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기마민족 그거 별로 좋은거 아닙니다. 문명의 파괴자죠. 마치 온들판을 황폐하게 만드는 메뚜기떼 같은 존재죠. 문명을 세워놓으면 초원에서 발원하여 순식같에 문명을 붕괴시키고 몇년 못가서 사라지죠. 우리나라는 종족적으로 북방유목계열 일순 있어도 나름 아시아권에선 선진문명을 건설하고 산 문화민족입니다.
뭔 이런 해괴망측한 무식발언이 있답니까? 북방기마민족이 문명의 파괴자? 얼마나 짱깨스럽고 사대주의적 발언인가!!! 문명을 세워놓다라는것이 과연 어디를 기준으로 하는말인가?
일단 북방기마민족의 문명적 유산을 말한다면.. 세형청동검이 있겠고.. 빗살무늬토기가 있겠고..
부의 상징인 승마관련 모든 장비가 대부분 북방기마민족에 의한 유물임..
게다가 문명의 전파와 확산을 북방기마민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음.
기마민족= 비문화민족이란 식의 논리는 무식함의 증거임. 정확하게 기마민족이 유목민족이라고 볼 수도 없음. 즉, 기마민족이 꼭 유목을 했다고 할 수 없다는것임. 유목은 기마민족의 생활의 한 종류일뿐.. 상업에도 능했고 제조에도 능했다는것이 기록상에도 나옴..
참고로 기마민족의 이동루트가 과거 교역로였고 이들로 인하여 동서양의 문명교류가 있었음.
기마민족이 마치 온들판을 황폐하게 만드는 메뚜기같은 존재라는 어이상실발언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함.
사대적 시각에 의하면 기마민족의 이동 혹은 남하가 마치 약탈과 파괴를 위한 것만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냥 나 짱깨요거나 무식자요라 천명하는것임. 기마민족의 이동은 자연재해에 의한 이동도 존재하지만.. 세력다툼에 의한 결과일 수도 있고.. 교역을 위한 압력/더 좋은 위치를 점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이기도 함.
한편 기마민족의 이동은 문명의 전파를 낳았음. 기마기술 및 각종기술과 제도등의 이식이 이루어졌음.
기마민족에게 피해를 봤다? 이것은 기마민족보다 잘난 문명이 미개한 민족에게 약탈을 당했다는것이 아니라
성장이 멈춰버린 사회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고 보는것이 더 정당함.
북방기마민족의 이동이 없었더라면 현재 현대사회의 문명의 이기는 현재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음..
기마민족 그거 대단한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라생각됨.
그건 부수적이고 사후적인 결과론이고 지나고 보니 좋은점도 있더라 정도지 몽골의 유럽침략과 중원침략 청조의 성립과 조선침략 명나라 몰락의 과정은 각각의 문명을 파괴시키고 후퇴시킨게 맞습니다. 몽골 여진 이외에 티무르라던가 초원의 정복자들은 공통적으로 문명을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죠. 특히 우리민족은 항상 여진과 거란 몽골등에게 시달렸기에 이들에게 호감을 가질 이유따윈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몽골 여진 거란등을 북방 오랑캐라고 불렀지.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님이 배운 역사중심이 피해지역중심이기 때문임. 참고로 기마민족은 몽골이 최초가 아님.. 기록 혹은 현존유산의 관점에서 중원의 것이 더 유리했기때문이지만 문명적 역활에서 기마민족을 폄하하는것은 옳지 못한 짓임.
몽골의 유럽침략은 당시 암울한 중세의 봉건제도하의 미개사회를 몽골과 같은 최소한 중앙집권적이며 사회제도적으로 사회법률의 통제가 넓게 퍼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음. 즉, 몽골의 유럽 침략으로 인하여 유럽문명이 깨어나게됨. 청조의 조선/명의 침략에서 일단 조선은 논외로 하고.. 명을 이야기 한다면 명의 무능과 부패는 기록적으로도 유명함. 명의 문명이 파괴되었다 쳐도 청의 문명이 더 발전되었음. 명의 문명이 지속적 개혁/개선이 이뤄졌다면 명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봄. 이유... 문명의 진화 개선 개혁은 그 문명(국가)의 가장 절정기에 이뤄짐.. 즉, 이후 멸망은 그 문명의 절정기가 지났음이며 쇄퇴중이라는 것.. 그리고 새로움에대한 열망이 부족하였기 때문임. 변화에대한 거부가 청으로 인한 멸망을 가져왔다고 봄.
전혀 아닙니다. 서양은 몽골문화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문화를 복원함으로써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르네쌍스 모르세요. 그리고 청조의 문명은 하락한게 맞아요. 기본적으로 치자와 피치자의 언어가 달라지다 보니 통치의 목적도 마치 일제시대처럼 탄압과 착쥐에 있고 사상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아 금석학과 고증학중심으로 유교가 퇴행하고 말죠.
화하족이 미개하다 어쩌다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예요. 오늘날 중국도 북방쪽에 오랜기간 지배당하면서 유전적으로 거의 구별이 안될정도입니다. 남중국이 다소 과거 화하족의 특징이 있긴하지만서도. 중요한건 그게 어떤 혈통이든 중원을 차지하고 정착생활을 하고 문명을 만들어왔다는거예요. 우리민족도 발해만을 중심으로 문명을 형성해왔고요. 정착문명을 형성하지 못한 여진 거란등과 같은 야만족하곤 비교도 안됩니다.
여진 말갈은 일부 문명을 이루기도 했으나 그수준은 저열했고요. 특히 조선을 침략해서 50만명 정도의 우리 조상들을 노예로 삼아 북경노예시장에 팔아먹고 그 돈으로 군사력을 배양하여 명을 침략해서 또 명나라 인구의 절반을 도륙했습니다. 오늘날 문명인의 관점에서 보면 야만인이 맞아요.
홍콩의 발해사 학자인 김광석교수의 `발해족의 형성과 그 사회형태 연구' 논문을 인용하자면 ◇말갈은 고대 한민족 = 말갈족은 북방 이민족이 아닌 우리 한민족의 일원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
발해가 건국되던 6세기말 7세기초 시기에 지린(吉林)성 등 동북지방에 7개 말갈족 부족이 있었다.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 고아시아 숙신계가 4개 부족이었고 숙신계 흑수말갈을 제외한 6개 부족이 발해에 흡수됐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우리에겐 백제와 신라를 침략한, 문화수준도 낮고 야만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지만 사실은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됐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오히려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동거란'이 발해 계승 = 10세기초 발해는 귀족 권력투쟁과 국정 불안으로 사회모순이 커지면서 925년 거란의 야율 아보기(耶律 阿保機)의 침략을 초래한다.
1년만에 홀한성(忽汗城)이 함락되고 애왕(哀王)이 투항함으로써 발해는 229년만에 역사에 종언을 고했다. 고구려계인 고영창(高永昌) 등에 의한 발해 부흥운동이 세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아보기는 그러나 곧바로 발해국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태자를 인황왕(仁皇王)으로 앉히며 발해국 계승을 선언했다.
당시 발해 유민 300만명중 190만명은 동단국에서 거란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나머지 110만명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중 10만여명은 고려로 넘어갔고 60만명은 여진으로 도피했으며 1만명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왕족 2명, 귀족 25명을 포함 발해 유민이 대거 고려로 들어오자 고려는 이들을 후대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본래 우리의 친척 국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동단국은 이후 동거란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도 발해의 행정체제와 규모를 그대로 유지했다"며 사실상 동단국은 발해국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해는 거란 이후 동북지방의 주도세력이 된 여진과도 특수관계를 맺고 있었다. 흑수말갈이 합류한 여진의 금나라는 당시 동북지구에서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발해를 대거 포섭해 끌어들였다. 금나라의 역대 황제 가운데 발해족을 생모로 둔 황제는 해릉왕, 세종, 위소왕 등 3명에 이른다.
그냥 힘이 강하니까 추종하고 숭배한다는 논리는 위험한겁니다. 그때문에 고대에는 곰이라든가 호랑이를 숭배하기도 했죠. 그러나 문명인의 입장에서 곰이나 호랑이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건 우스운 일입니다. 과거 북방기마민족이 어린시절부터 사냥으로 단련되고 기마술에 능하다보니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농경민족을 참살해왔는데 그때문에 군사력에서 우위에 서기도 했죠. 그러나 근대이후에 화약과 총포의 발달로 더이상 유목민족은 단순히 기마궁술로 정착민에게 대항할수 없습니다. 오늘날 몽골이나 티벳 위그루등지의 유목민은 단순한 보호의 대상일 뿐이죠. 마치 늑대 호랑이가 동물원의 관상용으로 전락한것처럼.
우리민족은 기원이 기마민족이지 대부분의 역사는 농경민족이었죠? 농담하셈?
농경이 중요산업중 하나임을 부인하지 못하나..
대부분의 역사를 어디까지로 보아서 농경민족이라고 하는지????
조선시대에는 분명 농경민족이라 할 수 있지만..
고구려는 농경과 유목 수렵과 상업이 혼재하였던 나라..
고려도 농경이 발달 했지만.. 상업/공예산업이 상당히 발달 했던 나라..
신라는 수도의 인구가 공예/상업/교역등이 주를 이뤘던 나라..
백제? 국토의 대부분이 바다를 끼고 나뉘었던 나라이고 조선이 발전하고
바닷길을 운영이 특기였던 나라..
그 상공업의 품목이 무었이었고.. 그 상공업이 발달하게 끔 만들어 준 대상이 누구였을까요?
당대에 상공업의 발전이 그냥 지들끼리 먹고 살다 보니 이뤄졌을가요?
기마민족들에 의한 교역루트 확보와 그들에 의한 이국/이문명의 진귀품이 흘러들어와서 이죠. 즉, 큰 경제력을 이루었기에 교역대상이 되었지만.. 이들이 큰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마문명과의 교류때문입니다. 님의 말대로.. 기마문명과 교류를 단절했던 기타 선후대 국가는 상공업이 덜 발전하지 않았나요?
님의 말의 가장 큰 반박근거가 청의 몰락입니다. 청은 교역로를 차단하고 교역장소를 한곳으로 지정했으며
그것도 청황실의 허가없이는 교역이 불가했습니다.
청문명은 초기 교역로를 차단하기 전까지 발전은 후기 교역차단이후 발전도나 상공업의 번성등을 볼때
아무리 큰 경제권이라도 교역이 없다면 사회적 정체가 일어남을 알게됩니다.
당/송등은 큰 경제력을 쥐고있었지만.. 교통로는 기마문명권에서 쥐고있었던 거죠.. 즉, 당송을 물건 하청공장이라면 기마문명은 세계적인 종합상사라 볼 수 있죠.
불교유산의 걸작하면 돈황 석굴이 유명하죠 이게 어느 곳에서 싹튼 문화인줄 맘마님은 아실라나?? ㅋ
동양학의 보고(寶庫) 둔황(敦煌)이라는 도시는 바로 실크로드의 선상에 위치해 있다. 베이징으로부터 3분의 1, 테헤란으로부터 3분의 2 지점에 자리한 둔황은 중앙아시아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오아시스이자 북방의 유목민과 남방의 티베트인이 교통하던 통로였다. 동과 서, 남과 북이 모이고 갈라지는 실크로드의 요충 겸 문명의 십자로였던 것이다.
북방기마민족은 바이러스처럼 문명을 전파시키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화약과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역사전개과정에서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두번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힘들겠죠
기마민족의 장점은 훌륭한 이동수단인 말과 말과 연관된 무기체계의 효율성으로 만주족이 마지막 흥기한 청과 함께 장렬히 역사에서 퇴장하였습니다 북방기마민족의 일부가 한반도에서 유목문화를 버리고 농경문화로 전환했기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죠
역사적 사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중 하나는,,,,,,지금의 중국은 한족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일제시대때도 일부 역사적 사실들이 왜곡된것이 있겠지만,,,,지금 중국의 동북공정만 해도 그렇고,,,,중국의 역사를 한족 중심으로 놓고보는 역사이기때문에 공정하지 못합니다,,,,객관적 사실들로 객관적 판단으로 정한 역사로 보기에 모자란 점이 있을 것입니다,,,,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기때문에 역사외적인 부분을 말합니다,,,,따라서,,,,,지금의 역사정보를 너무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북방기마민족을 나쁘게만 표현하는것은 그 중국한족의 논리를 아무비판없이 받아들이는것 같습니다,,,,,2차대전 독일도 바쁘지만,,,비슷한시기 유럽 다른나라들의 식민침략들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