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17일 이성계 왕위 등극.
이성계 등극 직후 정도전 하정사 사은사신으로 3번째로 명에 가서 주원장 알현, 주원장의 오만함과 조선에 대한 무리한 공물 요구에 분노하여 귀국길에 산해관을 넘으며 다음에 이 곳을 넘을 때는 군사를 데리고 넘을 것이라고 언급함, 이 때 부터 중원정벌에 대한 의지를 가졌다고 판단 된다.(정도전은 려말의 대표적인 친명파로 공민왕의 죽음을 명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당시 친원파로서 최고의 권신이던 이인임의 미움을 샀으며 직후 원의 사신이 고려를 방문하자 이인임이 오히려 정도전에게 접대를 지시했고 그는 자신에게 원의 사신 접대를 맞긴다면 죽이든지 포박해 명에 보내겠다고 발언하며 극렬한 반대를 함으로서 결국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후 10여년 간이나 야인으로서 시련을 격게 되었으나 이는 친명, 친원의 문제가 아니라 위국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후 조선이 건국되고 명이 자국에 대한 과도한 제재를 가하자 다시 주저 없이 중원정벌이라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명의 태자 주표 40세에 요절.
●1393년 명 북원의 주력을 몽골 초원에서 괴멸시킨 바 있는 개국공신인 남옥의 옥으로 2만여명이 연루되어 죽음.
●1394년 정도전 2년간 한양 도성의 축조를 주도함.
●1395년 일부 세력의 국가기밀 누설로 명에서 표문과 전문에 명을 모욕하는 글귀가 있다는 표전문 사건 발생, 명제 주원장은 주모자로 정도전을 지목하고 정도전의 신병을 명으로 넘기기를 요구.
●1396년 중원정벌 사전작업으로 사병혁파 시작.
사병혁파 반대파인 이방원이 정도전의 중원정벌을 사신으로 가는 하륜과 설장수를 통해 명에 밀고함.
●1397년 명이 사은사를 통해 정도전을 '조선의 화'라고 지적하고 정도전의 해임과 중원정벌 중단을 경고 함.
●1397년 명의 압박으로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동북면도순무순찰사가 되어 성과 보루를 군현및 참을 구획하고 이름을 개정하고 돌아온 후 2월 이성계의 중임으로 다시 복직한 정도전은 오히려 공신과 호족세력에게서 몰수한 사병들을 의흥삼군부에 편입시켜 대대적인 진법훈련을 실시한다.
●1397년 4월 중원정벌 계획을 명에 누설한 설장수와 권근의 문책을 요구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음.
●1397년 6월 정도전, 사병혁파등으로 확보한 병력으로 양주목장에서 대대적인 진도훈련을 하며 남은을 통해 중원정벌의 준비가 완료 되었으니 정벌군을 출정 시키기를 이성계에게 주청했으나 이성계의 반대로 무산 됨.(조준의 반대가 있었으나 사실상은 이성계의 정벌 의지가 없었음.)
●1397년 12월 다시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를 수리했으며, 비밀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인구 수와 군관 수를 점검하고 되돌아왔음.
●1398년초 그는 왕에게 상무정신을 함양할 것을 건의하고 병법과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중원정벌의 준비를 더욱 강화한다. 바로 그는 태조에게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으로 합치고, 사병을 모두 압수하며,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개인이 거느린 사병 집단을 국가에 귀속시킬 것을 건의하며 일부 공신과 왕자가 거부하고 있던 사병혁파의 완전한 마무리를 위해 박차를 가한다.
●1398년 6월 24일 주원장 사망, 22세의 건문제 등극.
●1398년 8월 26일 정도전, 남은의 집에서 중원정벌을 논의하다 이방원의 기습으로 사망함.
●1399년 1월 명의 연왕 주체 정난의 변 일으킴.
●1402년 연왕 추체, 결국 난을 성공 시키고 황제로 등극, 연호를 영락이라 함.
●1405년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처한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20만 군으로 명침공 중 사망.
정도전이 사망할 당시 주원장의 죽음을 알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원장은 1398년 6월 24일에 사망한 것이 정설이나 일부 기록에 10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 그는 사망 당시 26명에 이르는 아들들 중 외방의 영지에 분봉되어있던 24명에게 각자의 영지를 떠나지 말고 임무에 충실하라는 유언까지 남겼을 정도로 당시 손자 주윤문의 황권 위협상황을 우려했다.
또한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과 조선은 일반적으로 90일이 걸리는 거리였으므로 황제의 죽음에 대한 당분간의 비밀유지나 정보전달 체계상 정도전은 사망전에 주원장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주원장은 주변국의 인물중 몽골의 티무르와 조선의 정도전을 가장 경계했다고 한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고 정도전이 주원장의 죽음을 확인했다면 이성계를 설득시킬 명분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결국 정도전의 몫은 명의 연왕 주체가 가져간다.
연왕 주체는 1399년 주원장 사망 직후 불과 10만의 병력으로 건문제 정권을 무너트리는 정난의 변을 성공시켜 영락제로 등극하고 명의 최고 전성기를 이끄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당시 명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알 수 있고 조선이 군사를 일으켰으면 성공가능성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장기 내란 중인 명을 배후에서 공격했다면 요동정도는 쉽게 확보했고 당시 명의 중심은 남경이었기에 최소한 황하이북의 중원은 충분히 도모해 볼 만 했다.
정도전은 명과의 전쟁 준비중 전쟁의 목표가 요동이 아닌 중원임을 분명히 밝히고 이성계에게도 외이가 중원을 정벌한 많은 사례를 설명했다.
즉 정도전은 대명 전쟁목표를 분명히 중원으로 설정했고 명칭도 중원정벌이라 하였다.
이는 당시 주원장이 곽자흥의 홍건적에 가담하여 장강 이남 지역을 근거로 명을 건국했고 대도를 점령한 후에도 계속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기에 정치의 중심은 장강 이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설정한 목표로 보인다.
사신으로 3차례 남경을 갔다오며 명의 국토를 종단해본 정도전은 장강이나 황하 이북의 중원은 명의 정치 중심에서 벋어나 있고 여전히 북원의 위협이 있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 것이다.
그래서 대명 전쟁의 1차 목표를 중원으로 설정했는데 이는 대명 전쟁의 목표가 비록 명을 점령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5호16국과 요, 금이 지배했던 것과 같이 분명히 장강 이북의 대륙 중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당연히 요동이 목표가 아니었다.
그리고 북원과 티무르 등이 호시탐탐 명을 노리고 있었던 국제정세상, 개국공신 숙청으로 수 만명이 연루되어 죽음으로서 경험 많은 지휘관이 드물게 된 데다 주원장의 죽음으로 인한 국내정세의 불안, 수 년간의 훈련으로 잘 준비된 조선군의 상황등을 고려하면 국내 국제 그리고 상대국의 내분 등 전쟁의 3박자가 다 맞아떨어진 그 어느때 보다 가능성이 있는 정벌상황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 일부에서 요동정벌이란 명칭을 쓰고 있는데 이 명칭은 사실이 아닌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