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판 위키에 있는 내용 그대로 가져온 것.
http://ja.wikipedia.org/wiki/%E6%97%A5%E6%9C%AC%E7%B5%B1%E6%B2%BB%E6%99%82%E4%BB%A3%E3%81%AE%E6%9C%9D%E9%AE%AE개요
1910년 대한제국(은)는 「한국 병합니관술 조약」(한일합방조약)에 의해서 일본에 병합 되어 한국 병합, 조선은 조선 총독부의 통치하에 놓여졌다.
일본에 의한 통치 기간은1919해의 3·1 독립 운동까지의 무단 통치기, 그 이후 중일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문화 통치기, 및 중일 전쟁,태평양전쟁(으)로부터 종전에 이르기까지의 전시체제기에 크게 나눌 수 있다. 병합시에 있어서의 조선의 국민경제는 파탄하고 있어, 주민으로부터의 징세도 곤란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병합 후10년간, 소득세를 면제했다. 조선 총독부는 철도로부터 의료까지 한반도에 최첨단의 각종 인프라를
도입해 정비하는 것과 동시에, 교육에도 힘을 써 학교를 다수 건설했다. 조선인의 수명은 성장해 인구는1910년에는1313만명인
것이 32년 후의1942년에는2553만명으로 거의 배증해, 조선인의 문맹퇴치율은1910년의10%로부터 1936해년에는65%까지
상승했다.
신분 해방
통감부하 1909년에 호적 제도를 조선에 도입해, 이씨 조선 시대를 통해서 인간이라고는 보여지지 못하고, 성을 가지는 것이 용서되지 않았었다. 백정 의 천민에게도 성을 자칭하게 해 호적에는 신분을 기재하는 일 없이 등록시켰다.이것에 의해, 신분 개방된 백정의 자제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신분 해방에 반발한 양반은 격렬한 항의 데모를 펼쳤지만, 일본 정부에 의해서 즉석에서 진압되었다.
교육제도의 정비와 문맹퇴치율 향상
조선에서는 1895년의 갑오개혁에 의해 근대 교육제도가 시작되었지만, 1906년의 시점에서도 초등학교가 전국에서 40교미만 (이어)여, 양반의 자제는 서당(으)로 불리는 사숙에서 한문 서적의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관료에 대해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해 왔는가」라고 질책 해, 학교 건설을 개혁의 최우선 사항으로 했다. 이토가 추진한 학교 건설 사업은 병합 후도 조선 총독부에 의해서 계속되어 조선에 있어서의 각종 학교는 1940연대에는1000교를 넘고 있었다. 초등학교도 조선병합 직전에는100교 정도였지만 1943해에는 4,271교까지 증가, 조선인의 문맹퇴치율도 1910해의10%(으)로부터1936해에는65%(으)로 상승했다.
문화 보호
1934년에 조선 총독부는 이씨 조선의 주된 문화재의 보호를 위한 총독부령을 내고 있다. 국보로 지정된 것에는
남대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또, 조선의 민족 문화는 일본의 통치의 시기를 통해보다 성장해, 일본인 학자와 그 조선인의 제자들에 의해서 역사·어학·문학등의 한국학 연구의 기초가 만들어졌다.조림 사업
1910해당시의 조선 전체의 산림 면적은1585만
헥타르 그리고, 전면적의71%에 이르고 있었지만, 목재 자원을 나타내는 임목 축적량은1헥타르 근처17입방미터이며,
2009해의 한국의16.5%수준에 지나지 않고, 특히 남부의 해발의 낮은 저지대에서는 젊은 나무와 벗겨져 산이 대부분이었다. 한반도의 조림 사업은 당초는 하천 보관 유지등의 사방 목적이 주목적이며, 지형 조사의 결과, 한반도는
화강암 대지의 산악 지대에서, 초록이 자라기 어려운 것이 판명되었던 것이 시작으로 되어 있다.삼림이 없으면, 강우로 토사가 흘러들어, 농림업에 영향을 미친다.1924해의
경성 일보에 의하면, 조림 사업은1911해에는 약4센죠,1152만개였지만1922해까지의 누계는 개인의 조림 사업등을 포함하면 약36아라마치,10억본에 이르렀다고 보고되고 있다
경제개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서 고액의 국가 예산을 한반도에 투여했다.철도, 도로, 상수도, 하수도, 전기 인프라, 병원, 학교, 공장 등, 최신예의 인프라의 정비를 실시해, 근대 교육제도나 근대 의료 제도의 정비를 진행시켜 한반도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어 갔다.철도 노선의 부설이나 미츠비시 제철 겸 2포제철소(이)나 일본제철 기요쓰 제철소에 의한다. 제철소의 건설, 일본 질소비의 진출에 의한다. 수력 발전소 건설등이 행해져 조선 총독부로부터의 보조금에 의한다. 1,527건의 농업용 댐과 410건의 수로의 건설, 5억9천만본이상의 식림(이)나 사방댐 건설등의 수리 사업도 행해졌다.이것은, 지금까지의 구미제국에 의한 식민지 정책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