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가 생기지만 잘모르겠다는 분들은... http://www.histopia.net/zbxe/neo 서 백제사 검색해보시길
1. 한국고대시대 일반적이었던. 지방국들의 피라미드모양 연합체인 "담로제-진왕제"의 실체에 대해 알아야
2. 백제 개로왕 동생이자 참모총장?이었던 곤지가 왜국에 건너가서 무슨짓을 했는가. - 다죽이고 왜왕이됨
그 과정의 백제왕녀(개로왕 후궁?)와 결혼은 담로제하 무슨의미인가?를 알아야- 간단히왕이될수있는자격
3. 광개토비에 나오는.. 백잔과. 잔국의 구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잔국은 어디로 도망갔나, 왜왕의 실체
4. 동성왕은 곤지의 아들
등을 알고 다시보시면 더 쉽게 이해가 될겁니다.
영산강유역에는 원형분, 방형분, 사다리꼴 무덤, 무덤 주위에 도랑파고 물 채우는 풍습, 무덤에 도자기 넣는 풍습 등등 당시 왜국에서 유행하던 전방후원분의 재료가 되는 여러 가지 유적이 흩어져 있으나 왜국과 거의 똑 같은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 것은 5세기 후반이다. 이들은 토착민이 아니고 이주민들이다. 이 무덤의 주인들이 외부에서 왔으리라는 것은 위치가 영산강유역의 중심부인 나주일대가 아니고 함평, 해남, 고창, 광주 등 외곽이란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세기 후반에 상당한 세력이 몰려와 영산강유역 주변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은 이들 장고분의 출현시기가 정확히 475년 웅진천도 직후라고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민 오면 죽어서 묻힐 때까지 한세대가 걸리므로 5세기 후반에 유물이 나타나면 이민은 5세기 중반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도 고고학자들이 어떻게 웅진천도 직후라고 하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단지 고고학을 믿는다면 웅진천도 직후에 왜국에서 온 세력가들이 여럿이 한꺼번에 죽어서 이곳이 묻혔다는 뜻이다.
과연 웅진천도 직후에 왜국에서 어떤 세력가들이 한꺼번에 왔을까? 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꺼번에 여럿이 죽었을까?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개로왕 21년(475); 9월, (수도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폐허화된 후) 문주가 조미걸취와 목협만치 등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5백년만에 금강유역기록 출현
◊문주왕 3년(477); 4월,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했다. 5월, 흑룡이 웅진에 나타났다. 7월, 곤지가 죽었다.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가 고구려에게 공격당하자 곤지(웅략천황)가 구원군을 보낸다. 그 구원군의 지휘관들이 조미걸취와 (일본서기에도 나오는 당시 왜국의 고관이던) 목협만치다.
그리고 477년 4월이 되자 곤지를 필두로 왜국 세력이 대거 귀국하게 된다. 곤지는 백제왕이 되기 위해서 왔는데 와보니 문주가 왕이 되어 자신에게 내신좌평을 내리는 것이었다. 한달만인 5월에 내란이 벌어졌으나 3개월만인 7월에 곤지세력이 패하고 그들의 대표자인 곤지가 죽는다. 곤지뿐만 아니고 조미걸취와 목협만치를 비롯한 왜국에서 건너온 세력가들이 이때 다 죽거나 도망갔을 것으로 보인다.
곤지의 시신은 자신이 통치하던 왜국으로 후송되었으나 조미걸취와 목협만치를 비롯한 나머지 대부분은 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백제에 묻혔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는 한강유역에 묻힐 수도 없고, 자신들이 패한 금강유역에 묻힐 수도 없다. 그러면 어디로 가 묻혔을까? 이들이 권력투쟁에서 지고 피신한 곳이 어디였을까?
곤지의 시신이 왜국에 도착하자 당시 왜국을 통치하던 곤지의 아들들이 478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왜왕 武의 국서이다. 이후 문주왕도 내란으로 죽어 문주의 나이 어린 아들이 삼근왕으로 즉위하나 백제는 계속 혼란에 빠진다. 그러자 다시 왜국에 남아있던 곤지 세력들이 대규모로 군대와 각료들을 이끌고 백제로 돌아와 마침내 백제를 장악하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곤지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동성왕이다.(첫째 아들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네티즌 고대사" 제5부를 참조하기 바람)
동성왕을 따라 곤지세력의 주력이 귀국하고 남은 세력들은 동성왕의 동생인 백발을 왜왕(청령천황)에 세우고 통치하였으나, 5년 만에 동생(청령천황)이 죽고 왜국의 권력은 곤지 이전의 구 집권세력들에게 돌아간다. 이때 몰락한 곤지계 역시 왜국 내에서 마땅히 피신할 곳이 없었을 것이므로 바다를 건너 백제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이들 역시 자파세력이 미리 건너와 자리를 잡은 영산강유역 외곽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유역에서 동성왕이 즉위한 후 백제왕실은 전방후원분이 아니라 아니라 이전의 비유왕-개로왕으로 이어지는 부여씨의 전통적인 소형 석실묘제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498년 동성왕의 무진주 출병 이후에는 영산강유역도 이전의 고유 묘제로 서로 경쟁하는 대신에 금강유역을 따라 소형 석실분을 쓰게 되고, 또 중국 사서에서 백제의 고위 관리가 머리에 꽂았다는 은으로 만든 꽃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서로간의 경쟁을 접고 백제의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사료와 고고학이 일치할 때 희열을 느낀다. 5세기 후반 웅진천도 직후에 왜국에서 백제로 들어온 대규모 세력이 있었으며, 그들은 마침내 백제의 왕권까지 장악했다. 그러니 왜국에 있을 때 하던 식으로 더 이상 6국 도독이니 7국 도독이니 하는 과거집착형 국서를 중원국가에 보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동성왕 즉위 후에 중국사서에서 100년 이상 왜국이 사라지는 이유다.
동성왕 이후에는 백제왕이 곧 진왕이므로 더 이상 왜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왕실의 여인을 보내거나 할 필요가 없다. 왜국 문제는 무령왕대에 계체를 왕으로 세우고 해결하는데, 이때부터는 칼이나 청동거울 같은 위세품을 보내게 된다. 6세기의 왜국은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의 하나가 된 것이다. 왜국이 백제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소아씨가 일본열도 전체를 통일한 7세기에 들어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무왕 사후 권력투쟁에서 의자왕에게 패해 왜국으로 쫓겨난 교기(중대형)세력이 소아씨통치를 무너뜨리고 왜국을 장악한 이후부터를 다시 왜국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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