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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0-02 16:12
[중국] 중국인의 분노는 만주트라우마.
 글쓴이 : 휘투라총통
조회 : 2,593  

“오늘의 중국은 청일전쟁이나 만주사변 때의 중국이 아니다!” 최근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尖閣列島)의 영유권 분쟁과 관련해, 중국의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가 일본을 향해 내뱉은 경고다. 중국 전역에서는 만주사변 81주년(9월 18일)과 맞물려 반일시위가 격렬히 벌어지기도 했다. 이번 반일시위는 중국과 일본이 수교를 한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한다.


청일전쟁과 만주사변의 굴욕

중국인은 청일전쟁(1894)과 만주사변(1931) 때 일본에 참패하면서 엄청난 만행과 굴욕을 겪었고 그에 따른 원한, 분노, 아픈 기억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중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각인되어온 청일전쟁과 만주사변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중국인이 느끼는 굴욕감과 일본에 대한 분노를 잘 이해할 수 있다.

1894년 조선 조정의 부정부패·무능·수탈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 등으로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진압할 수 없던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1885년 일본과 체결한 ‘톈진(天津)조약’에 근거해 일본에 출병 사실을 통고하고 3000여명을 조선에 파병했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청나라에 잠식된 조선시장을 확보하고 세력을 확장해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일소하고 조선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마침 동학농민군이 조선 조정과 화의를 맺고 해산하면서 공동 출병의 명분이 사라지자, 청나라는 일본에 공동 철병을 요청했다.

하지만 청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은 병력을 동원해 서울의 왕궁과 사대문을 장악하고 민씨 정권을 친일 개화파 정권으로 바꾼 뒤 조·청 통상무역장정의 폐기와 조·청 국교 단절을 발표하게 했다. 일본군은 아산만에 주둔 중인 청의 군함을 기습 공격해 침몰시키고, 육군을 싣고 오던 청의 함정도 풍도 앞바다에서 공격해 청군 1200여명을 익사시켰다. 이어서 일본군은 성환과 평양전투, 압록강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랴오둥(遼東)반도의 뤼순(旅順)과 산둥(山東)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대만까지 점령했다.

특히 뤼순 점령 때는 중국인 비전투원과 부녀자 6만여명을 살해, 일본군의 잔학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청일전쟁은 1895년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체결하면서 종결됐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의 독립, 랴오둥반도·대만·펑후(澎湖)열도의 할양, 청나라 세입의 2년 반치에 해당하는 2억냥의 배상금, 최혜국 대우 등이 명시됐다.


중국과 일본의 엇갈린 운명

청일전쟁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 제도·법률·문화·사상 등을 전수하는 등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했다. 그런데 중국은 청일전쟁에 패배하면서 일본에 영토를 빼앗겼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반면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배상금으로 군비를 확장하면서 침략전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중국인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중국은 ‘열강의 반식민지’ 내지 후진국으로 전락했고, 일본은 아시아 최초로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주의 선진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청일전쟁은 분명 중국과 일본의 운명을 상반된 길로 갈라놓는 역할을 했던 셈이다.

청일전쟁이 중·일 양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다면, 1931년 9월 18일 발생한 만주사변은 상처받은 중국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절망감을 심어주고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만주사변은 만보산(萬寶山)사건과 조선에서의 화교(華僑)배척사건, 중국 칭다오(靑島)에서의 일본인에 대한 보복사건, 나카무라(中村) 대위 살해사건 등으로 중·일 민족의 악감정이 증폭되고 일본 군부의 호전성, 세계 경제공황에 따른 일본 내 경제모순과 그에 따른 반발 등이 상호 작용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중·일 삼국이 관련되어 발생한 만주사변은 일본의 대륙침략의 신호탄이자 동북아 민족 모순의 대폭발이기도 했다.

일본군이 남만주철도 일부를 파괴한 뒤 그것을 중국군 소행으로 덮어씌우고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당시,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을 소멸시킨 뒤 외국 침략세력을 물리치겠다는 정책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에 따라 공산당 토벌에 집중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정면 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국민당 정부(난징정부)는 만주를 관할하던 동북군에 대항하지 말고 철군하도록 명령했다. 국민당 정부는 항일 전쟁 대신 국제외교를 통해 일본의 만주 점령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일본은 철군 명령을 거부한 동북항일의용군의 소규모 저항을 물리치고 4개월 만에 만주 전역을 점령한 뒤 1932년 3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으로 내세우고 ‘만주국’을 수립했다. 당시 일본에 대한 두려움, 군사적 열세, 중국 국민의 분열, 내전에 직면한 중국은 무기력하게 일본의 만주 강탈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사변은 중국인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갈등과 대립의 역사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1932~1945)은 중국의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내몽골 동부지역, 옛 러허성(熱河省)을 판도로 삼았고, 면적은 113만㎢(한반도의 6배)에 달했다. 인구는 1942년 기준으로 4446만명이었고, 그중 한족·만주족·회족(回族)·몽골인 등 중국계가 약 4176만명(94%), 조선인이 154만명(3.5%), 일본인이 110만명(2.5%), 러시아인 등 기타 외국인이 약 7만명(0.1%)을 차지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1934년 만주제국(帝國)으로 재편됐고 그에 따라 푸이도 집정에서 황제로 격상됐다.

일본은 만주 침략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해 만주국이 마치 독립국가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황제, 국무원 총리, 각부 장관(大臣), 성장(省長), 현장(縣長) 등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장(長), 만주국 군대나 경찰의 주요 보직에는 중국인을 앉혔다. 하지만 만주국의 최고 통치권자인 관동군이 국정을 총람했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총무청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인은 만주국 권력의 핵심인 국무원·최고법원·최고검찰청 관리의 90%를 차지한 채 국정을 좌지우지했고, 만주국 군경의 지휘권도 가지고 있었다. 만주국 황제는 관동군과 총무청에서 결정한 사항을 추인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 결과 중국인 관리들은 일본인 관리들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양자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주도로 결성된 3만여명의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40년까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이 부대 소속의 김일성도 조선인 위주로 구성된 항일부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의 항일영웅 양세봉(梁世奉)이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혹은 중국 항일부대와 연합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만주국의 항일부대는 일본의 치안숙정공작(治安肅正工作)으로 인해 1940년경 대부분 소멸됐다. 잔존 부대는 소련으로 넘어가 88국제여단(동북항일연군교도대, 88특별저격여단)을 구성하고 재기를 모색하기도 했다.


치욕의 중일전쟁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평정산(平頂山)학살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중국인을 학살했다. 만주의 식량, 지하자원, 노동력을 수탈했다. 일본인 이민용지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일본 국내 경지 면적의 3.7배(만주국 국토 총면적의 14.3%)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토지를 빼앗아 중국인과 일부 조선인의 생존 기반을 박탈했다. 만주국에서는 ‘민족협화(民族協和)’라는 식민통치 이념을 주창하면서도 민족 차별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인은 일본인으로부터 이용 가치를 상실한 ‘하찮고 귀찮은 존재’라 하여 무시당했고, 중국인으로부터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일본인에게 빌붙어 사는 민족”이라 하여 경멸을 받고 있었다.

1945년 ‘얄타회담’ 때의 협약에 따라, 소련은 동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병력 174만명, 전차 5250량, 비행기 5171대를 동원해 만주국의 동·북·서 세 방면으로 전격전을 벌여 창춘(長春)·선양(瀋陽)·지린(吉林)·하얼빈(哈爾濱) 등 동북지방의 거점 도시를 향해 물밀듯이 진격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8월 16일 일본 대본영이 ‘전투행동 중지’ 명령을 내리자, 관동군은 무장을 해제했고 거점 도시는 소련군에 점령당했다. 8월 19일 만주국 황제 푸이는 일본으로 도주하기 위해 통화(通化)에서 비행기를 타고 펑톈(奉天·선양)비행장에 착륙했다가 소련군에 체포되어 전범으로 투옥됐다. 결국 만주국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14년 만에 붕괴됐다.

일본의 중국 침략은 만주사변과 만주국 수립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1933년 러허성(熱河省)을 점령했고, 1935년 이후에는 화북(華北)분리운동을 사주해 화북지방을 장악하려고 했으며, 1937년에는 중국 전역을 차지하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동년 12월 일본군은 난징(南京)을 점령한 후 20여만명의 중국인을 무참히 학살했고 중국 내의 점령지에서 무수한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 기간(1937~1945) 중국군 103만명이 전사했고 시민 1000만명 이상이 희생됐으며, 1945년 당시 기준으로 500억달러 이상의 물적 손실이 발생했다. 일본인은 중국인에게 엄청난 인적·물적 희생과 고통, 치욕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애국주의 교육

아편전쟁 이후 근 100년간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온 중국에서는 민족단결과 중화민족주의(중국에서는 ‘애국주의’라고 지칭함)를 고취시켜 왔다. 게다가 개혁개방 이후 민족주의는 사회주의 이념을 대신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적 이데올로기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중국 정부는 근대 이후 외세의 침략과 이에 맞선 공산당의 헌신적 애국활동 등을 역사 교과서에 기술하거나, 박물관·기념관·역사유적 등을 애국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해 자국민에게 애국심과 공산당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증폭되고 있을 즈음, 중국에서는 만주사변 81주년(9월 18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여느 때처럼 애국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본의 중국 침략과 잔혹한 만행이 부각되고 있었다. 결국 일본의 센카쿠열도 국유화 조치는 만주사변 81주년에 따라 고양된 중화민족주의 및 반일 분위기와 맞물려 중국인의 반일감정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중국인들 자신감 표출

일본 우익세력의 뻔뻔스러운 태도 역시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폭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최근 일본의 지도자들은 1993년 일본군위안부의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와, 1995년 전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총체적인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 무라야마(村山)담화까지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번에 중국의 시위대들은 “잊지 말자! 9·18, 무찌르자! 일본 군국주의”라고 쓰인 일장기를 밟고 지나가면서 일본 타도를 외쳤다. 중국인들은 일본의 움직임을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번 반일시위에서 주목을 끈 또 다른 특징은 “미 제국주의는 세계 전쟁의 뿌리”라고 쓰인 붉은 플래카드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센카쿠열도의 주권 문제와 관련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센카쿠열도가 미·일 안보조약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센카쿠 불똥 한국으로?

공세적이고 기세등등한 중국과 수세적이고 쩔쩔매는 일본! 상반된 두 나라의 모습은 근대 이후 일본에 넘어갔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도권이 다시금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마치 그러한 형세에서는 다수의 조공국(朝貢國)을 거느린 채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전통시대 청 제국의 모습이 연상된다.

“밖에서 뺨 맞고 안에서 화풀이한다”는 속담처럼, 자칫 센카쿠열도 문제로 중국한테 자존심을 구긴 일본이 우리에게 화풀이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센카쿠열도 분쟁에서 전략적 이득을 본 중국이 이어도 문제에서도 유사한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도 있다. 영토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각오와 총체적 대응전략이 요구된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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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gengi 12-10-02 16:49
   
청나라는 중국이 아닙니다.  중국과 관련도 없는 만주를 마치 중국사인것 처럼 왜곡날조시켜 만주사변이 중국의 트라우마라고 중국인들을 세뇌시키는 공작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조선-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한민족의 남북조시대: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26450
위대한도약 12-10-02 16:50
   
정리가 잘 되어 있네요. 구한말의 기득권은 정말 상상하기 싫을 정도의 무능력자들입니다.
민족의 흥망성쇄가 오르락 내리락 하지만 몇천년 역사를 통털어 가장 치욕적이었던 시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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