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의 위치에 대한 여러가지 학설
1. 경상남도 설(현 강단사학계 통설)
2. 대마도설
3. 북규슈설
4. 히로시마,오카야마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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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환선비동이전 왜전 -中-
본래 그 나라는 남자가 왕이 되어 7~80년을 지낸 뒤에 왜국에 난이 일어나 여러 해 동안 서로 공벌하니 이에 함께 여자 한명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름은 비미호(卑彌呼)라 하는데, 귀도를 행하여 뭇 사람들을 능히 미혹하고 나이가 이미 많으나 남편은 없고 남동생이 있어 치국을 보좌하였다. 왕이 된 이래로 그녀를 본 사람이 적었고 여자종 천명에게 시중들게 하며 오직 남자 한 명이 있어 음식을 공급하고 (비미호의) 말을 전하면서 출입하였다. 거처하는 궁실에는 누관(누각), 성책을 엄히 설치하였고 늘 병기를 지니고 수위하는 자가 있었다
위 기록에 따르면 원래 왜국은 남자가 다스리는 나라였는데 큰 난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 비미호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다시 말하자면 당시 여러 소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던 고대 일본열도를 비미호라는 여자가 통일을 한 것이죠. 비미호는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어로는 히미코라고 합니다. 비미호에 관환 기록은 동이전 뿐만 아니라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에도 나타납니다.
삼국사기 -中-
20년(서기 173) 여름 5월, 왜(倭)의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위는 아달라이사금 20년조의 기록으로 비미호여왕이 중국측 기록 뿐만 아니라 우리측 기록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이상한 점은 정작 일본측 기록인 일본서기에서는 비미호라는 왕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아마 비미호가 일본왕의 조상이 아니였기 떄문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는 일왕이 고대부터 만세일계로 쭉 이어져 왔다는 일본인들의 의식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 자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욱 더 이상한 점은 위지동이전 한(韓)조에 나옵니다.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조 中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위에 굵게 칠한 부분이 문제가 되는 부분입니다. 마한의 소국들 중에서는 비미국(卑彌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기한 점은 비미호의 비미(卑彌)와 비미국의 비미(卑彌)가 서로 음과 뜻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당시에는 여성들에 대해 기록할 때 그 여성의 성씨나 가문 혹은 태어난 나라의 이름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였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웅녀가 있겠네요.
즉 추론하자면 마한의 여러 소국들 중 하나였던 비미국이 정치적 변동(아마 백제의 침략이 주된 원인이라 생각함)으로 인하여 일본열도로 이주하였고 이주한 도래인 출신들 중 하나가 바로 비미호(히미코)여왕이라는 것이죠. 이는 일본열도 분국설의 근거가 됩니다..
일본열도 분국설이라... 다음 임나 일본부로 넘어가겠습니다.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왜가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과 전쟁을 하거나 사신이 오갔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임나는 가야라는 것이 현 강단사학계 통설.. 즉 고대에 왜는 한반도에 진출하여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과 전쟁이나 사신교류 등의 접촉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특히 임나에는 왜의 관리가 파견된 기록이 보이므로 왜가 가야를 지배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임나일본부설은 60년대에 북한의 김형석부터 시작해서 쭉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김형석은 고대조일관계사를 발표해 일본서기에 왜와 전쟁을 했거나 사신 왕래를 했다고 기록된 부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는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에 있었던 나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반도에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사람들이 왜(倭)열도로 이주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들의 조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일본서기의 내용 대부분은 왜와 이들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였습니다.
이 나라들은 일본열도에 세워진 우리민족의 분국으로써 고대에 우리가 오히려 일본열도를 지배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김형석 이후 남한 학계에서는 일본서기는 원래 백제의 역사인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로 변조한 것으로서 임나일본부는 백제가 가야에 설치했던 기구였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임나일본부가 대마도, 북규슈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부 일본학자들은 슬그머니 그들의 원래 주장(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를 지배했던 기구)을 변형하여 임나일본부는 왜가 가야를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가 아니라 가야와 통상을 하거나 외교통로로 이용하기 위해 가야에 설치해 놓은 기구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 주장은 우리 학자들 가운데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지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만 그 성격을 달리 규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작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사용되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한반도에 있었던 가야가 멸망한 뒤까지도 왜는 계속 임나와 교류를 가지었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한반도의 가야는 서기 56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는데 일본서기에는 그 후 서기64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임나와 사신 왕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서기에는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야가 있었던 경상남도 북쪽에는 바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임나와 가야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죠. 애초에 아직 나라도 제대로 못세우고 제대로된 철기도 없던 놈들이 바다를 건너 우수한 철기를 사용하고 있던 한반도남부를 지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임나의 위치는 어디인가? 바로 일본열도에 있었습니다. 일본열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계 지명들과 신찬성씨록에 써진 일본 명문가 가운데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 출신이 많다는 점이 근거가 됩니다. 또한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한반도 남부와 같은계통의 고고학적 유물도 근거가 됩니다.
일본 후쿠오카현에서 출토된 무문토기
수혜기라 불리는 이 질그릇은 서기 5세기 초반에 속하는 것으로써 가야의 질그릇으로부터 일본의 특징을 지닌 질그릇으로 변화되어 가는 초기의 것인데 아직도 가야 질그릇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