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동북공정의 핵심논리가 바로 '고구려는 대대로 중원왕조의 속국이었고 보다더 엄밀히 말하면
중앙정부였던 중원왕조의 한낱 지방정권에 불과하였으므로 , 고수,고당전쟁은 중앙정부에 반기를 든
반란지방정부에 대한 진압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허나, 고구려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제들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들을 보면
동북공정과는 전혀 다르다.
수와 당이 고구려에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유는 고구려가 지방정권은 커녕 속국이어서가 아니라,
고구려가 너무 강성하여 중국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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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덕[武德] 7년(624년; 영류왕 7년)조
『고조(高祖:이연)는 일찍이 시신(侍臣-측근 신하)에게,
“명분과 실제의 사이에는 모름지기 이치가 서로 부응하여야 되는 법이다.(名實之間, 理須相副.)
고려(高[구,句]麗)가 수(隋)에 칭신(稱臣)하였으나 마침내 양제(爆帝)에게 거역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
짐(朕)은 만물(萬物) 중에 공경받으나 교귀(驕貴)를 피우고 싶지는 않고,
다만 살고 있는 영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함께 힘쓸 뿐이지
무엇 때문에 반드시 칭신(稱臣)하도록 하여 스스로 존대(尊大)함을 자처하여야 되겠는가.
즉시 짐(朕)의 이 심정을 조술(詔述-조서쓰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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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을 건국한 고조 이연이 직접 신하에게 남긴 말이다.
바로 직전 중공의 통일왕조였던 수나라의 문제와 양제가
남북국을 통일하고 돌궐이 동,서로 분열되어 동돌궐의 계민가한이
양제에게 굽신거렸던 상황에 우쭐거리다가 현실판단을 잘못하여
전통적으로 중국의 왕조들을 업신여겨왔던 고구려를 꺽으려 하였으나
결국 고구려에게 대패했던 전례를 교훈삼아
고구려를 자극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그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중국의 속국으로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시종일관 중국을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강적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고구려가 한나라시절부터 선비족 거란 말갈 등을 동원하여
화북지역에 대하여 침탈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위 기록을 남기기 바로 2년전인 무덕 5년에
당고조 이연이 고구려 영류태왕에게 보낸 서신에 보면
"『짐(朕)은 보명(寶命)을 삼가 받들어 온 세상에 군림하매, ...(중략)...
바야흐로 친목을 펴서 길이 우호를 돈독히 하고 저마다 강역(疆域)을 보전하고 있으니,
이 어찌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오. ...(중략)...
(원문: 方申輯睦, 永敦聘好, 各保疆?, 豈非盛美)
이제 두나라가 서로 통화(通和)하여, 거리를 둘 이유가 없기에,...(하략)
(원문:今二國通和, 義無阻異)"라고 얘기하고 있다.
즉, 당고조 이연은 고구려를 당과 대등한 이웃나라로서 서로의 영토를
침범치 말고 잘 지내보자고 영류태왕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고조 이연은 신라사신이 찾아와 간곡히 고구려가 계속 자기들을
공격하니 고구려에 일러 신라공격을 중단하도록 타일러 달라고 간청하자
이에 이연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 공격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고구려는 단박에 거절해 버린다.
그럼, 이번에는 그 아들 당태종 시기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정관(貞觀)] 19년(645; 보장왕 4년) 2월조 기록
『태종(太宗)이 낙양(洛陽)에서 정주(定州)로 옮겨 가서, 주위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다 평정되었으나, 오직 요동(遼東)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의 후사(後嗣)가 사마(士馬)의 강성(强盛)함을 믿고 신하들과 모의하여 싸움을 유도하므로, 전쟁은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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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오직 저 요동 즉 고구려만이 자신들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영류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보장왕이 연개소문과 함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오히려 당으로 하여금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당태종이 언급하는 내용이다.
이번에는 좀더 이른 시기인 수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수양제가 고구려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계획을 발표하면서 신하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삼국사기「고구려 영양왕(26대) 본기 23년(612) 봄 정월」조...
『임오(壬午)에 황제(수양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중략)............
[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중략)............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장자리에서 함께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빼앗고 왕래하는 길을 막아,
죄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쳤으니, 정성을 바치고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미치고, 정절(旌節)이 도달하려면,
번국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의 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래도 참는다면 무엇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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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의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자.
고구려가 수나라의 사신을 맞이할때도
고구려 태왕의 알현을 허락하지도 않고 무시했고
더더군다나 직접 수나라에 내왕하여 수나라 황제를
알현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나라의 변경을 거란과 말갈 등을 동원해
계속 약탈하고 군사행동을 가해오니 수나라의 동북방이
편할 날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제아무리 남북국을 통일한 중국의 왕조라
할지라도 언제나 업신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남북조 시기에는 고조, 고숭과 같은 인물들이 자신의 딸과 여동생을
북위 황제에게 시집보내 황후와 황태후 자리에 오르게 하고
북위의 국사를 좌지우지했었다.
남북국시절에 고구려는 그당시 군사강국이라 자타가 공인하던
북위로부터 북연의 황제와 수많은 백성들을 가로챌만큼 북위를
만만하게 여기고 있었고
북위의 황실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고구려 공주와의 혼인을 위한
사절단을 고구려 국경까지 파견하였으나 약속을 어기고 거절하여
북위 황실을 욕보였음에도 아무런 보복도 하지 못했었다.
뿐만 아니라, 북위가 사신을 고구려 국경에 보내 백제로의 통로를
열어달라고 해도 북위 사신을 북위로 돌려보내 버렸다.
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일 중공의 동북공정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중국왕조의 속국이었다면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중공은 자신들 역사의 씻을수 없는 치욕이었던
수와 당의 수백만대군이 고구려에게 몰살당했던 수치를 말도 안되는
동북공정으로 어찌됬든 감추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