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들의 만행 동예를 강원도로 표기했다. 제정신이 아닌놈들이다. 어서 짱개본국으로 돌아가라 !!!!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예의북은 고구려 옥저이다. 남으로 진한과 접하고 동으로 큰바다에 닿고 서로는 낙랑에 닿는다. 예,옥저, 구려는원래 조선의 옛땅이다.
후한서
이기록만 보면 매국노들처럼 그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다음 기록을 보라
두씨(杜氏)의 《통전(通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진(晉) 때 부여(夫餘) 창고에 예왕지인(
濊王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진 인장이 있었다. 그 나라에 예성(
濊城)이라는 옛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디는 예맥(
濊貊)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 나라는 장성(長城) 북쪽에 있는데, 현도(玄菟)에서 천리 떨어졌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邑婁), 서쪽으로 선비(鮮卑)와 이어지고, 북에는 약수(弱水)가 있으며 땅이 사방 2천리는 되고, 호수(戶數)가 8만이다. 동이(東夷)의 지역은 가장 평평하고 넓은데, 흙이 오곡을 심기에 알맞으나 오과(五果 밤ㆍ대추ㆍ배ㆍ감ㆍ사과)는 나지 않는다. 궁실(宮室)ㆍ뇌옥(牢獄)ㆍ창고(倉庫)가 있으며, 산릉(山陵)과 넓은 늪[澤]이 많다.
고금화이구역총요도의 부여위치
부여는 시대마다 약간씩 위치가 다르다. 원래 단군조선의 장자국이었으나 고구려에 패한후 분열되고 백제에 격파되었고 전연에 멸망당하기도 했다. 그러니 대략의 위치를 감안하건데 현재의 난하와 만주의 장춘 부여정도로 보인다.
부여에서 예성이 있고 예왕의 도장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진한이 부여가 되었다는 또다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한과 부여는 가까우며 예역시 그 사이에 있다.즉 부여땅일부가 예땅이라는 것이다. 그럼 매국노들은 국사책을 다시 써야 한다. 부여가 한반도 전역을 먹었다고 써라 그러면 대략 기록과 비슷하다고 볼수있다. 그리고 고조선을 강원도에는 표기하지 않는 매국노들 역시 수정해라
니네들이 왜 앞뒤가 안맞냐 예땅이 조선땅이었다는데 왜 강원도는 고조선에 포함안시키느냐 줏대도 없고 역사관도 없고 오로지 짱개와 왜놈의 앞잡이노릇만 하니 이런 사람들이 국사책을 쓰고 있으니 !!!!!!!!!!!
위의 지도를 보라 진한이 부여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올수 있고 고구려가 요하일대를 차지한 이후 진한의 동쪽에 고구려가 있다는 기록이 나올수 있으며 변한과 진한은 섞여 산다라는 말이 나올수 있고 秦나라 유민이 나라가 망한후 마한땅으로 와서 동쪽땅을 뗴어주었다는 기록이 있을수 있으며 낙랑사람이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나올수 있고 고구려 백제가 낙랑군을 사이에 두고 싸운 기록이 있을수 있으며 예의 땅이 부여땅이 된것도 설명할수 있다. 백제가 동에는 낙랑이 있다라는 기록도 설명가능하며 거의 모든 의문점을 설명할수 있다. 부여의 위치를 보라 현도에서 천리정도 되지 않겠는가!!!! 부여가 백제에 격파되어 연의 모용씨에게 이동했다가 나라가 망한것도 모두 설명가능하다.
왜놈의 앞잡이 매국노 국사학계의 지도대로 설명해 보면 맞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우선 마한땅 4천리도 설명못한다.그러니 매국노들이 한변이 천리인 사각형땅이라고 말도 안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북경까지 3천리가 넘는다고 했다. 마한땅 4천리 충분히 설명가능하다. 매국노들아!!! 마한땅이 백제라고 하다가 고구려라고 하는 기록이 많다. 이는 마한땅을 백제와 고구려가 전성기때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변한이 백제라는 기록도 설명가능하다.
내가 알기로 매국노들은 최근에 전라도와 경상남도를 삼국이 차지한 것은 기원후 3백년경이나 되야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원삼국시대라는 미친 주장을 하고 있다.즉 기원후 3백년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초미니소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스까!!!!!!!
백제 풍납토성의 탄소연대측정은 기원전 2백년으로 나왔는데 !!!! 그성벽이 높이와 두꼐가 전국시대 연의 수도보다 더 거대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