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사에 있어서 저명한 세계적 학자인 개리 레저드는
일본학계나 한국학계가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고대 유물 유적 분석을 통해
고대 동북아시아의 실체를 밝히려고 노력한 학자입니다.
이분에 대해 궁금하시면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세요.
근데 이분이 오랫동안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오면서
내린 결론은 " 고대 한반도사람들이 일본을 정복했다"입니다.
특히 일본보다 시대가 100~200년이나 앞서는 발달된 철제무기와 기마문화를
가진 경남지방의 가야인들 중 일부가 어떤 이유로 4~5세기경 일본열도로
건너갔는데 이들이 바로 왜국을 무력으로 점령한 그 주인공이라고 주장했죠.
(바로 그 어떤 이유란 다들 잘 알다시피, 광개토태왕의 보기5만대군에 의하
임나가라 멸망이 그것입니다.)
그 증거로 열도보다 시기가 100~200년이나 앞서는 경남지역에서 출토된
철제 갑옷과 무기 마갑들을 들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스에키토기라고
매우 높은 고열에서 달군 예술적 토기 등등 발달된 가야문화가 함께
열도로 건너갔다고 하죠.
일본이 종교처럼 떠받들고 싶어 끝까지 몸부림치는 임나일본부설이
현재 일본에서조차 허황된 조작이라 얘기되고 있는 이유는
이 주장을 입증할 고고학적 증거가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기록으로도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를 극명히 보여주는
중국사서의 문헌이 존재하는데
바로 「後漢書」에 "倭王이 生口(생구:사람) 160명을 가야에 받쳤다.(보냈다)"는 기록이
그것인데, 가야사의 최고 권위자 중 한분이라 할 수 있는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이를 가야가 철정과 철제품의 대가로 왜인들을 대거 傭兵(용병)으로 고용했던 것으로
보고 계시죠.(말이 용병이지 노예군사라 보시면 정확합니다. 북방의 맹주 강력한 고구려군이
낙동강 유역에 진주하게되자 부족한 군사력에 시달리는 가야세력은 화살받이로 왜인들을
데려다가 앞세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더구나 당시 진한사람들은 변한지역 가야소국
들에 대한 나쁜 감정때문에 저들을 가라인으로 부르기보다 그들의 앞잡이 노예병사인 왜인들에
촛점을 맞춰 그냥 가야인들을 왜인이라 싸잡아 멸칭했다고 보여집니다.)
자, 대성동고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경남지역 예안리에서 발굴된 고인골을 토대로 복원한
가야병사의 두유형 사진을 비교해 보세요.
둘다 똑같이 임나가라의 속지였던 지금의 예안리에서 발굴된 고인골들이지만
하나는 전형적인 북방계이고 오른쪽은 전형적인 조몬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둘다 가야병사의
투구와 복식을 하고 있습니다.
가야에 이러한 죠몽인들이 보이는 이유는 아래서 설명하겠지만
가야의 필요에 의해 일본열도에서 끌려온 왜인 노예병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임나가야 등 변한지역의 여러 가라소국들과 낙동강 지배를 두고
수백년간 끊임없는 전쟁을 벌여온 진한의 맹주 사로국(신라) 관련 삼국사기 기록에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는 기사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입니다.
왜가 주체라서 신라를 침공했다가 아니라 임나가라를 중심으로한 가야연맹체가
그 주체였지만 부족한 노동력과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왜인들을 앞세웠기 때문에
가야를 멸시하려는 멸칭으로 신라인들이 가야를 왜로 얕잡아 불렀기 때문에
훗날 고려시대 인종때 김부식이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말해, 당시 왜는 가야에 수출할만한 변변한 토산물이 없어
가야에서 철정을 수입하는 대신 노예들을 진상 내지 팔거나 했는데,
문제는 고대사회의 한 정치체에서 다른 정치체에 생구를 판다는 것은
곧 둘 사이에 국력의 힘에 따른 위계질서가 존재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는 가야가 왜를 하위의 존재로 대했다는 것이죠.
아무리 가생이가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 생각을 적는 공간이라지만
적어도 게시판 도배해서 물의를 일으킬 정도라면
최소한 이정도 객관적 팩트를 가지고 주장을 하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