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고. 영어로는 fungo라고 쓴다. 수비 훈련을 위해 (주로 코치가) 배트로 공을 쳐주는 걸 말한다. 예전 야구인들은 노크(knock)라고 불렀다.
누가 던져주는 게 아니다. 쳐주는 사람이 혼자서 해야 한다. 공중으로 약간 띄웠다 내려오는 걸 맞춘다. 얼핏 쉬워 보이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야구판에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한창 때 홈런왕까지 했던 모 씨가 코치로 부임해 첫 훈련이었다. 외야수들에게 펑고를 쳐준답시고 배트를 잡았다. 수비는 긴장했다. 워낙 장타자였기 때문에 혹시 너무 멀리치지 않을까. 펜스랑 부딪힐 정도면 안되는데….
그런데 웬걸. 야무진 스윙은 허공을 갈랐다. 공은 바로 앞에 ‘툭’. 외야수들은 글러브로 입을 가렸다(키득키득). ‘어랏?’ 모 씨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또 한 번. 눈을 부릅뜨고 돌렸다. 하지만 붕붕 소리만 외로웠다. 배트는 네번째가 돼서야 겨우 공과 만날 수 있었다.
감독/코치의 펑고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거기도 솜씨에 따라 레벨이 나뉜다. 진짜 잘 치는 사람은 한계 지점까지 정확하게 보낼 줄 안다. 즉, 수비수가 전력으로 따라가서 간신히 잡을 만큼의 속도와 거리를 맞춘다. 그래야 훈련 효과가 산다. 누구는 100개를 받아도 멀쩡한데, 누구는 20~30개만 받아도 KO되는 차이를 만드는 게 능력이다.
야신은 이 분야에서도 유명하다. 펑고를 잘 치기 위해 따로 운동을 한다고 할 정도다. 그 실력으로 스프링캠프 때면 몇몇은 초주검을 만들어놓는다.
오늘은 야신 못지 않은 펑고의 달인 얘기다.
2루수 좌우 이동 훈련시키기
4회, 그러니까 두번째 타석이다. 토론토 현지 중계팀이 그에 관한 얘기에 한창이다. “KBO리그와 가장 큰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니까 공의 속도라고 하더군요. 빠르면서 변화가 많다구요.” 와중에 선발 애런 산체스는 94마일짜리 패스트볼을 팡팡 꽂으며 기를 죽인다. 와, 저 공을 어떻게 쳐. 첫 타석에도 96마일에 힘 없는 좌익수 플라이였다.
볼카운트 2-1. 4구째 스트라이크 잡으려 들어온 공은 93.7마일이었다. 그냥 패스트볼이 아닌 투심이다. 배트가 돌았다. 아주 좋은 컨택은 아니었다. 맞는 순간은 얼핏 평범한 땅볼로 보였다. 그러나 타구를 쫓던 2루수 드본 트래비스의 발걸음이 황급해진다. 나중에는 몸까지 날렸다. 그래도 막지 못한다. 우익수 앞으로 빠져 나간다. 1루와 2루 사이를 절묘하게 통과하는 안타였다.
1차 테스트에 불합격한 트래비스. 두번째 훈련 시간은 6회였다. 1사 후 주자 없는 상황. 초구 볼에 이어 2구째가 들어온다. 조금 아까 4회에 쳤던 공과 비슷한 게 온다. 93.9마일짜리다. 역시 휘어짐이 있는 투심 패스트볼이다.
이번에는 잘 맞았다. 타구 속도가 더 빠르다. 또다시 우전 안타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번은 안 당한다. 트래비스는 벌써 자리잡고 기다린다. 아마 포수의 사인을 보고 대비한 것 같다. 4회처럼 당하지 않으려고 어느 틈에 몇 걸음 옮겼다. 빠져나가야 할 지점에서 정확한 포구가 이뤄진다. 그리고 환희에 찬 표정을 짓는다. 어려운 과제를 통과한 모습이다. 영리한 친구 같으니라구.
3루수 맨손 캐치 & 러닝 스로우 훈련시키기
2루수는 됐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 이제 3루수 차례다. 펑고의 달인이 교습생을 바꿨다.
8회 초 2사 후. 상대 투수가 달라졌다. 호아킨 베노아가 나왔다. 왼손 타자에는 줄기차게 체인지업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역시나 초구부터 84마일짜리가 왔다.
가운데로 오는 줄 알고 스윙이 출발했다. 그런데 밖으로 휘면서 떨어진다. 그렇다고 포기할 달인이 아니다. 허리가 빠지면서 스윙이 따라붙는다. 어정쩡하게 걸린 타구는 힘 없이 데굴데굴. 3루수 조쉬 도날슨이 전력으로 뛰어든다. 맨손으로 잡아 몸을 날리며 1루에 던져본다. 간발의 차이로 세이프.
토론토 벤치가 흥분한다. 의심의 눈초리로 1루심을 째려본다. ‘아웃 아냐?’ 인터폰을 들고 긴급 통화. 하지만 영상 검토실에서 말린다. 헛수고 하지 마시라고.
3루수 도날슨은 억울하다. 이틀 전에도 그랬다. 눈 뜨고 당했다.
벤치에서 시키는대로 시프트를 걸었다. 좌타자니까 당연히 유격수 쪽으로 한참 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순진하게 생긴 25번 타자는 감쪽 같이 속였다. 갑자기 번트를 대고 뛰는 게 아닌가. 그런 게 어디 있나. 볼카운트도 3-1로 유리한 데. 생각도 못했다. 결국 대는 순간 포기해야 했다. 괜히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 완벽한 코스였다.
그래서 오늘은 시프트도 포기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윙하는 척 하면서 굴리다니…. 타자가 거꾸로 야수한테 체인지업을 건 셈이다. (신기하게도 3루수들 훈련시키는 펑고 메뉴에는 이런 동작도 들어있다. 강하게 치는 척하다가 또르륵 굴리는 페이크 말이다.)
두 번이나 당한 도날슨은 고민이다. 다음에 또 만나면 수비 위치를 어디로 잡아야 하나. 갑갑하기 이를 데 없다.
오로지 운? 우리가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이상하다. 그가 나오면 상대 수비가 난리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잘 하면 잡을 것 같은데, 그게 안된다. 요리 빠지고, 조리 빠진다. 왼쪽으로 가 있으면 오른쪽으로 치고, 오른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때린다.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면 키를 넘기고, 물러서면 앞으로 굴린다. 많이 차이나는 것도 아니다. 딱 한 걸음씩 모자란다. 그러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이게 실력이라고?” 사람들은 인정하기 싫어한다. “운이겠지.” 그렇게 넘긴다.
그럴 지 모른다. 하긴 자기 팀 감독도 그렇다. 멀티 히트를 쳤는데도 좌투수가 나오니까 대타 교체다. (그 대타가 삼진을 당해서 문제지만.) 매 게임 안타를 치고, 출루를 하지만 선뜻 완전한 신뢰를 주지 못한다.
물론 수비 위치에 따라 타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리는 없다. 손으로 들고 치는 펑고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타자는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한 두 걸음 차이를 뚫어낼만큼 타구 속도가 남다른 것도 아니다. 도대체 이론적으로 설명할 근거는 충분치 않다.
하지만 우연도 한두번이다. 193타석이다. 56개나 수비가 잡지 못할 타구를 날렸다.
이 정도 쯤 되면 재수나 플루크만으로 해석서는 안된다. 그건 통계학을 무시하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충분히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할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