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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9-06 17:44
[기타] 만주대해서요
 글쓴이 : 대은하제국
조회 : 4,657  

만주 백두산 윈래 우리민족 영토 아닌가요?

어떤분은 만주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토이고

우리와 관계없다고 하는군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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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ts 14-09-06 18:35
   
'원래'가 언제부터를 뜻하는지는 모르지만
발해까진 우리민족(?) 영토
그 이후에는 그 자리에 터잡은 타민족의 영토입니다. 발해 멸망 이후 물길.숙신 여진 읍루...뭐 그렇게 불립니다.
재야사학(?)이라 자칭하는 사이비들은 고려때도 우리영토라고 하기도 하는데...근거없는 얘기고.
적어도 조선때는 만주가 조선영토가 아니었음은 명확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아~~~~~~~~주 명확하게 두만강과 압록강이 조선의 국경이라고 나옵니다.
당연히 그 건너편인 만주는 우리땅이 될수가 없고.
백두산의 경우 백두산이 동네 뒷산도 아니고 결코 범위가 작지않기때문에 일부는 조선 일부는 청나라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두산 정계비의 위치가 천지 동남쪽이었던 것으로 볼때 천지를 포함한 많은 부분이 청나라의 영토였을것이라 봅니다.
     
나와나 14-09-06 23:27
   
물길, 숙신, 읍루 등은 발해 멸망 후가 아니라 훨~씬 이전에 삼국 시대에 존속했던 민족들이고 발해 멸망 후에 만주에 자리잡은 여진족은 타민족이 아니라 발해 유민+북진한 신라인들의 연합 세력입니다

재야사학이 사이비니 근거가 없니 할 시간에 사서에 뭐라고 써있는 지 좀 알아보시죠
고려사, 동국통감 등에 문종 시기에 여진족들이 스스로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고려가 그 곳에 주, 군을 설치해 다스린 기록이 넘쳐납니다

그리고 실록에는 압록-두만강이 경계라는 말도 있지만, 공험진이 조선땅이라는 기록도 나와있습니다

게다가 만주가 조선 땅이든 아니든간에 청나라 영토였다는 근거는 있는지요?
기록이나 자료가 있으면 제시 부탁합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군요.. 서양 선교사들이 간도를 조선 영토로 그려놓은 지도는 많이 봤지만요
          
nests 14-09-07 10:10
   
주장과 근거가 따로노시네요.
여진족들이 스스로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한것과 고려가 그곳에 주.군을 설치했으니
여진족이 한민족이됩니까? 대한민국에도 미국 주가 되고싶어하는 애들 있었죠.  걔들은 앵글로색슨족이 되고싶었나봅니다.
여진족 사는데다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으니 만주도 우리땅이다? 설마 이런 논리는 아니시겠죠. 한민족이 살던 경상도를 일본이 점령하면 한반도가 일본땅되는거 아니죠.
고려가 만주땅을 먹었으면 고려지도가 달랐겠죠.

재야사학은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멍청이들 헛소리에요. 그런거 그만 믿으세요.

만주가 조선땅 아니라는 근거가 쏟아져나오니까 이젠 "그,그래도 청나라 영토도 아니었다! 중간지대다!"
백두산 정계비 내용은 수도없이 봤으면서 왜 자꾸 그 내용은 모른척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위압록 서위토문.
정말 만주가 어느나라의 영토도 아닌 중간지대였으면 왜 압록두만을 국경으로 정했겠습니까? (토문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논쟁은 사양합니다.)북한과 남한의 국경은 휴전선이지 dmz이남 남측 경계가 아니죠?

조선왕조실록
고종 19권, 19년(1882 임오 / 청 광서(光緖) 8년) 8월 7일(경신) 3번째기사
 의정부에서 길림과 훈춘에 공문을 보내는 문제에 관하여 아뢰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유연(金有淵)이 경원 부사(慶源府使) 이희영(李熙榮)의 치보(馳報)를 낱낱이 들어 말하기를, ‘훈춘(琿春) 사람이 공문(公文)을 가지고 왔기에 뜯어보니, 우리나라의 빈민(貧民)들로서 국경을 넘어가 땅을 차지하고 개간한 자에 대해 본국(本國)의 공문을 받아서 세금을 수납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넘어간 조선인들에 대해 청나라에서 세금걷겠다는 내용입니다.
누구땅도 아닌 중간지대면 청나라가 왜 세금을 걷을까요.


서양선교사들 그린 지도도 정말 수도없이 봤는데
애초에 서양선교사들이 조선청나라 국경에 대해서 김정호나 정약용 등등 이땅에서 나고자란 조상님들보다 더 잘 알리도 없을뿐더러 걔네가 그린건 교구지도지 국경지도가 아닙니다. 대동여지도 꺼져!인가요?
               
나와나 14-09-07 11:28
   
고려시대 만주에 주, 군을 설치했다는 건 님이 '고려 때
주, 군은 설치했지만 우리 땅은 아니다??
이게 무슨 논리죠? 과속은 했지만 속도위반은 아니다?

주, 군은 설치한 건은 단순히 왜란 때 일본군이 하던 점령방식이 아니라 행정구역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행정 구역을 설치했는 데도 우리 땅은 아니라고 하시면.. 도대체 할 말이 없군요
님이 생각하시는 영토 확장은 총칼 압세워 정복하는 거밖에 없으시는 지..

그리고 이건 '고려 때 만주가 우리 땅이었다는 건 근거없는 소리'라는 주장에반박한 것이고, 여진족이 한민족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쓴 것은 아닙니다. 제가 헷갈리게 썼나 보군요
                    
nests 14-09-07 13:42
   
어허...말을 바꾸시고 은근슬쩍 제가 그런 엉터리 주장을 한것으로 몰아가시네요...


첫번째 댓글에서 여진족이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두번째 댓글에선 '만주'의 여진족이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만주'에 고려가 주.군을 설치했다라고 말을 바꾸시고 제가 그런 말에 동의한것처럼 몰아가시네요.
둘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경상도를 일본이 점령하고 일본식 행정구역을 설치한다면 경상도는 일본땅이 됩니다.
그럼 경상도만 일본땅이 된것이지 한반도 전체가 일본땅인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여진족일부가 고려에 속하기를 간청하고 고려가 그곳에 주.군을 설치했다고 해서
여진족 전체가 고려에 속하게 된것도 아니고 여진족의 영토가 전부 고려땅이 되는게 아닙니다. 너무도 당연해서 설명도 필요없는 얘기고 이건 논리의 영역이지 역사의 영역조차 아닙니다.
               
나와나 14-09-07 12:08
   
(1)여진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구성원은 누구인가?

여진족은 발해 멸망 뒤 등장하여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민족입니다
그런데 여진족은 그 이전까지는 등장한 적이 없던 민족입니다
이 여진족은 누구일까요? 이민족? 한민족?
당시 만주에는 누가 있었던 것을 알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당시 발해의 인구는 고구려의  인구정도와 비슷한 것을 감안하면 발해인들은 약 500~700만은 될겁니다

즉, 멸망하면 사라져 버리는 타 유목민들과는 다르게 발해의 경우는 5경 체제와 같은 도시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나라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수도 많고 생활 기반들이 있어서 멸망한 뒤에도 자신들만의 세력권이 존재했죠

즉,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수백만의 발해 유민들이 여전히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었다는 거죠

여진족이 어디서 이주해온 민족이던 간에 여진족의 대부분은 발해 유민이었을 겁니다

(2)여진족의 지배층과 정체성은 무엇인가

여진족의 초대 황제는 아골타입니다

그런데 이 아골타는 신라인 김함보(김행)의 후손으로, 자신을 신라인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로 고려사나 송나라의 송막기문과 자신들이 서술한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등 여러 기록에도 김함보의 행적이 등장하고 금나라 황실이 신라인이라는 구절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여진족의 이름을 살펴보면  여진은 '아이신'을 한자로 표기한 것인데, 이 아이신은 '금'을 의미합니다

결국 국호조차 '금'나라로 정했죠

이게 바로 자신들의 성씨이자 정체성인 '김'씨를 뜻합니다

이제 한 번 봅시다..

국호, 부족명은 김씨이고
황실가의 혈통은 신라인이며
금사, 흠정만주원류고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신라에서 찾고 있습니다
즉, 여진족의 지배층은 신라인이었고, 정체성이 신라였다는 거죠
또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주변국들도 모두 여진족의 추장이 신라인이라는 기록을 남기는 등 여진의 근원을 신라에서 찾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여진족의 정체성은 신라이며 구성원 대다수는 발해 유민이며, 지배층은 신라인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한민족이 아니라는 판단이 나오는 지 의문입니다
                    
나와나 14-09-07 12:20
   
아래는 윗 댓글의 근거로 제시하는 사료들입니다

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 신라왕성에 의해 국호를 금이라 했다. 
                                                                          -만주원류고

女真酋長乃新羅人號完顏氏完顏猶漢言王也 
여진 추장은 신라인에서 비롯된다. 호는 완안씨로 완안이란 한자말에서는 왕과 같다. 

- 송막기문


昔金完顔氏以本出高麗。遇高麗甚厚。終不侵暴。愛州今義州本高麗地而陷於遼。及金滅遼。 
以愛州畀高麗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 

 - 지봉유설


金則本我國平州之人, 稱我爲父母之國
금나라의 근본은  우리나라 평주사람이다. 나(고려)를  일컬어 부모의 나라라했다.

-고려사
                    
nests 14-09-07 13:49
   
애초 왕가가 신라족보라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왕가의 족보가 민족의 족보를 갈음하는 것이 아니죠.
청나라 왕실족보는 여진족 족보지만 청나라국민 절대다수는 한족이었습니다.
한족이 여진족이 되는건가요?

금나라가 고려에 후하게 대했다는것도 이상합니다.
국사시간에 금나라가 초기 형제관계(금나라가 형)를요구하다가
나중엔 군신관계(금나라가 왕)를 요구했던 것.
고려가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았던 것을 배웠을겁니다.

그리고...
王乃遣使如金(왕내견사여금) : 왕이 사신을 금 나라에 보내어
請曰(청왈) : 청하기를,
本吾舊地(본오구지) : 원래 우리나라 옛땅이니
願以見還(원이견환) : 돌려보내기를 원한다."고 하자,
金主(금주) : 금 나라 임금이
謂使者曰(위사자왈) : 사신에게 이르기를,
爾其自取之(이기자취지) : “너희가 스스로 빼앗으라."고 하였다.

금나라에 고려가 의주를 달라하니 니네가 니네힘으로 빼앗아봐라.하고 일갈하는 장면입니다.


.
                         
나와나 14-09-07 14:33
   
님의 주장은

"왕가의 족보가 민족의 족보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인데
 
여진족은 왕실만이 아니라 그 절대다수의 백성들도 발해 유민들로써 한민족입니다

제 주장은

1.왕실가의 족보가 신라인
2.절대다수 백성들이 발해인
3.정체성이 신라
->결론:여진족은 한민족

인데 이것에 대한 반박을 해보실 수 있습니까?
                         
nests 14-09-07 16:24
   
1. 발해의 지배층은 우리민족인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
2. 말갈인도발해국민이었다
3. 그러므로 말갈인도 우리민족이다

님 논리가 이모양이에요.
반박이 필요합니까?

1. 청나라의 지배계층은 여진족. 피지배계층은 한족이었다
2. 한족도 청나라국민이었다
3. 그러므로 한족은 여진족이다.
                         
나와나 14-09-07 17:06
   
아니..

제 논리는 3가지 근거를 제시한 뒤 결론을 내는 방식이고

그에 비해 님이 하고 있는 건 3단 논법 비스무리한 거네요?

그 둘은 전~혀 다른 방법인데요?

왜 해보라는 반박은 안 하시고 이상한 소리 하십니까?

더 쉽게 알려드려요?

1.지배층=신라인(한민족)
2.피지배층=발해인(한민족)
3.정체성=신라(한민족 왕조)
->결론:여진족은 한민족
               
나와나 14-09-07 12:34
   
     
굿잡스 14-09-07 12:52
   
조선때는 만주가 조선영토가 아니었음은 명확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아~~~~~~~~주 명확하게 두만강과

압록강이 조선의 국경이라고 나옵니다.

>>>>>????  ㅋㅋ

세종59권, 15년(1433 계축/ 명선덕(宣德) 8년) 3 월20일(계유) 1번째기사 임금이여러신하에게지금길주가예전길주와같 은가를아뢸것을말하다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 를, “고려의 윤관(尹瓘)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 진(女眞)을 소탕하여 주진(州鎭)을 개척해 두었 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 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州)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 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 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 를, ‘공험진 (公險鎭 )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癸酉/視事。 上謂諸臣曰: “高麗尹瓘將十七萬兵, 掃蕩女眞, 拓置州鎭, 女眞至于今, 皆稱我國之威 靈, 其功誠不少矣。 瓘之置州也, 有吉州, 今之 吉州, 與古之吉州同歟? 高皇帝覽朝鮮地圖, 詔 曰: ‘公險鎭以南, 朝鮮之境。’ 卿等參考以啓。”

공험진에 대해 잠시 위치를 살펴보면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에 의하면, 공험진에는 내·외방어소(內 外防禦所)가 있었는데,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 慶源都護府)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북쪽700리에 있는공험진에두었던것으로보고있다. 그곳까지의 노정은 조선 초기의 경원도호부 동 림성(東林城)을 출발해 북쪽 5리쯤에 소다로영 터〔所多老營基〕, 그 북쪽 30리에 어두하현(於 豆下峴), 그 북쪽 60리에 동건리(童巾里), 그 북 쪽 3리쯤에 두만강탄(豆滿江灘), 그 북쪽 90리에 오동사오리참(吾東沙吾里站), 그 북쪽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 그 북쪽 100리에 영가사오 리참(英哥沙吾里站), 그 북쪽 소하강(蘇下江) 강 변에 공험진이 있다고 하였다

좀더 구체적 내용은 아래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3726&cid=1591&categoryId=1591


하긴 명확히 나오긴 함 ㅋ
          
nests 14-09-07 13:47
   
사료로 배틀뜨면 실록에 수두룩하게 압록두만이 나오는데
공험진처럼 불분명한 것 하나로 버티시려구요?
사이비추종하는게 명확하긴하네요
대체 공험진이 지도상 어딘줄은 아세요?
본인이 복붙한 내용중 본인 주장을 뒷받침하는 부분이 어딘줄은 구분할줄 아세요?
               
굿잡스 14-09-07 14:16
   
어구 무서워라 능력되면 배틀 떠보시든지요ㅋ(공험진이 어딘지 윗기록 올려는데 안보이
심?ㅋ 원문 올려드림?해석은 할지?ㅋ)
                    
nests 14-09-07 14:23
   
글로된 위치 말고 지도상 위치를 물었잖아요?
왜 한번 말하면 못알아듣지?
알아들으면 바로 발릴까봐 그러세요?

제시하신 "세종15년"의 사료를 보면
"고황제(高 皇帝)가 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 를, ‘공험진 (公險鎭 )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
라고 되어있는데
세종대왕이 4군 6진중 6진을 개척하여 종성진을 만든것이 세종16년이고
온성군을 만든것이 세종 22년입니다. 이들은 다 두만강 이남에 있습니다.
세종15년 시점에선 아직 함경도 동북쪽도 다 점령못한판에 그 너머에 있을(님 주장에 따른다면 말입니다) 공험진타령을 한걸 보니
 세종15년에 공험진 드립을 한것은
1.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에 있거나
2. '공험진'이 현재 조선의 영토가 아닌 상태에서 세종대왕또한 공험진이 어딘지 제대로 몰랐던거죠.

세종21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외
세종 73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윤6월 18일(계미) 2번째기사
4품 이상이 올린 외구(外寇)의 제어책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보내다
 또 압록강(鴨綠江)은 하늘이 만든 경계로서

세종 62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11월 21일(경자) 1번째기사
 영북진·경원진의 재 배치 문제와 관련하여 병조의 의견을 묻다
또 우리 나라는 북쪽으로 두만강을 경계(境界)로 하였으니,

세종 75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10월 3일(을축) 2번째기사
 올적합의 군사 3천을 물리쳤음을 함길도 도절제사가 알려 오다
적을 뒤따라 두만강에 이르러 서로 싸웠는데, 적이 강을 건너가고 해가 이미 저물었으므로 우리 군사가 추격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습니다.”

세종 77권, 19년(1437 정사 / 명 정통(正統) 2년) 5월 20일(기유) 4번째기사
 야인 토벌의 계책을 세우도록 김종서에게 명하다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신설한 네 읍은 우리 조종께서 처음 기초를 정하신 땅으로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었다., 두만강은 하늘이 저들과 우리와의 한계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1월 22일(정묘) 21번째기사
 북관의 방어, 금군, 능에 거둥할 때 백성들의 구경 금지 등을 논의하다
두만강이 얼어붙은 뒤에는 저쪽의 육지와 연결되므로 애당초 조그만 경계도 없습니다. 지금은 번호(藩胡)가 작란하는 우환은 없으나, 강변에 파수를 세워서 불의의 우환을 대비하는 것은


근거가 너무 많네요.
                         
굿잡스 14-09-07 15:22
   
. 공험진이 두만강 이남에 있거나
2. '공험진'이 현재 조선의 영토가 아닌 상태에서 세종대왕또한 공험진이 어딘지 제대로 몰랐던거죠.>??ㅋㅋ

세종이 공험진을 몰랐다고 조선이 공험진을 몰랐다?? ㅋㅋ(뭔 세종은

전지전능이여야 함?? ㅋ 울나라 박근혜가 혹여 최남단 섬 이름 모른다고

그곳은 우리 섬 아님?) ㅋ


단종 시기에 완성된

<세종실록 지리지 공험진 원문>은 그럼 어떻게 해서 기록을

남겼을것 같음? ㅋㅋ

지리지 / 함길도 / 길주목 / 경원 도호부
 
◎ 경원 도호부(慶源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길주도 우익 병마(吉州道右翼兵馬)를 겸한다.
옛 공주(孔州)로서 혹은 광주(匡州)라고도 칭하는데,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의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를 두었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 있다고 하여 경원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성(城)을 수축하기 위하여 땅을 파다가 인신(印信) 1개를 얻었는데, 그 새긴 글에 ‘광주 방어지인(匡州防禦之印)’이라고 되어 있었다. 태종(太宗) 9년 기축【영락(永樂) 7년.】에 목책(木柵)을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에 설치하고 부(府)를 옮겼고, 10년 경인에 야인(野人)의 난리로 인하여 경성군(鏡城郡)에 합쳤다가, 17년 정유【영락 15년.】에 경성(鏡城)의 두롱이현(豆籠耳峴) 이북의 땅을 떼어서 다시 도호부로 삼고, 부가참(富家站)에다 목책(木柵)을 세우고 치소(治所)로 삼았다.
복호봉(伏胡峯)【부의 동쪽에 있는데, 본부 사람들이 진산(鎭山)으로 삼는다. 】대천(大川)은 두만강(豆滿江)과【부(府)의 동북쪽에 있다.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나오는데, 동쪽으로 흘러서 동량북(東良北)으로부터 사지(舍知)·오음회(吾音會)·수주(愁州)·동건(童巾)·다온(多溫)·미전(迷錢) 등지를 지나 회질가(會叱家)에 이르고, 남쪽으로 흘러서 소다로(所多老)·동림(東林)·오롱초(吾弄草)·아오지(阿吾知) 등지를 거쳐 공주(孔州)를 지나고, 동쪽으로 23리를 흘러서 사차마도(沙次亇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 정도쯤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빈강(愁濱江)이다.【두만강 북쪽에 있다. 그 근원은 백두산 아래에서 나오는데, 북쪽으로 흘러서 소하강(蘇下江)이 되어 공험진(公險鎭)·선춘령(先春嶺)을 지나 거양성(巨陽城)에 이르고,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이 되어 아민(阿敏)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경성(鏡城) 두롱이현(豆籠耳峴)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연해(連海) 굴포(堀浦)에 이르기 12리,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백 리, 동북쪽으로 선춘현(先春峴)에 이르기 7백여 리, 서북쪽으로 오음회(吾音會)의 석성기(石城基)에 이르기 1백 50리이다.
호수가 2백 91호요, 인구가 3천 2백 33명이다. 군정은 익속군(翼屬軍)이 3백 1명, 수성군(守城軍)이 58명이다.
땅이 기름지다. 간전(墾田)이 52삭(朔) 13일(日) 3조(朝) 반조(半朝)【이것이 바로 본부(本府)의 전지(田地)이다. 본래 타량(打量)함이 없으므로, 곧 일경(日耕)으로써 근거(根據)를 삼았다. 】2천 1백 82결이다.【논은 겨우 50결인데, 이것도 경성(鏡城)에서 떼어 내어 내속(來屬)시킨 것이다. 】토의(土宜)는 피·콩·조·메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곰가죽·사슴가죽·삵가죽·여우가죽·잘[獺皮]이요, 약재는 녹용·당귀(當歸)·인삼·망초뿌리[秦]·방풍(防風)·택칠(澤漆)·속새[木賊]·삿갓나물[蚤休]·바디나물뿌리[前胡]이요, 토산(土産)은 범의 가죽·연어·문어·상어·방어·대구·황어(黃魚)·송어·굴·미역·곤포(昆布)·다시마이다. 염분(鹽盆)이 15개이다.
읍 목책(邑木柵)【둘레가 7백 38보(步)이다. 】고랑기 목책(高郞岐木柵)이 부의 동북쪽에 있고,【둘레가 1백 66보이다. 】청암 목책(靑巖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고,【둘레가 3백 보(步)이다. 】부리하 목책(夫里下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고,【둘레가 2백 1보(步)이다. 】용성 목책(龍城木柵)이 부의 서쪽에 있다.【둘레가 2백 75보(步)이다. 】동림성(東林城)【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는데, 둘레가 21보(步)나 되며,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태종 원년 신사에 그 성을 수축하여 경원부(慶源府)의 산성(山城)으로 삼았다. 】아오지 고성(阿吾知古城)이 동림성(東林城) 남쪽에 있고,【옛 경원부(慶源府) 때에 군사를 주둔시켜 수어(守禦)하던 곳이다. 】공주성(孔州城)이 아오지성 남쪽 두만강 가에 있다.【옛 경원부(慶源府) 때에는 읍성(邑城)을 삼았었다. 】공주성(孔州城) 남쪽 5리쯤 되는 평야(平野) 가운데에 두 개의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남쪽에 덕릉(德陵)을 모셨고, 북쪽에 안릉(安陵)을 모시었다. 태종 10년 경인에 함흥부(咸興府)로 옮겨 모시었다.
동림성(東林城)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所多老)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그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의 산상(山上)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안에 돌기둥 둘이 있으니, 예전에 종(鍾)을 달던 곳이다. 종의 높이가 3척, 지름이 4척이 넘었었다. 일찍이 경원(慶源) 사람인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城)에 가서 그 종을 부수어서 말 9마리에 싣고 왔는데, 겨우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었고,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으나, 누가 감히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碑)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선춘현(先春峴)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城基]가 있고, 소다로(所多老)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於豆下峴)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동건리(童巾里)가 있고, 그 북쪽으로 3리쯤의 두만강탄(豆滿江灘)을 건너서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그 북쪽으로 1백 리에 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尹瓘)이 설치한 진(鎭)이다. 남쪽으로 패주(貝州)·탐주(探州)와 인접(隣接)하였고, 북쪽으로 견주(堅州)와 접(接)해 있다. 영가 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白頭山)이 있는데, 산이 대개 3층으로 되었다. 꼭대기에 큰 못이 있으니, 동쪽으로 흘러 두만강(豆滿江)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蘇下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압록(鴨綠)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黑龍江)이 된다. 그 산에 사는 새와 짐승은 모두 흰빛이며, 산허리 이상은 모두 속돌[水泡石]로 되어 있다. 부(府)의 서쪽으로 80리에 오음회현(吾音會峴)이 있고, 25리에 대령(大嶺)이 있으니, 이름이 ‘청산(靑山)’이며, 그 서쪽으로 10리에 큰 산이 있으니, 이름이 ‘다갈산(多曷山)’이다. 부의 남쪽으로 35리에 굴포(堀浦)가 있고, 동쪽으로 5리쯤에 창기(倉基)가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를, “ 고려[前朝]에서 북벌(北伐)을 할 때 조전(漕轉)하여 위수(委輸)5241) 하던 곳이라.” 한다. 부(府)의 남쪽으로 20리 바닷가에 순지(蓴池)와 웅구참리(雄丘站里)가 있고, 동쪽으로 장포(長浦)가 있으며, 그 동쪽으로 50리에 큰 못이 있는데, 바다와 통한다. 속설에 전하기를, “용(龍)이 있는 곳이라.” 한다. 진주(眞珠)와 명패(明貝)가 난다.
온천(溫泉)이 1이요,【부의 서북쪽 10리 되는 부회환(釜回換)에 있는데, 호인(胡人)이 왕래(往來)하기 때문에 정천(井泉)을 열지 아니한다. 】참(站)이 1이니, 회수(懷綏)이다.【옛 이름은 부거(富居)이다. 예전에는 시원(時原)·웅구(雄丘)·강양(江陽) 등 3참이 있었으나, 호적(胡賊)의 해(害)를 입어 이산(離散)되었다. 태종 10년 경인에 합속(合屬)시켰다. 】봉화가 2곳이니, 남산(南山)【남쪽으로 여배자개(餘背者介)에 응한다. 】·여배자개(餘背者介)이요,【남쪽으로 경성(鏡城) 청암(靑巖)에 응한다. 】해도(海島)가 5이니, 초도(草島)【부의 동쪽에 있다. 예전에 호인(胡人)이 목마(牧馬)하던 곳인데, 속설에 전하기를, “좋은 말[良馬]이 난다.”고 한다. 그 옆에 소초도(小草島)가 있다. 】·적도(赤島)【부의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다. 닭[鷄子]을 기른다. 】·난도(卵島)【적도(赤島) 남쪽에 있는데,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후라두도(厚羅豆島)【난도(卵島) 동쪽에 있는 데, 육지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역시 뭇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른다. 】·시반두대도(時反豆大島)【후라두도(厚羅豆島) 동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리이고, 그 동쪽으로 3백 40리쯤이 수빈강(愁濱江)이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들이 있으니, 대개 1백 개나 되며, 그 모양이 바둑[碁]을 벌여 놓은 것 같다. 새와 짐승들이 많으므로, 야인(野人)들이 간혹 사냥을 행한다. 】이다.
【영인본】 5책 697면
【태백산사고본】 59책 155권 10장 B면
 
◎ 慶源, 都護府使一人, 兼吉州道右翼兵馬。 古孔州, 或稱匡州, 久爲胡人所據, 高麗大將尹瓘逐胡人, 置公險鎭防禦使。 本朝太祖戊寅, 以有德陵、安陵, 陞爲慶源都護府, 修城堀地, 得印一顆, 其文曰: “匡州防禦之印。” 太宗九年己丑,【永樂七年。】設木柵于所多毛營基, 移府。 十年庚寅, 因野人之亂, 合爲鏡城郡。 十七年丁酉,【永樂十五年。】割鏡城 豆籠耳峴以北, 復爲都護府。 於富家站建木柵爲治。 伏胡峯。【在府東, 府人以爲鎭山。】大川曰豆滿江、【在府東北, 源出白頭山, 東流自東良北, 歷舍知、吾音會、愁州、童巾、多溫、迷錢等處, 至會叱家, 南流, 過所多老、東林、吾弄草、何吾知等處, 歷孔州東流二十三里, 至沙次亇島, 分流五里許入海。】 愁濱江、【在豆滿江北, 源出白頭山下, 北流爲蘇下江, 歷公險鎭、先春嶺, 至巨陽城, 東流一百二十里, 爲愁濱江, 至阿敏入海。】四境, 東距海二十里, 西距鏡城 豆籠耳峴四十里, 南距連海 堀浦十二里, 北距公險鎭七百里, 東北距先春峴七百餘里, 西北距吾音會石城基一百五十里。 戶二百九十一, 口三千二百三十三。 軍丁, 翼屬軍三百一, 守城軍五十八。 厥土肥, 墾田五十二朔十三日三朝半朝【此是本府之田, 本無打量, 直以日耕爲據。】二千一百八十二結。【水田只五十結, 此割鏡城來屬。】土宜, 稷、菽、粟、蕎麥。 土貢, 豹皮、熊皮、鹿皮、狸皮、狐皮、獺皮。 藥材, 鹿茸、當歸、人蔘、蓁艽、防風、澤漆、木賊、蚤休、前胡。 土産, 虎皮、年魚、文魚、沙魚、魴魚、大口魚、黃魚、松魚、石花、藿、昆布、多絲亇。 鹽盆十五。 邑木柵、【周回七百三十八步。】 高郞歧木柵在府東北,【周回一百六十六步。】 靑巖木柵在府西,【周回三百步。】 夫里下木柵在府西,【周回二百一步。】 龍城木柵在府西。【周回二百七十五步】 東林城。【東控豆滿江, 內有大井, 周回二十一步, 其深莫測。 太宗元年辛巳, 修其城爲慶源府山城。】 阿吾知古城, 在東林城南,【古慶源時屯兵守禦處。】 孔州城在阿吾知城南豆滿江邊,【古慶源府, 時爲邑城。】 孔州城南五里許, 平野中有兩圓峯, 南安德陵, 北安安陵。 太宗庚寅, 移安于咸興府。 自東林城北去五里許, 有所多老營基, 其北三十里有會叱家灘, 乃豆滿江之下流也。 越江十里大野中, 有大城, 卽縣城, 內有六井。 其北九十里, 山上有古石城, 名曰於羅孫站。 其北三十里有虛乙孫站, 其北六十里有留善站, 其東北七十里有土城基, 卽巨陽城, 內有兩石柱, 古縣鍾處。 鍾高三尺, 圓徑四尺有奇。 嘗有慶源人庾誠者至其城, 碎其鍾, 用九馬駄來, 纔十分之一。 從者三十餘人皆死, 其遺鐵寘草芒中, 人不敢收。 城本高麗大將尹瓘所築, 自巨陽西距六十里先春峴, 卽尹瓘立碑處。 其碑四面有書, 爲胡人剝去其字, 後有人堀其根, 有高麗之境四字。 自先春峴越愁濱江, 有古城基。 自所多老北去三十里, 有於豆下峴, 其北六十里有童巾里, 其北三里許越豆滿江灘, 北去九十里有吾童沙吾里站, 其北六十里有河伊豆隱, 其北一百里有英哥沙吾里站, 其北蘇下江邊有公險鎭, 卽尹瓘所置鎭。 南隣貝州、探州, 北接堅州。 自英哥沙吾里西去六十里, 有白頭山, 山凡三層, 頂有大澤, 東流爲豆滿江, 北流爲蘇下江, 南流爲鴨綠, 西流爲黑龍江。 其山禽獸, 皆白色。 山腰以上, 皆水泡石也。 府西八十里有吾音會峴, 二十五里有大嶺, 名靑山。 其西十里有大山, 名多曷山。 距府南三十五里, 有堀浦。 東五里許, 有倉基, 諺傳前朝北伐時, 轉委輸處。 府南二十里海邊, 有蓴池, 雄丘站里東有長浦。 其東五十里, 有大澤, 通大海, 諺傳有龍處, 産眞珠明貝。 溫泉一,【在府西北十里釜回換, 因胡寇往來, 不開井泉。】站一, 懷綏。【古名富居, 古有時原、雄丘、江陽等三站, 被賊離散, 我太宗庚寅合屬。】烽秋二處, 南山、【南準余背者介。】 余背者介。【南準鏡城 靑巖。】海島五, 草島、【在府東, 古胡人牧馬處, 諺傳産良馬, 傍有小草島。】 赤島、【在府東, 去陸一里, 鷂子養雛。】卵島【在赤島南, 衆鳥育卵。】 厚羅豆島 【在卵島東, 去陸三十里, 亦衆鳥育卵之處。】 時反豆大島。【在厚羅豆島東, 去陸一里。 其東三百四十里許, 愁濱江。 東海中有島, 率一百, 狀如碁布, 多禽獸, 野人或行獵。】
                         
굿잡스 14-09-07 15:34
   
그리고 영조시기에 제작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만

봐도 두만강 이북에 선춘령과 고려경이 정확시 표시되어 인식되고

만들어 졌는데 모르심? ㅋㅋ


재야사학(?)이라 자칭하는 사이비들은 고려때도 우리영토라고 하기도 하는데...근거없는 얘기고.
적어도 조선때는 만주가 조선영토가 아니었음은 명확합니다>???

글구 이건 뭔 또 웃긴 소리임 ㅋ

최소한 원시기 고려가 심양일대 고려백성들이 살던 촌락을 두면서

이후 이곳이 고려의 자치 관할권으로 고려인들이 혼재하면서 고려가

심양왕을 겸하면서 다스린건 모르시남?

그에 앞서  요즘 중고딩 국사만 배워도 발해 멸망 후에도 고려시대

북방 상경용청부일대가 이름만 바뀐 동란국으로 이후 반란이

거세지자 고구려 서북 발해 지역인 요양일대로 대거 이동시켜 수십만이

살고 있었고 요동반도 역시 수십만호가 되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 그기에 나머지 요나라 저항 반란 규합세력이 상경용천부 일대에

오사국을 세워고 그곳 왕은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

王)’  혹은 ‘발해염부왕’·‘발해왕'으로 여전히 불렀고

후발해국, 정안국, 흥요국등 금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엄연히

발해세력들이 고려시대에도 만주일대 여기 저기 발해, 고구려 계승국을

자처하면서 국호를 세우고 대외적 외교활동까지 하고 있었구만

이건 못배우셨나봄 ㅋ

그외 허인국씨의 <고려중기 동북계 범위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만

봐도 고려가 요나라와 3차대전에서 10만 요나라 정예병을 궤멸시키면서 중기에 가면

동만주 일대의 상경용천부 근처까지 세력을 미쳤음을 이야기 하고 있구만

근거 없는 헛소리이다? ㅋ(본인의 무지로 모르면 다 헛소리임?ㅋ)



지도로 보는 발해(698~926)멸망 후 금나라(1115) 건국 사이 만주일대의 상황.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79131&sca=&sfl=mb_id%2C1&stx=eogkseo
                         
nests 14-09-07 16:48
   
왜 말을 정확하게 못합니까?
제가 무슨 말을하는지도 모르고...그러니 제말을 어떻게 반박해야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결국 지도상의 위치는 모르신단 말씀이죠?
처음부터 지도상 위치는 아시냐고 물어봤는데 계속 쓰잘데없는 자료만 갖다붙이시네요.
그것도 똑같은걸.
님이 링크한 자료에 나오는 공험진 방어사를 둔 윤관이라는 양반이 조선인이 아니라 고려인인건 아세요?

세종대왕이 공험진 위치를 잘 알았을거라고주장하시는데
조선왕조 실록에 세종대왕이 자기입으로 모른다고 말합니다.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세종21년기록입니다.


박근혜가 최남단 섬이름을 모릅니다. 대통령이 이름 몰라도 다른 자료로 확인가능하며
추후에 그 위치가 정확히 짚어지면 국경이 될수 있죠.
그런데 공험진의 위치가 정확히 나왔습니까? 지금도 공험진 위치 정확히 몰라서 우왕좌왕대고 있어요.
1. 어딘지 정확히 비정되지도 않은 공험진이 국경이라고 주장한다.

2. 조선왕조실록에 수십번은 더 등장하며 온갖 조선지도들이 증명하는 국경인 압록-두만을 국경으로한다.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2번을 고릅니다.
최소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압록-두만강을 조선의 국경으로한다고 명시한것은 인정을 하시나요? 수십번 나온 내용인데도 그건 죽어도 인정 못하시죠?ㅋ


그리고...
심양왕따위로 고려가 만주를 다스렸다는 근거를 대십니까?
야...그 몽골에 복속되어 민족역사상 유례없는 치욕의 역사를 찬란한 역사로 바꾸시다니

정안국은 좀 낫네요. 흥요국? 흥요국 몇년짜리에요? 그건 아세요?


진짜 한심한게...
1. 공험진은 어딘지 모름 ㅋ 세종대왕도 모름 ㅋ
2. 압록두만은 실록에 조선의 국경이라도 수도없이 나옴

그러나 1번만 믿는다능.

진짜 한심하죠. 왜그러세요 정말? ㅋ
실록 내용에서 1번 2번이 충돌하면 1번을 따를래요 2번을 따를래요?
제정신이면 1번 선택 안합니다.
왜. 다른 기록과 죄다 충돌하거든요.
아니 그전에 공험진이라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압록-두만으로 경계를 삼았따는 매끄러운 해석까지 가능할 정돕니다.
그런데 1번을 고집하면 정말 답없는 사람이죠.
반박은 좀 반박답게 합시다..

사이비나 재야사학이라는 놈들은 꼭 수많은 반대증거는 다 무시하면서
유리한거 한개에만 죽어라 매달려
                         
굿잡스 14-09-07 16:53
   
1. 어딘지 정확히 비정되지도 않은 공험진이 국경이라고 주장한다.

2. 조선왕조실록에 수십번은 더 등장하며 온갖 조선지도들이 증명하는 국경인 압록-두만을 국경으로한다.

>>>???ㅋㅋㅋ

말귀를 못알아 듣는건 당신 같은데요 ㅋㅋ

세종실록 지리지는 무슨 조선왕조에 실린 기록이 아닌줄 아심?? ㅋㅋ

이건 뭔 ㅋㅋ

뭔 엉뚱한 웃긴 소리를 계속 하심??

세종실록지리지는 무슨 외계인이 만든 사서임?? ㅋㅋ

어이없는. ㅋㅋ 원문까지 올려줘도 못 이해하시겠음? ㅋㅋ

영조시기의 제작된 지도나 영토인식이고 좀 제대로 알고나

어쩌고 쳐하시죠. 고려에 대한 기초 공부도 못한 사람이.쯧.

애초에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뭔지 개념 자체가 탑재 안된.

(우리가 수천년 만주일대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지금 분단되어있듯

혹은 향후 수십년,수백년, 천년뒤에는 또 우리의 영토가 얼마나 확대되

고 그에 따라 인식의 변화가 생길지는 늘 가변적인게 영토개념과 인식

임. 좀 제대로 알고 이야기하세요. 특정 몇개 넷에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 끌고와서 수준낮은 소리 그만하길 바람)
     
6시내고환 14-09-10 14:02
   
물길, 숙신, 읍루는 삼국시대와 삼국시대 이전이고요 여진은 조선시대에 불렀죠;;;역사 공부를 중국에서 하셨나봐요
mymiky 14-09-06 19:03
   
과거의 국경은 오늘날과 좀 다른 개념입니다.
과거의 국경은 면의 개념이고, 현재는 선의 개념이죠.

우리랑 만주족이랑 발원부터 역사적 공간까지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의 것이라고 하기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만주란 영역도 그렇습니다. 만주는 상당히 큰 공간입니다. 지금 러샤에 떼먹힌 연해주지방도
넓은 의미로는 만주영역이죠. 만주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예나 지금이나 삽니다.

우리가 남만주 일대에선 영향력을 가지고, 실제로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많이 살기도 했으나, 북만주까지 우리꺼라고 하기엔 어렵죠. 고구려? 발해?때 우리꺼라고 해도, 그때도 거긴 고구려와 발해내부의 소수민족들이 살던 공간이였고..
지금도 거긴 퉁구스계통의 오로촌이나 다우르족 같은 애들이 사는 동네임..
만주족이란 개념도 17세기에 생긴 개념이고, 그이전 여진이나 말갈과 친연관계가 있으나,
완전히 같다고 할수는 없습니다. 워낙 부족별로 나눠져 살던 애들이라..

제가 알고 있기론, 압록강 이남은 조선이고, 건너면 청이고 딱 나누어지는게 개념이 아니라, 그 사이에 중간지가 있었습니다. 열하일기에 보면, 요동의 책문을 지나야 청나라 땅이라고 하고, 거기가 본격적인 국경출입문이였습니다.

사실, 청은 중원으로 입관뒤에 만주를 봉금해 놓은 상태였고, 따라서 지들 고향이고 발원지라서 신성하게 여겼으나 현실적으론 관리가 잘 안 되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서, 윗분 말씀대로 백두산 정계비때 조선에게
갑질을 했다곤 하나, 실질적으로 정계비가 있어도 유명무실했고, 조선인들이 그거 무서워서 코앞에 있는 백두산 못 간것도 아니였죠.
gagengi 14-09-06 21:08
   
만주족의 시조가 신라 김함보입니다. 만주족자체가 한민족이 갈라져 형성된 민족입니다.
     
덤벨스윙 14-09-06 22:11
   
만주족은 죄다 김씨인가요?
만주족은 성이 하나 밖에 없나???????
          
nests 14-09-07 10:11
   
덤벨스윙/ 굿 ㅋㅋ
호부 14-09-07 16:17
   
고려시기엔 만주를 심양왕이 다스렸는데 이걸 고려왕이 겸직했죠. 즉 만주는 고려왕이 다스린곳입니다. 다만 이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때 명으로 넘어간거죠 즉 중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는 우리가 되찾아야될 잃어버린 영토라고 보시면 됩니다.
     
nests 14-09-07 17:01
   
심양왕은 몽고가 앉혀놓은 거죠....
따로 설명안해도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국사시간에 졸지만 않았으면 알테니...
          
나와나 14-09-07 17:10
   
하지만 원나라가 고려왕에게 심양왕을 시킨 것에 있어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남만주의 고려인들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죠

당시 남만주에 고려인들 상당수가 이미 존재했다는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여말선초에 있던 수많은 요동 정벌 시도의 배경에 이 점이 크게 작용했었고요
     
전략설계 14-09-08 10:01
   
고려시대 통틀어 함경도를 채 영토로 먹지 못했고..
윤관이 17만을 이끌로 여진의 영토로 쳐들어가 성을 쌓은 곳도 함경도고..
바로 수십년뒤 여진이 금나라를 세워 송을 밀어내고 중원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으니,
심양왕 하나 가지고 만주는 고려꺼 하기가 참 머하죠.
영토문제라기 보다는,
고려인을 많이 중앙에 불러다 쓴 원이 여진을 견제하려고 여진과 사이 안 좋은
고려를 끌여들였다고 봐야죠. 이이제이라고나 할까요.
충선왕은 원 황실 후계문제까지 개입했고, 기황후를 보더라도 고려인들이
원나라 중앙에서 있다보니, 심양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것이지.
실제로 여진을 통치할 군권을 쥐어준 것도 아닌 명예직일뿐..
현실은 쪼그만 땅댕이에서 고려의 북방영토도 원나라에 뺏긴 상황에서,
심양왕으로 만주는 고려꺼 하긴 거리감이 많네요.
          
굿잡스 14-09-08 20:31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그 경계선의 서북쪽은 당나라 이래로 압록을 경계로 하였고,동북쪽은 서춘령을 경계로 하였다. 대게 서북쪽은 고구려 경계에 미치지 못하였으나,동북쪽은 고구려의 경계를 넘었다.
                                                                                    <고려사> 권56,지1
 
http://db.history.go.kr/KOREA/document.do?recordId=kr_047_0010_0010
 

 
(원풍5년,1083) '선조 시기에는 여진이 항상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는데 뒤에 마행도가 고려에 속하게 되어 막혀서 끊겨 여진족이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지금 조정이 고려와 더불어 왕래를 하는데 고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여진이 만일 중국에 말을 팔고자 하면 마땅히 길을 빌리도록 허락하겠다'라는 조서를 내렸다.그러나 여진의 사신은 끝내 오지 않았다.
                                                                     

갑자일에 거란에서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파견하여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려사> 현종 세가, 17년 윤5월
 
문종 27년(1073) 4월 동여진 15주 족장들이 무리를 이끌고 잇달아 찾아와 군, 현을 설치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5월에는 서연진 족장 만두불(漫豆弗) 등이 동여진에게 했듯이 자신들의 지역에도 주, 군을 설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6월에 동북면병마사가 '여진족 1238호가 와서 우리 국적을 갖기를 원하니 주의 이름을 말하여 정하게 해달라'고 아뢰었다.



심양왕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것이지.
실제로 여진을 통치할 군권을 쥐어준 것도 아닌 명예직일뿐.. >?? ㅋㅋ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ㅋ. 원말기 조선을 세운 이성계 집안 자체가

왜 여진족세력을 휘하 무력기반으로 가지고 있었는지 공부좀 더 하길 바람.




--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인민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고려)뿐이다. 우리의 선왕 때로부터 그 후 거의 100년 가
 
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서로 장인과 사
 
위관계로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
 
야 할 것이며 어떤 나라보다 먼저 국교를 맺었으니 추숭하는 예절을 어찌 늦
 
출 수 있겠는가 --
 
1279년, 충렬왕은 고려에서 대도에 이르는 교통로에 고려인 촌락을 세우려고

원 쿠빌라이칸에게 청원하여 심주와 요양 사이  압록강 내에 고려 주민 400호

를 이주시키고 이르겐(伊里干=백성)이라는 특수 촌락 3개를 세우는데 이들 이르겐은

고려의 관할이었는데 훗날 이것이 충선왕이 고려왕이자 심양왕이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면서

이후 고려인들이 몰리게 되었고 그에 앞서 철령위 위치등이고 한반도 내로

보지 않는 시각들이 학계에서 나오기 시작함.


고려시대 국경은 요동지역까지 였다

 

http://cafe.daum.net/cybershinsi/57cm/1228?docid=xWj0|57cm|1228|20110718143103&q=%C3%B6%B7%C9%C0%A7%20%BA%B9%B1%E2%B4%EB
 
 
참고로 이것도 읽어보길 바람.
전략설계 14-09-08 09:49
   
여진이 나라의 기원을 '고구려'에 두고 있는 점은 기특한 점이고..
금태조가 신라계이고, 청황실 성이 애신각라로, 역시 신라계임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긴 하지만..

만주는 고구려 멸망이후 여진민족의 것이었다고 봐야 되고..
대고구려 전쟁에 쌀배달 한 것 밖에 없던 신라가 포기했던 북방의 영토를,
그나마 고려가 북진정책으로 서희때 의주지역을 회복하고, 윤관때 함경도를 찔꺽거려,
김종서가 함경도를 정식 영토로 흡수한 점은 이 나라를 잘한 것이나..

고구려 멸망이후로, 우리는 요동에 한번 간 것 밖에 없습니다. 이성계는 압록강도 건너지 않았으니까요..
1,4000년간 여진이 금과 후금을 세워 중원을 호령해,
이 여진이 우리 고려-조선이 아닌 이상, 만주 전체를 우리꺼라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만주는 우리꺼 주장은 해야죠. 그래야 간도문제나 조선-청 국경문제로
차후 후손들이 만주의 일부라도 차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죠.
마치 윤관의 동북지방 정벌처럼..
당장 실효적 영토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터닫기를 해놔야되고..
일본의 독도 주장도 전부 이런 목적이라..
     
굿잡스 14-09-08 20:16
   
만주는 고구려 멸망이후 여진민족의 것이었다고 봐야 되고.. >?? ㅋㅋㅋ

이 사람은 이전 <역사상 장군과 군왕에 대한 개인평> 어쩌고도 울 중고딩 국사만

제대로 배워도 안 할 웃긴 소릴하더만 ㅋ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1818&sca=&sfl=mb_id%2C1&stx=becaus

남북국시대 발해는 어디 쳐말아 드셨음??

5부 욕살중 하나인 서북부 최대 도시인 오골성 하나만해도 둘레가 16킬로에 이럴

정도의 대형 도시형성곽에 비사성부터 요동성, 안시성,  저 북부 부여성까지 천리장성

으로 이어져 중대형 밀집 성곽이 분포했던게 서북부 요동일대이고 이곳은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건재한 고구려 최대 저항지였고 발해에 흡수되기까지

(소)고구려로 활동하다 발해에 흡수되었구만.(굳이 당신에게 발해까지 설명해야

한다면 당신은 울나라 정상적 중고딩 국사 교육도 못배운 어느 나라 사람일 것이고)

그기에 위에도 지적했지만 발해(698~926)멸망 후 금나라(1115) 건국 사이 만주일대에도

고려시대

북방 상경용천부일대가 이름만 바뀐 동란국으로 이후 반란이

거세지자 고구려 서북 발해 지역인 요양일대로 대거 이동시켜 수십만이

살고 있었고 요동반도 역시 수십만호가 되었다는 기록이 버젓이

있는데 그기에 나머지 요나라 저항 반란 규합세력이 상경용천부 일대에

오사국을 세워고 그곳 왕은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

王)’  혹은 ‘발해염부왕’·‘발해왕'으로 여전히 불렀고

후발해국, 정안국, 흥요국등 금나라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엄연히

발해세력들이 고려시대에도 만주일대 여기 저기 발해, 고구려 계승국을

자처하면서 국호를 세우고 대외적 외교활동까지 하고 있었구만

이건 요즘 중고딩 국사만 배워도 발해부흥국들에 대해 배우는 상황인데 ㅋ

에휴..
전략설계 14-09-08 09:55
   
공험진 얘기도 나오는데..
윤관이 비록 함경도 위로 치고 갔다고 해도..
성 하나 짓지를 못하고 잠깐 갔다 온 상황에서 그것으로 그 지역이 우리꺼다 라고 하기엔
명분이 부족한 것이죠.

백두산은 원래 조선의 것입니다.
여진도 백두산을 중시여겨서, 청 강희제때 백두산에 조사관을 파견했는데..
이 조사관을 조선사람이 살해해서 난리가 났는데..
이 과정에서 청 강희제도 백두산이 조선의 것임을 인정했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과 중국과 국경이 압록강이 아니라,
압록강에서 수십킬로 윗 지역이라 당연히 백두산 전체가 조선의 것인 것입니다.
이 지역을 조선이 주민을 정착시키지 않은 것은 분쟁을 우려한 완충지대 성격이었기 때문에,
통일과정에서 중국과 영토분쟁도 이걸 우리가 정식으로 문제삼아야 합니다.
     
굿잡스 14-09-08 20:27
   
공험진(公嶮鎭)의 진이 뭔지나 좀 알기 바라고

조선 초기 조명간에 공험진 이남이 조선 영역으로 받아 들인게 단순히 윤관때

뿐인줄 아심?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5월 19일(기미) 4번째기사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윗 기록에도 보이지만 고려말 공민왕시절에도 이런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시키

면서 관리까지 관할 다스리는등 이런 실제 고려말 조선시기의 역사적 계승 인식

하에서 명 주원장에게도 당당히 관철시킨 부분임.
          
대은하제국 14-09-09 18:24
   
굿잡스님 덕분에 많은걸 배워갑니다

어디서 그런 지식을 배우셨나요?
지나가던이 14-09-19 15:04
   
굿잡스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자료 충분하고 훨씬 더 논리적이심  ^^b 
그리고 저~~ 위에 분이 무작정 재야사학, 사이비집단이라며  믿지말라고 비난하시는데.......ㅎㅎㅎ
좀 어이없어 마니 웃고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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