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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18 23:51
[기타] 한국 고대사 사이트 하나 소개합니다.
 글쓴이 : KilLoB
조회 : 2,851  

관통하는 체계가 있고. 삼국에 대한 기존설과 파격적으로 다르고,(환빠 아닙니다), 근거가 명백하고, 다만 여러개를 관통해야 이해가 될정도로 좀 어려우니. 흥미있는 주제 위주로 찾아보신후, 어느정도 쌓였으면 주욱 읽어보심 아주 좋을겁니다. 

http://www.histopia.net/zbxe/neo

몇개 소개하면

칠지도가 발굴되었습니다. 뭐라 써있나 한 번 보겠습니다.


앞면

(1) 泰(和)四年

(2) (五)月十六日丙午正陽

(3) 造百練鐵七支刀

(4) 出벽百兵

(5) 宣供供侯王□□□□作


뒷면

(6) 先世以來末有此刀

(7) 百濟王世子

(8) 奇生聖音

(9) 故爲倭王

(10) 旨造

(11) 傳示後世



(1) 칠지도에 연호가 적혀있습니다. '태화4년'이면 예측한 대로 일본서기의 칠지도입니다. (和)자는 맨눈으로 안보이지만 일본학계의 X-ray 촬영으로 和자임이 밝혀졌습니다. 칠지도 연호는 칠지도를 안 보고도 예측이 가능합니다. 삼국사기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보셨을 것입니다. 일본서기도 해는 속이지만 달은 속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5세기 일본서기의 기년복원 열쇠가 바로 달입니다.

 

(2) "병오정양"은 漢 · 魏 · 晉 代의 경(鏡)·검(劍)·대구(帶鉤) 등의 명문에서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 즉 기가 가장 왕성할 때 만들어졌다는 길상구입니다. 보통은 5월까지 붙여서 병오정양을 길상구로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음력 5월이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기 때문입니다.  즉 병오정양이 길상구일 경우 ( )속의 달이 5월일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중국 야후에 들어가서 병오정양을 검색하면 '병오'와 '정양'이 세트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부에서 병오를 해석하기를 태화 4년 ( )월 16일에 해당하는 간지의 날짜를 다시 쓴 것이라고 하는 분도 계신데 그렇다면 하필 길상구로 쓰이는 '정양'을 뒤에 붙여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인들에게는 칼 같은 것에 병오정양이 나오면 당연히 좋은 일을 뜻하는 길상구로 연상되지 제조일자로 연상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제조일자라면 ( )월 16일 병오까지만 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병오 뒤에 정양이 따라오면 길상구로 볼 염려가 있는데 왜 하필 병오 뒤에 정양을 붙여 오해받을 일을 하겟습니까? 제조일자를 주장하는 사람은 병오 정양이 검, 경, 대구 등에서 길상구가 아니라 제조일자로 쓰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3) "백련철로 칠지도를 만드니," 논쟁부분이 아니라 지나갑니다.


(4) “출진하여 많은 병사를 막아낸” 전쟁에서 공로를 세웠다는 듯입니다. 다음에는 승전에 따른 논공행상, 즉 신공 46년조에서 준다고 한 보물이 있겠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3세기를 대표하는 주요 역품인 철일 것입니다.


(5) “후왕들에게 만들어 나누어줘라”. 하필 금속제 칠지도를 보낸 목적은 후왕들에게 당시 가장 중요한 교역품인 철의 공급을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후왕은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입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작은 소국의 지배자를 臣智(엄지라 읽음, 엄은 대장, 지는 존칭어임)라고 하는데 이들이 후왕입니다. 약속대로 철 공급이 된다는 듯입니다.

 

作을 칼을 만든 사람의 이름으로 보는 것은 가능성이 없습니다. 왕의 명령이 나오는데 칼 제작자가 나온다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칼을 받는 쪽에서도 주는 사람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지 칼을 제작한 기술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제작자라도 이름을 뒷면 마지막에 쓰지 앞면에 쓰지 않습니다.

 

(6) "선세이래로 이런 칼이 없었다," 논쟁부분이 아니라 지나갑니다.

 

(7) 칼을 보낸 사람이 백제왕세자입니다. 왜 왕이 아니라 왕세자가 외교문서(칠지도)를 보냈을까요? 여기가 칠지도 이해의 마지막 관문입니다. 여기를 이해하면 칠지도를 다 이해했다고도 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소위 삼국지 동이전의 진왕제 관련사항입니다.  그 이유를 이해한 사람은 일본서기를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8) '신분이 고귀한 엄들의 지배자." 奇生은 출신이 다르다는 뜻의 길상구입니다. 

 <대한화사전>을 찾아보면 奇生은 "진귀하게 생긴다"라는 용례가 있습니다. 즉, 馬融의 <長笛賦> 주석을 보면 向曰: "奇生謂生奇質也"라고 나옵니다. 向은 한나라 학자인 劉向입니다.

 

聖자는 확실하고 音자도 확실합니다. 晋자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晋자는 위에 꼭지가 없기 때문에 아닙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소국들의 통치자가 臣智(엄지)입니다. 우리 말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엄지손가락은 대장손가락이라는 뜻입니다.  

 

삼국지에 의하면 엄(臣)들의 지배자는 목지국을 통치하였다는 진왕입니다. 목지국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학설이 있으나 금강유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그 근원은 천관우 선생님의 '미추홀의 한자음역'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즉 '미추=목지'라는 뜻으로서 비류가 건국하였다는 미추홀이 3세기 중반까지 존재하였고 진왕이 있었습니다. 만일 미추홀이 온조왕대에 멸망했다면 건국신화를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건국서문에서 비류가 세운 미추홀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는데 백제에 부여씨가 등장하기 직전에 멸망하였습니다. 백제본기에 부여씨가 등장하는 것은 영락 17년(407) 2월입니다.

 

(9) "고로 왜왕이 되니," 고대 동양의 외교문서에서 爲자를 '위하여'로 쓴 경우는 한번도 못 보았습니다. 爲자는 아무 때나 쓰는 글자가 아니고, 본래 외교문서에서 책봉할 때 쓰는 글자입니다. 몇개만 예를 들겠습니다.

 

○원가 15년, 倭國王<珍><安東將軍>

○원가 28년, 倭王<濟><安東大將軍>

○동성왕 6년, 高句麗<巨璉><驃騎大將軍>

○國人便共立 <伊夷模><王>

○牛加兄 子名<位居><大使>

○其子<依慮> 年六歲 立以<王>


爲자 앞에 보통은 누구를 책봉한다는 목적어가 있으나 목적어 없이도 씁니다. 목적어가 없이 쓰인 경우는 '왜왕이 되니' 또는 '왜왕으로 책봉하니'로 읽는 것이 합당합니다. 칠지도를 받는 사람이 이미 왜왕이었기 때문에 임명한다기보다는 인정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뭐하러 故자를 중간에 넣었는가는 故자를 빼고 보면 간단합니다. "<기생성음>爲<왜왕>"이 되어 엄들의 지배자인 기생성음을 왜왕으로 책봉하였다는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칠지도를 발견한 사람이 고의로 일본에 불리한 글자를 일부 훼손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다고 봅니다. 제가 만일 글자 하나를 지운다면 외교문서에서 책봉을 의미하는 爲자를 지웠을 것입니다.

 

(10)  旨造의 旨는 '천자의 뜻 또는 명령'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즉, 상관의 명령 또는 의향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造는 단순히 '만들다'는 뜻도 있지만 '받들다,' '세우다,' '따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앞에 있는 旨와 함께 쓰이면 '무엇을 만들다'는 뜻이 아니라, '명을 받들다' 또는 '뜻을 받들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  [漢書] 奉使稱旨 (旨는 왕의 뜻으로 쓰임). [宋書] 依旨奉行 (旨는 상관의 명령으로 쓰임).

 

(11)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 명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생성음이 왜왕보다 훨씬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칠지도는 삼국사기의 공백지대에서 왜국으로 건너간 것이기 때문에 백제본기에 나올 수 없습니다. 만일 삼국사기의 백제가 보낸 것이라면 그 정도의 외교적 비중이 있는 사건은 반드시 삼국사기에 나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왜국은 영락 6년에 잔국이 토벌되고 난 다음해(397)에 출현합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그 전에는 왜국이 한반도에(삼국사기의 공백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본기에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신라본기의 왜국은 임나가야입니다. 좀 더 상세히 쓰면 구주를 포함하는 가야문화권입니다. 비미호의 왜국은 가야문화권으로서 구주에 있었습니다.

 

백제본기의 왜는 본래 백제입니다. 칠지도를 보낸 것이 바로 그들입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백제였을 때 보낸 칠지도를 나중에 자신들이 왜국에 건너가서 찾은 것입니다.


삼국사기로 보는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391년)조

광개토왕비문은 396년의 잔국토벌 명분을 391년에 적고 있다. 이는 잔국토벌의 전쟁이 39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를 보면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392년부터 성을 뺏고 있어서 두 사료가 일치한다

而倭以辛卯年(391년)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이 신묘년조란 4세기 말에 왜가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부리고 있다는 뜻인데 이게 사실인지 이에 해당하는 내용을 삼국사기에서 찾아보자. 삼국사기, 특히 고구려본기가 아니라 백제본기와 신라본기가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위 기록은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맨 앞에 나오는 [건국서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비류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 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고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즉 비류의 백제가 망한 직후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는 뜻인데, 비류의 백제는 영락 6년, 10년, 17년에 고구려의 3차례 공격을 받고 망했으므로 영락 17년에 백제에 부여씨가 등장하였다는 뜻이다. 영락 17년의 전투는 한반도 남단으로서, 고구려 보기군단이 한반도 남단까지 신속하게 이동하려면 강을 건너는 일이 가장 중요하므로, 강물이 어는 겨울 11-12월에 보기군단을 출동시켰다고 판단해야 한다. 과거 342년에 전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강물이 어는 겨울에 출발하였다. 그렇다면 영락 17년의 전투는 고구려 보기군단이 한반도 남단에 도착한 직후인 1월(음력) 수밖에 없고, 부여씨는 백제에 2월에 나타나야 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검색해보면 백제에 최초의 부여씨가 나타나는 것이 다음의 기록이어서 광개토왕비문과 일치한다.

전지왕 3년(영락 17년),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須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영락 17년 2월에 대규모 인사가 단행되는데, 부여씨가 나타나자마자 이전 백제의 양대 지배성인 해씨와 진씨를 단숨에 뛰어넘어 수상격인 내신좌평에 임명된다. 백제본기는 이들을 모두 왕족으로 연결시켜 백제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후 곧 여신은 상좌평이라는 최고관직을 만들어 이에 취임한다. 부여씨가 백제의 실질적 주인이 된 것이다. 최초로 등장하는 성씨가 어떻게 백제의 왕족이 되고 단숨에 최고관직을 차지할 수 있는가?

영락 6년과 영락 10년의 일본서기는 대규모 이민을 기록하고 있으나 영락 17년에는 대규모 이민은 없고 단 하나의 기록뿐이다.

응신천황 39년(407년) 春二月。百濟直支王 遣其妹<新齊都媛>以令任 爰<新齊都媛>率七婦女而來歸焉。

이는 영락 17년에 등장한 여신이 이전의 삼한백제(광개토왕비문의 왜=비류가 세운 백제) 왕족으로서 영락 17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왜국으로 건너가는 대신에 한성백제와 결합한 것이다. 이미 왜국은 응신(마한지역 통치자)계와 인덕(변진한지역 통치자)계가 주축이어서 마땅히 들어갈 곳도 없었던 것이다. 즉, 광개토왕비문의 왜 세력이 영락 17년 2월에 한성백제의 실질적 주인이 된 것이다. 

이후 한성백제의 왕통이 구이신왕으로 끊기고 부여씨 출현 후 20면 만에 비유왕이라는 백제의 새로운 부여씨 왕통이 등장하는데, 이때부터의 백제는 광개토왕비문의 백잔이 아니라 왜이다. 즉 427년 비유왕의 즉위를 경계로, 실질적으로는 407년 부여씨의 등장을 경계로, 백잔에서 비문의 왜로 변모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는 온조의 아버지인 동명조에 제사지내는 시기가 끝나고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조(구태조)에 제사를 지내게 된다.

* 일본서기에는 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없다. 또한 집필형식은 중국식 천자국을 흉내냈으면서도, 정작 천자국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의 하나인 祭天地(祀天地)만큼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에 백제본기를 보면 백제는 祭天地(祀天地)를 하였다.

백제가 백잔 시절이었을 때의 왜와의 관계는 잔지왕 14년조에서 보듯이 왜의 담로국이었다. 즉, 신묘년조의 백잔 부분이 맞다는 뜻이다.

전지왕 14년(418년)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http://histopia.new21.org/zero/zboard.php?id=neo&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재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73

이런 기록이 왜국이 한반도에서 백제였을 때는 아주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삼한사가 탈락될 때 모두 빠졌다. 이 기록은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인데, 418년 당시에는 담로관계라는 개념은 이미 사라지고, 왜국왕이 백제왕의 누이와 결혼하니 신부측의 입장으로 당연히 축하예물을 보내는 정도이다.

비유왕 2년(428년)을 끝으로 왜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비유왕은 과거 광개토왕비문의 왜왕(백제 진왕) 자격으로 대대적인 구 삼한백제제역 인수에 나서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방 세력에게 선물을 내려주어 회유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웅진천도 이후에는 동성왕의 무진주 무력시위에서 보듯이 직접통치에 나서게 된다. 

5세기 초중반에 백제가 행한 지방세력 회유는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1. 충남 서산 음암면 금동모; 5세기 초중반 추정
2. 충남 공주 수촌리 금동모; 5세기 초반 
3. 전북 익산 입점리 금동모; 5세기 중반 
4. 일본 구주 구마모토(熊本) 후나야마 고분 금동모; 5세기 중반 추정

발굴된 것이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사서에 기록이 안 될 리가 없다. 본래의 백제사료에는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이 있었겠으나 구 삼국사 편집시 모두 사라지고 단 하나만 남았다. 그 지방 세력은 다른 지방 세력과 다르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새 광개토왕비문 왜(삼한백제)의 통치자가 자신의 지방세력에 대한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비유왕;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 왔다.

5세기까지도 백제의 입장에서 신라는 백제의 지방세력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4세기 말에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는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

461년에 백제의 정로장군이자 좌현왕이었던 곤지가 왜국으로 간 문제에 대하여 여러 논문이 나왔지만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내에서 나온 논문으로는 연민수의 논문 “5세기 후반 백제와 왜국-곤지의 행적과 동성왕의 즉위사정을 중심으로”와 이재석의 논문 “5세기말 곤지의 도왜 시점과 동기에 대한 재검토,”  문경현의 "백제 무령왕의 출자에 대하여" 등이 있다. 이 논문들은 누구나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볼 수가 있다.

일본사료는 곤지에 대하여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경우가 없고 반드시 뒤에 君이나 王자를 붙여 호칭한다: 軍君(일본서기), 昆支君(백제신찬),  昆支王(일본서기), 琨지王(신찬성씨록). 심지어 곤지신사도 '곤지왕 신사'이다. 그는 왜국에서는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사료는 곤지를 장군이나 왕의 동생이나 내신좌평으로 호칭하지 왕으로 부르는 일은 절대 없다. 좌현왕이란 뜻도 왕이 아니라 왕 바로 다음이란 뜻이다. 그는 백제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좌현왕은 본래 중국식이 아니라 북방식 흉노/선비계 호칭으로서 주로 병권을 담당하는 위치로서 선우(왕)에 이은 제2인자가 받는 호칭이었다고 한다. 백제가 북방식 문화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국가행정조직에까지 적용한다는 것은 그들과 충분히 많은 접촉이 있었으며, 또 북방계와 관계가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흉노/선비계와 많이 만날 수 있는 곳, 즉 요서를 비롯한 중국대륙의 동북부에 백제가 장기간 있었다는 증거 중의 하나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곤지가 일본서기의 웅략천황이자 송서의 왜왕 武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를 다시 찾아 올라가면 일본서기의 기년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http://classnet.hongik.ac.kr/~home/hbbs/content.php?table_id=135&msg_id=120&order=search&cur_page=1&keyword=웅략&search_option=msg_subject

또 이력서를 죽 언급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등 전체적으로 추도문 형식인 武의 국서는, 宋 順帝 昇明 二年(478년), 최근에 그의 신변에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그에 대한 학계의 기존 학설을 돌아보기로 하자. 우선 시작하기 전에 곤지는 문주의 동생이 아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곤지는 왜국에 건너갈 무렵에 나이는 40세 정도였고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동성왕은 30대 중반에 즉위하는데 문주의 아들인 삼근보다 적어도 20살 이상 나이가 많다. 오히려 무령왕이 삼근왕과 비슷한 동년배이다. 따라서 곤지가 문주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자세한 설명은 네티즌 고대사를 참조) 

1) 문주-삼근 왕통

중국사서가 모도라 부른 문주를 개로왕 국서에 나오는 보국장군 여도로 보는 학설도 있으나  문주왕과 삼근왕은 신라계인 모씨로 보아야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간다. 곤지의 아들인 동성왕(여대)은 물론 부여씨이다. 개로왕이 송에 보낸 국서를 보면 최고 관직이 우현왕과 좌현왕인데 여기에 ‘여기’와 ‘여곤’이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여도’는 이름으로는 4번째이고 등급은 그 아래 급인 보국장군에 임명되는데, 문주가 여도이고 곤지의 형이었다면 이렇게 거꾸로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주와 곤지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한 관계이다.

宋 大明 2년(458년), (백제왕 부여慶) 遣使上表曰, 臣國累葉 偏受殊恩 文武良輔 世蒙朝爵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 等十一人 忠勤宜在顯進 伏願垂愍 並聽賜除
최고 관위: 仍以行冠軍將軍 右賢王 1<餘紀> 為冠軍將軍, 以行征虜將軍 左賢王 2<餘昆> 行征虜將軍, 
아래 관위: 3<餘暈> 並為征虜將軍, 以行輔國將軍 4<餘都> 5<餘乂> 並為輔國將軍, 以行龍驤將軍 6<沐衿> 7<餘爵> 並為龍驤將軍, 以行寧朔將軍 8<餘流> 9<麋貴> 並為寧朔將軍, 以行建武將軍 10<于西> 11<餘婁> 並為建武將軍 - 宋書 百濟傳

김부식이 혼란을 일으킨 이유는 그가 본 고기에는 백제에 문주-삼근의 모씨(신라계) 왕통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개로왕과 동성왕 사이가 그냥 혼란기로 공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제인은 문주-삼근에게 부여씨를 주어 정식 왕력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는 4세기 이전 백제 진왕의 왕통 중에 소국 출신으로 국난극복에 공을 세우고 이로 인하여 왕이 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을 준다.

2) 5세기 백제인의 나이 세기

무령왕이 461년에 태어났는데 그의 지석이 523년에 62세로 崩하였다고 하므로 당시의 백제인은 태어나면 1살이 아니라 0살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통용법이었는지 아니면 왕실의 장례와 관련되어서만 사용된 통용법인지는 알 수 없다.

3) 곤지의 도왜 이유 

1. - 청병사설

일본학계의 구 학설은 왜국에 고구려에 대항할 군대를 청하기 위해 온 청병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곤지가 건너간 461년은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아주 심각한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장수왕도 백제가 북위로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하기 전까지는 백제를 토벌할 생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또 곤지가 건너간 이후에 왜국 군대가 움직였다거나 혹은 백제와 합동으로 군사훈련을 하였다던가 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다. 혹자는 곤지가 청병에 실패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왜국에 정착하였다고 하나, 곤지가 가족을 모두 대동하고 가는데 이것은 이미 이민과 같은 장기체류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맞지 않다. 결론적으로 일본학계에서 곤지의 청병사설은 사라졌다. 

참고로 아래는 KBS 역사스페셜 무령왕편 대본이다. 일본학계에서는 사라진 청병사설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을 주민 인터뷰: "매년 제사 지낸다 유명하고 훌륭해서 마을 전체가 제사를 드린다. 1년에 한번.10월 16일 장식 수레도 끌고 관음을 불러서 제사를 드린다"
-신사 목조20 아스카의 조상신으로 모셔져 있는 곤지. 이 신사와 곤지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유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xxx 인터뷰: "이곳의 제신이 그 유명한 곤지. 이것은 곤지의 기반이 일본 열도내에 구축이 돼 있었고, 일본에 있는 왜 조정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왜군 동원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파견이 된 것이다"

2. - 백제이민 관리자설

청병사설 후에 나온 것이 왜국에 정착한 백제 이민관리자설이다. 백제인을 조직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직후에 와국에 간 백제유민들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는 흔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맞춘다면 이는 맞다고 생각한다. 당시 왜국에 백제인 아닌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제인을 관리한다는 말은 왜국을 관리한다는 말이나 같다. 

왜국에 나간 유민들의 관리 때문에 백제의 제2인자가 왕권을 포기하고 왜국에 장기체류한다는 것은 상식상 맞지 않는다. 누구도 가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라면 백제의 제2인자가 갈 필요가 없다. 또 행정문제이면 행정전문가를 보내면 되지 백제의 병권을 담당하는 좌현왕이 갈 이유가 없다. 왜국에서 볼 때도 하필 병권을 담당하는 장군출신이 온다면 반가울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그렇다. 어떤 책을 보니 곤지가 기내지역의 실력자로서 웅략천황을 도와 백제-왜 관계를 돈독히 했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웅략은 자신에게 조금만 거슬려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사는 지역에 어떤 실력자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며 1-2년도 아니고 17년(461-477)이나 함께 동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다. 당시 왜왕이란 기내지역의 실력자를 뜻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내지역에서 17년동안이나 왕을 칭하고 사는 실력자이면 그가 바로 왜왕인 것이다. 

3. - 나제동맹 후원설

그래서 다시 나온 것이 나제동맹 후원설이다. 동성왕 이전인 5세기 중반의 개로왕 시절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하여 힘쓰고 그 결과 백제에 기울게 된다.    

눌지마립간 39년 (455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때 신라본기를 보면 왜가 계속 신라를 공격한다. 그래서 공격하지 말라고 왜국에 청하러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본기의 왜는 대부분의 기록이 한반도의 가야기록이지 일본열도의 왜가 아니다. 당연히 곤지가 가도 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은 계속된다. 나제동맹을 위하여 백제의 제2인자가 모든 가족을 데리고 왜국으로 이민 간다는 것은 정황상 맞지 않는다. 왜국에 요청하는 정도이면 바로 다녀오지 이민 갈 이유가 없다. 또 5세기 중반의 신라는 백제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신라가 백제에 대항할 정도가 되는 것은 이로부터 백년이 더 지난 6세기 중반부터이다.

4) 곤지의 신임장

곤지의 도왜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의문이 왜 곤지가 왜국으로 떠날 때 하필 백제왕(개로왕)의 후궁을 요구하였느냐 이다. 나는 아직까지 이에 대한 답변을 본 일이 없다. 이것은 한의 소국들이 혼인관계로 엮어진 담로제도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담로제로 국가를 통치하던 韓이 멸망하고 그들이 왜국으로 건너가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제 왜국에 가야하는 곤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무엇을 가지고 가야 과거 韓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최선은 백제왕과 혼인하는 것이다. 곤지는 백제왕의 전권을 위임받아 간 것이다.

곤지는 461년 7월에 도왜하고, 그해 8월부터 왜국의 지배층을 모두 숙청한후, 11월에 왜국 왕에 즉위한다. 자, 이제 어떻게 되었는가 보자. 왜국왕실은 백제왕실과 여인을 통하여 인척관계를 맺은 것이 아닌가? 즉, 담로국이 된 것이다. 따라서 개로왕의 후궁이었으나 곤지가 데려간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 곤지의 아들(백제신찬)도 되고 개로왕의 아들(일본서기)도 된다. 또 여기에는 좌현왕이란 백제 명칭이 보여주듯이 담로제에 선비족 풍습이 가미되었을 가능성도 가진다. 

개로왕이 무령의 어머니를 곤지에게 주었기 때문에 무령왕은 개로왕의 혈통이나 법적으로는 곤지의 아들이다. 또한 무령은 곤지의 신분을 만들어준 사람이므로 나이와 무관하게 곤지의 가장 중요한 아들이 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곤지의 아들이 동성이고, 동성의 아들이 무령이라 해서, 무령을 개로 계열이 아닌 곤지 계열로 입적시키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가 개로왕이 무령의 어머니를 곤지에게 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5) 곤지의 죽음

477년 5월에 흑룡이 날고, 7월에 곤지가 죽는데, 이를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해구가 죽인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신하(내신좌평)와 신하(병관좌평)가 싸우는데 삼국사기에 흑룡이 날지는 않는다. 이는 전혀 잘못된 해석으로 곤지가 문주를 몰아내고 백제왕이 되려하자, 문주를 도와 곤지의 난을 평정한 구 왕족 해씨가 자신에게 후계가 돌아오지 않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자세한 설명은 네티즌 고대사를 참조할 것)

역사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백제의 병권을 담당하던 인물이 왜국에 도착한 직후에 왜국에서 정권이 바뀌어 왜왕 무가 들어서고, 그 병권을 담당하던 인물이 백제에 돌아와 죽은 직후에 또 왜왕 무의 추도문이 온다면, 당연히 혹시 그가 왜왕 무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것이다.

6) 동성왕의 즉위배경

일본학계는 병환이 중하여 국사를 보지 못하는 웅략이 곤지의 2자인 동성을 불러다 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제왕으로 임명하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른바 "왜국왕에 의한 백제왕 冊立설"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최고 권력자가 아무런 국사를 못 본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당시 웅략(곤지)은 개로왕 사후 백제왕이 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실패하여 이미 죽고 없었다. 그리고 왜국은 동성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추도문 형식을 띤 왜왕 武의 국서는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동성왕이 대신 보낸 것이다. 왜국은 웅략(곤지)의 시신이 돌아오자 그의 죽음을 숨겼던 것 같다.  

어떤 책을 보니 동성왕이 즉위할 때 10대 초중반의 어린 나이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생몰연대가 확실한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더 나이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 근거를 보니 백제신찬이 무령왕을 말다왕(동성왕)의 '異母兄'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구절은 무령이 동성의 이모형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동성이 무령의 이모형이라는 말인지 해석하기에 따라 애매한 점이 있다 : 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麻王 是混攴王子之子, 則 末多王 異母兄也(즉, 말다왕이 이모형이다)


또 일본서기 웅략 23년조를 보면 "幼年聰明"이라고 하였는데, 유년이란 보통 10대 초중반을 뜻하므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없다. 당시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웅략이 곤지가 되면 '네티즌 고대사'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동성왕의 생몰연대를 거의 정확히 뽑아낼 수 있다.

삼근왕이 어려 즉위한 까닭에 곧 실각하는데 이를 이어 20년이나 재위한 동성왕도 어려서 즉위했다는 것은 상식에 위배된다. 또한 동성왕은 장기간 백제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실권을 행사하며, 그의 정책은 위기상황의 백제를 이끌고 가는데 아주 노련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역시 그를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어린 왕에게 적용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동성과 무령은 모두 20년 이상 장기 재위하였으며 순서가 동성이 앞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 아버지로 기록된 동성이 아들로 기록된 무령보다 한 살이라도 나이가 많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문주의 신라계 모씨왕통은 기반이 약해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고, 이전의 해씨 왕통도 해구세력이 몰락하자 더 이상 왕위를 이을 수가 없었다. 고이왕 이후 한성백제의 지배세력이었으나 근초고왕 이후 解씨에게 왕권을 뺏기고 물러났던 眞씨는 부여씨를 지지했다. 개로왕의 왕자들이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모두 죽은 마당에 부여씨 왕통의 설립자인 비유왕의 후손으로서 왕위를 받을 혈통은 16세의 어린 무령(삼근보다 3살 연상임)과, 대부분 20-30대이던 장성한 곤지의 다섯 아들들뿐이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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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12-11-19 08:16
   
morning을 뜻하는 고대 조선의 단어=아사=부여어=고구려 백제 지배층이 썻던말≠아침=한국어=남방삼한농경구폐음현상(받침이 많고 입이 다물어지는 현상)=삼국 농노들의 말

우물안 개구리 바보들에게...
 
한반도 장구형고분의 당사자 족속들은 부여일본어 했고

동원된 노비인력들은 삼한한국어 했음이 명백한 사실이 아니고 억측이라고?

파탄난 교육현실...
     
보숑숑 12-11-20 02:15
   
님 글을 읽으면 고담덕, 해모수  그리고 지배층들은 "아리가또","스미마생"하고 다녔다는 이야기임...그런것임??..ㅋㅋ. 생각만 해도 웃긴다... 고담덕이.. "빠가야로" 소리치고 "기무치"말하고.. 대박이다.ㅎㅎㅎ. 완전히 개콘 저리가라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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