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이 어릴때 그의 아버지 에수가이가 테무친(징기스칸의 어릴때 이름)이 여진족이 강한 이유를 묻자 여진족들이 강한 이유는 본래부터 그들은 타고난 사냥꾼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줌. 이부분은 정확히 옳음.
부여, 고구려, 발해시대의 예맥족들은 유목민족은 아니었으나 활쏘기 하나만큼은 북방유목민족들도 능가할 만큼 최고였기 때문에 주변 대부분의 퉁구스계 민족들은 오랫동안 예맥족의 지배하에 있었고 여진족 또한 본래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던 흑수말갈이 주축이 된 수렵,농업을 겸한 종족들로서 예맥족의 영향때문에 전투력만큼은 초원의 유목민족을 능가할 정도였음.
그리고 발해를 멸망시키고 여진족을 압박하고 있던 거란족의 최정예 기병대 10만을 궤멸시킨 나라가 바로 부여,고구려와 같은 예맥족의 나라 고려.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요나라가 고려에 패배하자 유목민족들도 용맹함과 야만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던 여진족들이 고려에 앞다퉈 귀부해옴. 오죽하면 귀주대첩의 승전기념식을 고려가 수많은 여진족 추장들을 송나라 수도 개봉에 가서 열었을까? 고려가 송나라에 고려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음.
그리고 귀주대첩에서 정확히 100년 뒤에 이들 여진족들이 흑수말갈계 부족인 송화강 이북의 완옌부에 의해 통합되자 고려에 충성하던 함경도 길림성 남부의 여진족들과 전쟁. 이들 친고려파 여진족들이 완옌부와 오야속에게 패배하자 고려가 이들과 싸웠다가 보병중심이던 고려군이 산악지대에서도 신출귀몰하게 말을 타는 여진족에게 대패. 그래서 윤관이 탄생시킨게 기병전력을 강화한 별무반.
고려가 여진족 정벌을 그저 패배한것으로만 대부분 이해하고 있지만, 이건 잘못된 것임.
고려는 두만강 넘어 지금의 길림성 훈춘지방까지 진격하여 동북9성을 쌓고 고려의 직할지화하였으나 여진의 막강한 저항에 고려와 여진 둘다 피해가 막대했음.
그래서 여진족 아골타의 형이 고려에 이마에 피가 나도록 고려에 빌고 또 빌어서 지쳐있던 고려군이 회군한 것임. 그러나 회군할때 여진족 마을에서 수레와 말들을 끌고와 동북9성 축조때 이곳에 이주해온 고려백성들이 돌아갈때 편의를 제공해주고 고려인 할머니를 정성으로 배웅했다는 기록도 나옴.
그리고 고려군의 회군 전에 윤관이 완옌부의 아골타 및 오야소 등등 모든 여진족 추장들을 모아놓고 황토탑을 쌓아 이들에게 고려에 대한 충성맹세를 시키고 돌아갔다고 함. 그러니까 고려가 여진족에게 동북9성을 돌려준것은 직할지로서 이곳을 포기한 것 뿐이지 기미통치로서 이지역의 통치권은 고려가 갖되, 여진족들이 들어와 살라고 허락해준 의미임. 이걸 혼동해서는 안됨.
그러나 고려가 동북구성을 돌려준뒤 불과 2년 뒤에 완옌부의 아골타가 1만의 기병으로 요나라 수십만 기병을 몰살시킨 대사건이 벌어지는데 이것만 봐도 여진땅 깊숙한 곳까지 진격해 동북9성을 쌓고 팽팽하게 접전을 벌였던 고려군의 전력이 결단코 약했다고 볼 수 없음.
그런데 문제는 ㅋㅋㅋ 중공역사의 최약체 송나라의 영웅 악비장군 등등을 줄줄이 꿰차고 있는 징기스칸의 아버지.
과연 징기스칸의 아버지 에수가이가 실제로 한족의 역사는 커녕 그들의 영웅에 대하여 눈꼽만큼이라도 알 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