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의 두 번을 비록 지난날 원정했으나, 감히 고구려 요수를 건너지 못했고, 백제 큰 바다의 물결을 넘을 수 없었다. 해마다 자주 병사를 보냈으나, 중국이 부서지고 소모되었다. 이미 지난날의 일이지만, 나는(당 고종) 그것을 후회한다.
- 『册府元龜』 卷981 外臣部36 備禦4 唐 高宗(678)
천년사직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오늘날 군 최고 합참의장격인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로 거란 일부 부족과 투항하는 초유의 사태로 내부분열이 발생.
당 고종은 2차 고당 대전에서도 대패를 당하자 결국 지지를 치고 백성들에게 이제는 병장기를 내려놓고 농사나 지어라고 선언했다
초유의 고구려 군권 최고 자리에 있던 연남생의 투항에 처음에는 믿지를 않고 재차 확인하고는(연남생도 2차에 다시금 고구려가 승전국이 되면서 이제는 나름 홀가분한 마음으로 외유 시찰을 나갔다 형제에게 통수 맞고 급당황 격분)
이후 당나라도 국력을 쥐어짜내면서 3차 대전이 급발발.
(연남생에 의해 고구려의 허실과 요충지를 알고 요동을 따라 점으로 치고 들어가 평양을 공격. 이미 내부분열로 각성마다 동요가 일어나면서 이전같은 제대로된 싸움도 되지 못함)
그러나 이런 당나라의 3차 대전과 다시금 무리한 요동 정벌은 결국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키면서(여전히 요동 각지의 고구려 성들은 건재 동북방은 제대로 밟아보지도 못한 당은 끊없는 저항과 소요에 부딪치면서 얼마가지 않아 평양에서 요동 요서로 밀려나게 됨)
토번의 성장으로 침탈이나 절도사의 난등( 고구려계 이정기의 제나라(등 세금도 내지 않는 번국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면서)에 당군주가 도망단니게 되는 촌극 발생)
중후기로 가면서 소위 당나라 부대라는 별칭을 가져오게 됨.
그러면서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탈출 이후 요동의 고구려 세력을 다시 규합 30여년이 안되어 대발해를 세우고 남북국 시대를 맞게 되는 흐름.
이후 발해 무왕은 당이 간섭을 해오자(고구려시대에 고당 전쟁에도 참여하는등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으로 있던 흑수말갈에 대한 획책을 시도하자
발해는 흑수말갈을 복속 아예 직접 지배지화. 이후 신라계가 흑수부락에 들어가서 분열된 흑수부에 선진 규범을 통해 규합한게 신라 고려 교체기의 김함보.
발해 멸망 후 신라계 황제 아골타와 발해인 연합의 대금이 등장. 발해인은 금황실의 주요 외척으로 이후 반요의 요와 송까지 멸망시켜버리면서 대금은 북방의 패자로 등극)
해상으로 당나라 산둥 등주의 해군시설을 초토화시켜버리고 요서로 밀어버림.
정강의 변 : 서토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