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발 경쟁에 있어 핵심이 될 1일(한국시간) 경기에서 6이닝 1실점 호투를 펼친 류현진. 많은 이들이 그 원인으로 패스트볼 구위가 돌아온 점을 꼽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비결로 지난 등판 때부터 급격히 구사 비율이 늘어난 슬라이더를 꼽고 싶다. 류현진은 고속 슬라이더를 마치 커터처럼 활용하고 있다.
컨디션이 좋은 날 류현진(30, LA 다저스)의 구종 패턴은 '변화무쌍' 그 자체다.
어떤 이닝에선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삼다가도 어떤 이닝에선 기습적으로 커브를 이용해 카운트를 잡는다. 다른 이닝에선 변화구는 미끼일 뿐 패스트볼로 맞혀 잡기에 주력한다. 1일(한국시간) 경기가 그랬다. 1회 패스트볼을 낮게 제구하며 신중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던 류현진은 2회엔 체인지업을 떨어뜨리다가 3-4회엔 높은 패스트볼을, 5-6회엔 다시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삼았다.
그중 유독 돋보이는 구질은 패스트볼이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 MLB.com을 기준으로 오늘 경기 류현진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0.8마일(146.1km/h). 이는 올해 류현진이 등판한 9경기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늘어난 구속에 비례해서 구위도 남달랐다. 유난히 조용한 부시 스타디움에서 류현진의 공이 포수미트에 꽂히는 소리가 팡, 팡 들렸다.
물론 상대적으로 패스트볼에 가려졌을 뿐, 이번 경기에서도 류현진의 주무기는 체인지업이었다. 체인지업은 이번 경기에서도 류현진이 던진 모든 구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29.9%, 23구)을 차지했고, 아웃카운트를 잡은 횟수(7아웃)도 가장 많았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구종에 주목해보고 싶다. 그 구종은 바로 슬라이더다.
지난달 19일 불펜 등판 때부터 구사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 슬라이더가, 그 자체로서 위력이 있을뿐더러 다른 구종의 위력을 배가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류현진의 고속 슬라이더는 마치 커터처럼 쓰이고 있다
1일 경기에서 류현진의 슬라이더 평균 구속은 86.3마일(138.9km/h)을 기록했다. 그중에서 74.3마일을 기록한 공 1개를 제외하면, 슬라이더 구속은 87.0마일(140.0km/h)까지 늘어난다. 1일 경기에서 기록한 패스트볼 평균 구속에 비해 6.1km/h 낮다. 이는 평균적인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구속차(!3.4km/h)를 고려했을 때, 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 수치다.
반면, 일반적으로 좌투수가 던진 슬라이더의 횡 무브먼트가 -1.64인치(-4.17cm)인데 반해, 1일 류현진의 슬라이더는 횡 무브먼트 1.41인치(+3.58cm)를 기록했다. 좀 더 간단히 말하자면, 류현진이 던진 슬라이더의 횡 무브먼트는 일반적인 투수보다 7.75cm만큼 '덜' 휜다. 따라서 헛스윙을 유도하기엔 불리하다(헛스윙 비율 체인지업 18.7% 슬라이더 8.2%).
대신 앞서 말한 대로 6.3km/h만큼 빠르기에 생기는 장점이 있다. 류현진의 슬라이더는 그의 구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12.24%)로 땅볼을 유도하고 있다. 현재까지 류현진의 슬라이더를 쳐서 뜬공을 만들어낸 타자는 아무도 없다(뜬공 비율 0.0%). 즉, 류현진의 고속 슬라이더는 '빗맞은 타구'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
어렵게 설명했지만, 우리는 이런 류현진의 고속 슬라이더와 흡사한 특징을 가진 구종을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컷 패스트볼이다(리그 평균 커터와 포심의 평균 구속차 7.2km/h). 만약 류현진의 구속 슬라이더를 컷 패스트볼이라고 생각한다면, 최근 류현진의 포심-투심 비율이 20%대로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류현진이 호투를 펼치는 원인도 이해할 수 있다.
컷 패스트볼(이하 커터)은 브레이킹볼로 분류되는 슬라이더-커브와는 달리, 포심 패스트볼-투심 패스트볼과 함께 패스트볼 계열 구종으로 분류된다. 불펜 투수들은 아예 포심-투심이 아닌 커터를 주력 패스트볼로 던지기도 한다(브라이언 쇼, 마크 멜란슨 등). 선발 투수 중에선 포심-투심 비율과 커터 비율이 1:1 가까이 되는 선수도 있다(제임스 실즈, 스캇 펠드먼 등).
이들의 특징은 대부분 '맞혀 잡기'에 주력하는 투수들이라는 것. 류현진이 슬라이더 비율을 20% 이상으로 늘린 최근 두 경기 10이닝 동안 6탈삼진으로 평소보다 적은 삼진을 잡아냈지만, 경제적인 투구를 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구종 분류 업체가 슬라이더로 분류하건, 류현진이 본인의 구종을 뭐라고 명명하건, 그의 고속 슬라이더는 마치 커터처럼 쓰이고 있다.
늘어난 고속 슬라이더 비율, 선발 경쟁 속에서 류현진이 찾아낸 해법
올 시즌 류현진의 성적은 패스트볼 비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류현진은 패스트볼 비율이 40% 이상인 4경기에서 평균자책점 6.98을 기록했다. 반면, 패스트볼 비율이 40% 이하인 5경기에서는 평균자책 1.69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선발 투수가 패스트볼 비율이 50% 이하이면 문제가 있다'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류현진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그러나 류현진의 고속 슬라이더가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말하는 커터라면, 류현진의 패스트볼 비율엔 문제가 없다. 올 시즌 류현진의 포심-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처럼 활용하는 고속 슬라이더 비율을 더하면 57.5%다. 이는 커터를 15% 이상의 비율로 던지는 선발 투수들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구종 비율이기 때문이다.
고속 슬라이더 비율이 급격히 늘어난 최근 경기 3경기로 한정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늘어난 고속 슬라이더 비율이야말로 치열한 선발 경쟁 속에서 류현진이 찾아낸 해법일지도 모른다. 류현진의 고속 슬라이더를 주목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