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처절한 패권 다툼은 지난 편에서 기술했구요.
(못 보신 분들은 그냥 춘추전국시대 군웅할거 편이라고 생각하심 되요)
거기에 남방과 북방간의 지역 대립,,,,내륙과 발전 된 동남 연해 지역간의 대립
공산주의에 충실한 세력과, 실용주의적 세력간 대립
노쇠한 상하이방과, 젊은 공청단간의 대립
천안문에 피를 묻힌 세력과, 천안문으로 피를 흘린 세력간의 대립....
1.시진핑 vs 리커창
1995년 덩샤오핑은 중국의 미래를 이끌 후계자를 찾아내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이에 당 정치국과 중앙조직부에선 당성, 능력, 평판, 연령 등을 기준으로
전국을 이 잡듯이 뒤진 끝에 두 명을 추천해 올립니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시진핑과 리커창...(무협지의 서막이죠)
2. 풍운아 시진핑
시진핑의 아버지인 시중쉰은 혁명원로로 당근 태자당 소속입니다.
하지만 시중쉰은 여차저차해서 반당분자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후 문화혁명까지 벌어져
시중쉰 집안은 농촌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태자당에선 보기 드문 고난의 가문)
하지만 운명은 시진핑을 버리지 않았나 봅니다.
문화혁명이 끝이 나고 시중쉰은 복권되어 시진핑은 그 후 부터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특히 특이할 만한 일은 32세의 어린 나이에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발탁된 일입니다.
32세 젊은이가 타이완 금문도를 바라보는 경제와 안보의 거점도시에 자리를 잡은 것이죠.
기회를 제대로 잡은 시진핑은 그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인민일보에 대서특필 되며
일약 전국구 정치인으로 도약합니다. (운빨은 타고 났죠)
하지만 시진핑 인생에 최초의 불운이 다가 오는데..시진핑이 있던 푸젠성에
중국 역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이에 공청파는 들고 일어 나고
시진핑은 도망치듯 저장성으로 쫒겨 갑니다. 하지만 영웅은 위기를 스스로 기회로 만들죠.
그가 당서기로 있던 저장성이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중국 최고의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공청파의 끈질긴 견제에도 그는 상하이방과 손을 잡는 유연함을 보이면서
공청단이 밀어 주던 류옌둥을 밀어내고 중국의 심장...상하이시 서기에 오르게 됩니다.
단번에 태자당의 선두주자로 부상하며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저력을 보입니다.
3. 파란만장 리커창
태자당에 시진핑이 있다면, 공청파엔 리커창이 있습니다.
리커창의 고향은 안후이성 펑양현 입니다.
아버지가 현장을 지내긴 했지만 어린 시절 먹을 것이 없어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닐 정도로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시진핑과는 성장배경부터 달랐던...
가장 공청단스러운 인물이죠.
1977년 대학입시 제도가 부활하자 리커창은 북경대학 법률학과에 지원합니다.
(시진핑은 아버지 빽으로 칭화대 갔음)
이때 리커창의 정체성을 규정 짓는 중대한 사건이 생기니 이름하여 "천안문 사태"
리커창의 대학시절부터 절친이었던 왕쥔타오가 천안문 사태로 중국을 탈출해야만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절친을 잃은 리커창으로선 공청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마음 속에 칼을 갈며 악착같이 성공을 향해 질주합니다.
1993년 공산주의청년단 후보서기로 정계에 입문한 리커창은 38세가 되던 해
공청단 제1서기 자리에 올라 역대 최연소 부장(장관)급 인사가 됩니다.
또한, 현재 중국 국가 주석인 후진타오와 운명적인 만남을 하게 됩니다.
후진타오와 리커창은 서로 고향이 같은 동향이에요.
(그 넓은 중국에서 같은 고향 사람인 후진타오를 운명처럼 만난 겁니다.)
후진타오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간 리커창 데리고 일하며
일찌 감치 후계자로 점찍습니다.
리커창은 후진타오의 후견을 발판으로 업적을 쌓기 시작합니다.
시진핑 처럼 압도적인 업적은 아니였지만 나름 준수한 성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 부분을 쓰자면 넘 길어서 패스)
2004년이 되자 리커창은 동북진흥정책의 거점인 랴오닝성 서기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청단 내 본격적인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합니다.
분배론에 중점을 두고, 공청단의 조직적인 후원 속에서 차기 주석으로 거론 되기 시작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확정적이였습니다)
하지만 리커창의 승승장구가 오히려 시진핑의 급부상을 불러 옵니다.
후진타오가 리커창을 너무 노골적으로 밀어 줘서 리커창이 표적이 된거에요.
후진타오의 후계자는 리커창이다...를 너무 일찍 적에게 보여 준겁니다.
리커창의 급부상에 위기감을 느낀 상하이방과 태자당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지방행정 분야에서 리커창보다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으면서
성분까지 좋은 시진핑 카드를 은밀히 준비 한거죠.
4. 노출된 카드와 숨겨진 카드의 싸움은 뻔하다!!!
2007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원래 이 대회는 후진타오의 영도체제를 공고히 하고
공청파 출신의 차세대 후계자를 예고하는 자리로 여겨졌습니다.
공청파가 당과 정치국을 장악할 때만 해도 "리커창이 차기 주석이다" 라는 예측이 대세였습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반열인 정치국 상무위원들을 호명하는 순간 ....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시진핑이 리커창을 제치고 서열 6위로 소개되자,,, 후진타오의 얼굴은 굳어 집니다.
이걸로 다음 10년, 공청단에게는 고난의 시기가...
상하이+태자당에게는 영광의 시기가 도래한거죠.
위기에 빠진 공청단이 다시 약진 하려면
중국 5세대 지도부가 내수 진작에 실패하고 양극화가 심화 되
체제 불안까지 이어 져야 합니다.
그걸 준비하기 위해 공청단 인재들은 일찌 감치 내륙으로 떠났구요.
내륙이 현재 중국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현재 후진타오가 내륙 발전에 집착하고 있는 이유도 경제적 이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내륙 지역에 또아리를 틀겠다는 공청파의 전략이 성공할수 있을까요?
현재 중국에선 7분에 한번씩 폭동이 일어 나고 있습니다.
개혁 개방 이후 10배 이상 늘어 난 수치입니다.
(여기서 폭동이라는 것은 국가 권력인 파출소 이상이 습격 당하는 진짜 폭동입니다)
이코노미스트 통계로는 2010년에 이르자 파출소 이상이 습격 당하는 폭동이
9만건에 달한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실제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이코노미스트 가보세요)
배고픈 농민공들은 언제든지 폭도로 변할 소지가 다분합니다.
중국이 8% 성장을 못하면 나라 자체가 유지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배부른 동부 해안 지역은, 배고픈 내륙에 나눠 주기를 거부합니다.
여기에 정치 불안까지 이어 진다면, 중국 분열은 막을 수 없는 것이 되겠죠.
5. 그럼 한국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한국 입장에선 상하이방 + 태자당 세력의 득세가
국익에 유리합니다. 특히 태자당의 본거지인 동남 연해지역은 개혁개방 초기부터
한국과 많은 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진핑 역시 한국과 인연이 깊습니다. 저장성 서기로 있는 동안
우리 민족의 숙원인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를 복원 해 주었고,
한참 한중관계가 좋을 때는 한국에도 방문하고 그랬거든요.
물론 북한은 현 공청파가 득세 하는게 유리하고요.
꼭 60년 전...
항일 운동할 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계열은 동남 연해지역에
김일성의 조선 팔로군 계열은 내륙 지역에 은거 했던 시절의 재판이 되어버렸네요.
중국의 권력 판도가 한중 관계를 넘어서 우리 민족의 앞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알아 두심 유익해요^^
*다음편이 완결이 되겠네요...보시라이 낙마로 인한 소용돌이와 베이징에 탱크를 밀어 넣은
저우융캉의 의도...서로가 서로를 무차별 연행했던 살벌한 현장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