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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2-24 05:35
일제치하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야 했던 [동아시아 여성들]
 글쓴이 : dms
조회 : 12,109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대만,중국,동남아시아,러시아,호주 여자들을 데려가 위안부로 삼았습니다. 10살 정도의 정말 어린 여자아이부터 딸을 대신하여 온 여성까지 나이는 다양하였지만, 대부분이 10대초의 미성숙한 어린 소녀들이었고, 조선인 여성들의 피해가 가장 많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오신 할머님들은 모두 성병에 걸리셨고 아니면 자신들의 행위를 없애기 위해서 모든 할머니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지금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고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살아남으신 위안부할머니들이 일본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졌다는 소리를 들는 순간 저는 법이 싫었습니다.

할머니들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 커다란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일본을 어떻게 이기겠습니다.

일본정부에서 할머님들에게 돈을 줬다고 합니다. 지원하는 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바로 99엔입니다. 한국 돈으로는 1300원입니다. 할머니들이 돈을 바랬습니까? 1300원으로 무얼하나요? 밖에 나가서 놀 돈도 되지 않습니다.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日本軍慰安婦) 또는 일본군 성노예(日本軍性奴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강제·집단적으로 또는 기만에 의해 징용되어 성적인 행위를 강요 받은 여성을 말한다.

 
《역사가 기억하게 하라》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다큐멘터리에서...

「이옥선 할머니」

주일날이면 군인들이 줄을 서요 많이 와서
그러면 열네살짜리가 하루에 오십명 받을라하면
그 사람은 어떻게... 여기 앉은 분들도 자식들 다 있지요
열네살짜리 어찌 한줄 압니까?
성질이 못됐다고 칼로 이렇게 째는거야 사람을.
이렇게 째도 그 사람이 항복을 안하면 찔러요.
찔러도 항복 안 하면 쿡 찔러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는 거야.

「공정엽 할머니」

일요일이 되면 군인들이 많이 나와서
손님을 많이 받으니까 제일 힘들었지.
손님이 금방 잠깐 자고 나가면
또 거기서 기다려. 줄서서 기다려. 문을 똑똑...
끝도 안 났는데 그 손님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문 두드려, 빨리 나오라고. 나오면 자기 차례 된다고.
그 군인들 많이 받는 게 제일 내가 징햇어 징해.
...깜빡 속아서 우리 아버지도 속고 나도 속고
거기 간 처자들 아가씨들 다 속았지.

「문필기 할머니」

같이 지낸 그 할머니가 자식이 없으니까
자식이라도 하나 낳아서 키워 봤으면 애비는 일본 군인이라도
내가 한 번 낳아서 키워보고 싶다
그렇게 해서 키운다고 했는데 총살했어요.
왜 그사람을 총살시키는가 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본을 따르지 마라 그 말이야.

노예처럼 끌고가서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또 말을 듣지 않으면 폐치카에서 인두 같은 것을
달구어서 여기(겨드랑이)를 지졌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이럴 수가 있느냐. 왜 우리는 지나간 일을 이렇게도 모르고
사느냐, 답답하다. 살아있는 내가, 증인이 있는데
그런 일이 없다고 하고 그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눈물이 나고 기가 막혀요, 그래서 시작했어요.

열입곱살이 말이 열입곱살이지
많이 넘은 것도 아니고
열여섯살 조금 넘은걸 끌고 가서
강제로 울면서 안 당하려고 막 쫒아 나오면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이렇게 당했던 사람을 몰라요.
일본정부에서는 없대요.
기가 막혀 말이 안나와요. 기가 막혀 말이 안나와.
내가 죽기 전에, 내 눈 감기 전에
한 번 분풀이 꼭... 말이라도 분풀이하고 싶어요.

여자란 것은 생리가 있는데 생리 때도 가리지 않아요.
생리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요. 무슨 짐짝 끌 듯 가져가
자기네 마음대로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면 버려버리고 죽여버리고...

일본 다찌마찌 미사끼 북해도 한국인 여자정신대 수십명이 집단xx한 현장에서...

일본 대사 똑똑히 들어. 어디서 그런 망언을 하는 거야.
일본 대사 이번 일에 합작했지!

사죄를 받아야 돼 분명히
일본에서 일으킨 전쟁이야
사죄없이 돼! 이렇게 망쳐놓고
왜 사죄를 안해!

나는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서 군인을 하고 싶어.
군인으로 가서... 이 나라를 잘 지키고 싶어.
뺏기고 짓밟힌 게 너무 억울하고 원통해서.

우리가 강요에 못이겨 했던 그 일을 역사에 남겨두어야 한다.
(97.12.16사망하셨어요)

「김순덕 할머니」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나 혼자만 알고
죽을 일이 아니고, 만방에 알려서 우리나라의 후세들한테는
절대적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고 나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TV에 나와서 심고하고 얘기하고
그 날 집을 나왔어요.

나는 우리나라에 이 후세들한테 절대적으로 이런 일이 없어야 되겠고,
일본사람들이 한 짓이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게 했고, 그래서 나는 이일을 죽는 한이 있어도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다시는 없도록 우리할머니들이 끝내고 죽으리라고 결심했어

못다 핀 꽃 /김순덕 그림 앞에서

내가 못다 핀 꽃이라고 지었어, 학교를 못 다녔기 때문에
내가 그랬어요, 나는 제일 공부가 하고 싶다.
그랬더니 신문에 나서 선생님들이 다섯 분이 왔어요.
그래서 나는 여기서 그림도 가르치고,
그래서 그림도 그 때 배워서, 그림을 그려서
못다 핀 꽃이라고 내가 이름을 지어 가지고는...
(04.6.30사망하셨어요)

]로 이동합니다." href="http://" target=_blank>

할머니들이 힘들게 위안부때 삶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못된 일본놈들이 할머니의 몸에 낙서를 했다고 합니다. 말이나 됩니까?



손을 강제로 묶어 키스를 합니다.



이렇게 벗고 한방에 따로따로 넣어두고 군인을 한명씩 넣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일본인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우린 매춘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일본인은 자기 조상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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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승연씨가 위안부의 모습을 하고 일본위안부모습으로 화보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이승연씨는 모든걸 잃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었던 그때가 비록 추스리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마음은 편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날이 오겠지 라고 생각했다" 고 말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이승연에게 보내신 편지>

애야..

나는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니가 나의 썩고 있는 육신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짱한 입술로
맹랑한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난 그래도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단다.

한때..나도 너만큼이나 뽀얀 속살로 벌판을 누비며,
홍조 띈 얼굴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재잘거리던
너만큼이나 철없던 계집아이 시절이 있었단다.
부자집은 아니어도 건장한 청년 만나서
초가 삼간에 살아도 이쁜 아이 낳아 옥수수 심고
고추심어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
조금 지나니 고통스럽더라..
그래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여길 즈음..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악몽이라는 걸..니가 지금 느끼느냐?
나는..수십년을 그렇게 지옥속에서 살았단다.
나는..나를 놓아 버린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여자 였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너는..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땅이 없어.
그들이 다 파서 먹었으니..
수십명의 개 떼들에게 내 몸 하나 먹힌건 그래도 별거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향이라고 돌아와 발을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놓고
개 떼들의 습격이 마치 내 의지였던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하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 나의 숨통을 더 조여왔던 것 같다.

내가 너를 미워한다면..그건 니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가 여자이기때문이다.
니가 나를 모른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그저 너를 대신하여 개 떼들에게 끌려간 것일 뿐이다.
너덜 너덜한 육신을 안고서 돌아와서..
온전한 햇볕 한번 못보고 살아온 내가
지금와서 너에게 사진의 모델이나 되라고 하니까..
내 살아온 것이 오늘 이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이구나.

나를 동정하지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덜 너덜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에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트릴 그런 삶은 아니었다.

애야..

어떤 때에는 니가 무슨 죄가 있을까..싶었다.
동물원 구경 오는 심정 이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를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는 내 욕심이 어리석은 것이라 여겼다.
너처럼 부푼 젖 가슴을 나도 가졌었단다.
너처럼 고운 등을 나도 가졌었단다.
개 한마리 세워놓고, 니가 얼굴에 숯을 바른다고 정녕 니가 내가 될 수 있겠느냐?
니가 그 고운 등을 들이대고, 풀어 헤친 저고리 고름 사이로
하얀 젖 가슴을 내민 것은,
사치였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살아도 조국속에 묻힐 것이다.
아마도..
내 눈감을 그날까지 나는 그저 개 떼들의 습격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온
병들고 썩고 있는 늙은 할머니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나 인것 처럼 하지마라.
정녕..너는 내가 아니다.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애야..
들끓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마라.
그들이..나였다.
왜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냐고 원망 하지마라.
수십년을 소외된 채 사회와 단절된 나도 살아온 땅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랬던 적이 있었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었느냐..
정녕 니가 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해다오.
내 젊은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평안하게 잠들도록..

그리고..
내 힘없는 조국을 그래도 안고 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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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
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
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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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군의 종군위안부으로 끌려간 것은 14살되던 해인 1934년이었다.
그 때 우리집은 풍산군 파발리 (오늘의 김형권군 파발리)에 있었다.

어느날 부모들이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는 사이에 무장한 일본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내입을 틀어막고 밖에 세워놓은 차에 태우더니 파발리 경찰서로 끌고가는 것이었다. 밭에서 김을 매다가 이것을 알게 된 부모들이 경찰서에 달려와 딸을 내놓으라고 하자 경찰들은 모른다고 하면서 목검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하였다.
경찰서 감방안에 갇힌 나는 그날부터 5명의 순사들에게 연일 능욕을 당했다.
순사들은 내가 소리를 지르자 입을 누더기로 틀어막고 두 다리를 위자에 비끄러맨후 번갈아가며 수욕을 채웠다. 이렇게 한달 가량 갇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 하던 나는 일본 경찰들이 저희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미 숱한 처녀들이 경찰서에 끌려와 능욕당하고는 다시 어디론가 실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후 나에게도 그런날이 닥쳐왔다. 어느날 나는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어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일본군 병영에 넘겨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벌써 17~18살의 처녀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모두 풍산군 파발리 경찰에 납치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졌던 것이다.
일본군 장교들은 끌려온 여성들을 모아놓고 하루에 황군 수비대를 50명씩 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수많은 일본군이 무리로 쓸어들어 수욕을 채웠다.
그들은 위안부들이 소리를 치면 입에 말자갈을 물렸고 거절하면 단도날 끝을 음부에 가져다 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며칠사이에 온몸이 피멍이 들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4년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하루는 일본군 장교 8명이 벌고벗고 나타나 나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놈들은 나에게 눈뜨고 보지 못할 갖은 짓을 다하던 끝에 음부에 칼자루까지 틀어박았다. 더는 참을 수 없어 놈들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그러자 놈들은 나를 밖으로 끌고나가 물고문을 가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철봉대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는 입안에 쇠몽둥이를 강제로 넣고 휘둘러 이빨을 모조리 부러뜨렸다. 그러고도 성이차지 않는지 놈들은 나의 입술을 뒤집어놓고 바늘 투성이인 도장으로 입술안에 입묵(문신)을 하였으며 계속하여 젖가슴부위와 잔등, 팔다리와 복부, 이어서 음부부위까지 보기 흉칙한 그림을 입묵하고 나서 내가 정신을 잃게 되자 질질 끌어다가 오물장에 처박았다.

아직도 나의 몸에는 당시 일본군이 새겼던 그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온몸이 쏘고 쓰리던 육체적 고통보다도 그것을 온통 먹물 그림 투성으로 만든것이 너무도 분하여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일제가 남긴 이 원한의 상처로 하여 지금까지 남들 처럼 목욕탕이나 수영장에도 가보지 못하였으며 무더운 삼복철에도 짧은옷 한번 입어보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나 하나만에게 강요된 일이겠는가. 일제가 강요했던 종군위안부 생활은 나뿐이 아닌 수많은 조선여성들에게 참을 수 없는 육체적 및 정신적 고통과 참혹한 죽음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슴아픈 상처를 남겨놓고 있다.
일본정부가 아무리 보상한다 하여도 나의 육체와 마음속에 남긴 상처와 그 피맺힌 원한은 결코 가실 수 없으며 더우기 일본 정부가 감행한 범죄의 역사는 그 무엇으로도 감출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다.

일본정부는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전대미문의 극악한 범죄행위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교활하고 너절한 수법에 매달리지 말고 지체없이 철저한 진상규명과 공개를 해야 하며 진정한 사죄와 성실한 조상을 하여야 한다.

위안부는 우리나라의 여성들만 강제납치당한 게 아니라 일본이 전쟁으로 인해 차지했던 식민지들의 여성들도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얀은 네덜란드인으로 자바 섬에 거주하여 살다가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위안부에 끌려가게 된 피해자 중에 한명이다. 공장직원모집으로 속이기 시작해서 강제적인 납치까지 순식간에 벌어진 인신매매로 인해 10살 정도의 정말 어린 여자아이부터 딸을 대신하여 온 여성들은 청춘과 인생을 일본군에 송두리째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얀의 생활은 과거의 괴로운 기억인 머리에 꽂힌 젓가락을 큰 모자로 가린 것으로 비유가 되었다. 얀은 자식들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이 두려워 평생 악몽에 시달리며 살아가려고 했지만 용기 있는 결정으로 모자를 벗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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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동안 물만주고 만주까지 걷게했습니다. 만주는 그때 소련보다 더욱 더 추운곳이였습니다.
그리고 가자마자 위안부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좁은 방에 모두 넣어 생활하게 되었답니다. 모든 군인이 있는데 한 여자를 추행한 걸로 모잘라 할머님들이 자궁이 아파 앉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미친일본놈이 비웃었답니다. 말이 됩니까?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할머님들을 모두 총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살아서 조선에 돌아오면 따뜻한 정은 없고 차가운 냉대만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 할머님들을 욕된 말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할머님들은 어렵게 살아남으셨습니다. 할머님들이 지금 바라는 것은 돈이 아닌 청춘입니다. 모든 할머님들이 청춘을 돌려달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의 할머님 입니다...

www.ko2ja.co.kr/
  이 주소로 들어가시면 독도, 명성황후 시해, 야스쿠니 신사, 칠지도, 위안부 역사 왜곡 내용 관계자증언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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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a 10-12-24 05:57
   
에휴... 이런거 볼때마다 정말
화딱질 납니다.
태평 10-12-24 07:15
   
과거는 과거라고 생각해요.. 역사속에 두어야 겠지만, 우리 한국사람들 선하니까 증오심 가질 사람은 업겟죠?

요즘 한국이 공자한자 날조햇다 말들이 많은데, 무슨 뜻에서 그런말들이 나오는건진 모르지만, 일본과 중국 몽골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싸우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가까워졌으면 좋겠어요!!!

그전에 북한과 통일해야 겠죠 아시아에 평화와 협력이 공존하라 믿어요..
     
rina 10-12-24 16:00
   
과거는 과거인데 과거 청산도 해야지요.
과거 청산없이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의 일본이 교과서왜곡, 야스쿠니 신사참배, 독도 망언
이런 걸 하고 있는데 과거청산이 됩니까?
과거청산없이
한-일간 평화와 협력은 있을 수 없습니다.
     
10-12-24 18:27
   
너는 무슨생각으로 그런말을 하는거지?
일본정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했어야 한다.
과거는 과거라고? 너가 그렇게 당했다고해도 그런말이 나올까?
과거도 청산할껀 해야한다.
그리고 몽골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는 친하다 무슨근거로 싸운단거지?
일본 중국은 예전부터 싫어했고 사이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역사를봐도 글을읽다보니까 되게 기분나쁘네 은근 비꼬는듯이
간첩의 티가 나는데
객님 10-12-24 08:25
   
동아시아 게시판도 이런 양질의 글이 올라오는군요(제가 표현한 양질이라 함은 대충 싸질러놓는 분란의 게시물이 아닌 설득과 설명을 위한 노력이 담긴 게시물이라는 뜻)
10-12-24 18:23
   
정말 위안부 할머님들 말씀에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여? 우리는 상상도 못하겠죠
생각만해도 치가떨립니다. 저일본넘들의 만행을 나중에는 일본넘들에게 복수할날이 꼭 올거라 믿습니다.
바가사리 10-12-24 22:16
   
저는 보면서 분노에 몸을 떨었습니다...
용서의 힘 10-12-25 03:37
   
즐거운 성탄절 입니다^^ kbs1에서 하는 성탄특집영화 벤허를 봤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진 않지만, “누가 왼쪽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을 내줘라 누가 속옷을 훔치려 하거든 겉옷까지 벗어줘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영화속 대사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용서해줘 제발 용서해줘” “그래 용서했어” 이부분에서 가슴이 아파 오열했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보이실 분이 계신다면 영화 벤허를 보시면 이해하실거라 믿습니다.

늦은 밤 깨달음에 잠못이루며 좋은 성경구절을 찾았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러분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절 보내세요~!!!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누가복음 6:27-38절)
     
후후 10-12-26 16:27
   
역시 기독교는 저하곤 안맞는군요

용서라는건 참회하는자에게나 필요한거지

아직도 나잘났다고 날뛰는넘들어게까지 필요하진 않다고 생각 합니다

님은 그렇게 쉽게 용서가 가능한지 묻고 싶네요
..치가 떨린… 10-12-26 21:18
   
우리 어르신(당시엔 처녀거나 소녀 혹은 유부녀 시겠죠) 들이 저런일을 당했다는 걸  다읽고나 서 치가떨리고 분노에 주먹이 쥐어쥡니다 ,
우익ㅅㅂ 10-12-27 00:01
   
저런 우익단체들은 총살되어야 한다.. 저10새끼들
호야 10-12-28 18:51
   
기독교라고 다 치부하지 마세요..
인터넷에 만나는 사람을 의심없이 순수하게 기독교라 믿으면 기분나쁩니다.
기독교라도 사람이 다다른데 싸잡아서 기독교욕하는 거는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기독교라하면서 속여가며 미친 짓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도 기독교입니다만..
이거 완전 눈물 흘리면서 봤습니다.
물론과거지만 당연히 더러운자신들의 조상과 나라의 행동에 책임과
진심이 담긴 사죄를 해야합니다.
과거라고 말하는것은 피해당한 본인이 말할수 있는겁니다.
함부로 우리가 과거라고 넘기면 안되는거죠.
다시한번 일본의 말도안되는 비열함과 비양심에 치가 떨립니다.

가슴이 아파서 눈물흘리고 분노가 치미는데
본인들은 어떤 고통이었을까요.. 일본은 도대체 언제 선진국에 걸맞는
국격에 맞는 행동과 대답을 보일지 심히 걱정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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