그렇게 따지면 모든 북방민족은 우리민족이 되는거여요;; 부리야트,돌궐,거란,말갈,선비 이 민족들이 우리민족은 아니잖아요
관조자 12-02-25 18:24
   
중국이 이민족에 정복을 많이 당했지만 결국은 모두 문화의 힘으로 흡수했습니다. 중국인을 사대하는것도 웃기지만 필요이상 비하할 필요도 없습니다. 냉정히 현실을 직시해서 우리민족에 유리하게 관계를 가져야죠. 광해군의 실리외교 처럼
크라바트 12-02-25 18:32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이걸보고 중국에 남아있는 여진족(짱깨 한족 말고 진짜 청의 후예인 여진족들요)들은 뭐라고 하나요?
그들도 님과 같은 의견이라던가요?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네..
만약 그들도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거야 말로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 이라 생각되는데요..
mymiky 12-02-25 18:42
   
낡은 떡밥의 어그로인듯 ㅡㅡ;;일단 조국통일 먼저 하는데 힘써주시길!!!
크라바트 12-02-25 18:43
   
뭐랄까..반대입장이긴 하나, 마치 동북공정하는 짱깨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의 무리수 때문에 짱깨들로 하여금 양심에 가책도 없이 동북공정을 행할 수 있게끔 명분을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드네요.
     
ㄴㅇㄹㅇㄹ 12-02-25 18:46
   
동감합니다 이런 유사역사학에 빠져든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짱꼴라들의 동북공정의 힘을 실어주는 것이되죠
          
관조자 12-02-25 19:03
   
그럴려고 쓴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사람이 많은것도 문제죠. 그걸쓴 이유립이 친일파인데도
Centurion 12-02-26 08:31
   
완안올출이라는 금나라의 황족이자 장수가 있었죠.
그 사람이 중국 드라마나 사서에 김올출로 나옵니다.

애시당초 금사에 금나라 황족의 선조가 고려 평주 사람 신라인 후예 김함보가 만주로 이주와서,
대대로 그 주변 여진족들을 문물로 교화하면서 유력인사가 되어 금나라를 세운거죠.

그래서, 완안올출의 후손들은 김씨성을 쓰고 있습니다.

이건 KBS 역사스폐셜에 나오죠.
완안씨로 살다가, 취업할 때엔 김씨성을 쓴다더군요..
Centurion 12-02-26 08:38
   
일부 환빠들이 애신각라라는 청나라 황실의 성이 과장을 보태서
애신각라 = 신라를 사랑하고 맘 속 깊이 새겨라는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게 틀렸다고 할지라도...

공식적으로,

아이신= 금, 쭤러=겨레..
곧, 여진어의 의미 자체는 금(=김) 민족, 금 겨레, 금 혈통, 금씨 가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http://cafe.naver.com/royal2848.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4&

청나라 마지막 황제 애신각라 푸이의 후예들도 현재 김씨성을 쓴다고 하는군요.
Centurion 12-02-26 08:39
   
그리고, 금나라의 왕비족은 대게 발해출신과 여진출신 두부류로 나눠지는데..
발해인들과 신라 출신 김씨들이 여진족들을 문명화시키고 이끌었던 엘리트라고 보면 될 겁니다.

실제로 금나라 황궁을 설계한 사람도 발해 출신이었다더군요..
     
ㄴㅇㄹㅇㄹ 12-02-26 10:48
   
맞습니다 님 하는말들이 전부 맞는 말이지만 우리나라 역사관점은 어디까지나 민족사이기 때문에 금나라 청나라의 지배계층이 우리민족이라해도 우리역사라고 성립되지 못합니다
          
관조자 12-02-27 14:15
   
저도 동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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