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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13 04:11
역사는 반복? 세종대왕 [대마도 정벌] 대한민국 [일본 정벌]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1,556  


세종대왕 고찰 - 색인 [대마도 정벌]과 [계해 조약]


대마도정벌 [對馬島征伐]

고려말·조선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세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한 일.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대마도주는 무네씨[宗氏]로 이들이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며 살았는데,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국내의 내환으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고,

빈민이 증가하여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의 공급이 요청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구의 창궐이 극심하였다.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추진된 대마도정벌은 수군의 확충과 화기의 발달이 뒷받침해 주었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하였고,

현종 때에는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하여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으며,

말기에는 수군을 재정비하였다.

화기는 1377년(우왕 3) 최무선(崔茂宣)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20여 종을 제조하였고,

후에 화포를 전함에 배치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

최초의 대마도정벌은 1389년(창왕 1) 박위에 의해서였다.

박위의 정벌은 특히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의 소굴이 대마도이기 때문인데,

그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00여 척과 관사·민가를 불태웠다.

조선의 대마도정벌은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에 있었다.

태조는 조선 초에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였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은 1419년의 기해동정(己亥東征)이었다.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비인현(庇仁縣)의 도두음곶(都豆音串)의 침탈이었다.

이에 세종은 이종무(李從武)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중군을 거느려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나아가 왜구가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출 처 : 엠파스 백과사전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245330&v=42 )

세종대왕의 대마도(쓰시마) 정벌

세종대왕의 [대마도 정벌 출정문]

왕은 말하노라,

무력만 일삼는 것은 성현이 경계하는 바이다.

죄를 성토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다.

대마도란 섬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다.

험하고 궁벽하며 협소한 곳이므로 왜놈들이 모여 사는 것을 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감히 개처럼 도둑질하고 쥐처럼 훔치는 흉계를 품어서

경인년부터 변경에서 방자하게 도둑질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군민을 살해하고 우리 백성을 포로로 하였다.

가옥을 불태워 고아와 과부들이 바다 섬속에서 울고 해매지 않는 해가 없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이 분통이 터져셔 팔뚝을 걷어 붙이며

놈들의 살을 씹어 먹고 놈들의 살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적이 몇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께서

용이 날아오르는 기운을 받아 위엄과 덕을 사방에 입히어 신의로 무마하고 편안하게 하셨다.

그런데도 흉하게 탐내는 버릇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여

병자년에 동래에서 우리 병선 20여 척을 약탈하고 군민을 살해하였다.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에도 병술년에는 전라도에서, 무자년에는 충청도에서

배에 실은 양곡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까지 죽이기도 하였다.

그 포악함이 극도에 달하였고 두 번이나 제주에 들어와 살상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사람을 탐내는 성낸 짐승이 간교한 생각만 품고 있는 것이다.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내가 오히려 그 죄악을 용서하여 함께 견주지 않고 굶주린 것을 진휼하였다.

통상도 허락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주어 함께 살아갈 것을 바랐다.

이제 또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

몰래 비인포에 들어와 인민 3백여 명을 죽이고 노략질하며 병선을 불태우고 장사를 살해하고

황해에서 평안도까지 이르며 우리 백성을 소란하게 하고 장차 명의 지경을 범하려 하였다.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고 천상을 패란한 것이 어찌 심하지 않는가!

지금 왜구가 제 마음대로 탐욕과 해독을 부리어 백성을 살육하며 스스로 하늘의 재앙을 부르는 구나.

그래도 참고서 정벌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지금 농사철을 맞이하여 장수에게 명하고 군사를 내어 그 죄악을 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나쁜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백성을 재앙에서 건지고자 이렇게 이해를 열거하여

내 뜻을 신민에게 알리노라. 글이 실린 문서 [동문선]

출 처 : 엠파스 dwban22님의 블로그 ( http://blog.empas.com/dwban22/1928236 )

[조선 전기의 대일본 관계] 중에서 발췌

대마도 정벌의 주역 이종무

이종무 [李從茂, 1360(공민왕 9) ~ 1425(세종 7)]

조선 초기 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1381년(우왕 7)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정용호군이 되고,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있을 때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 2 차왕자의 난 때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무찌르고

좌명공신 4 등으로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좌군총제에 이어 남양(南陽)·수원(水原)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등을 지낸 뒤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로 숭록대부에 올랐다.

그해 전함 227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정벌, 찬성사에 올랐으나

김훈(金訓)·노이(廬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죄로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

이듬해 복관되었다.

1421년 부원군에 봉해지고 사은사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출 처 : 엠파스 백과사전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719970&v=42
 )

대마도 정벌의 결과

계해조약 [癸亥條約]

1443년(세종 25) 변효문(卞孝文) 등이 쓰시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419년(세종 1) 한국 연안을 약탈하던 왜구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 소굴인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그 뒤 조선에서 통교를 중단하여 식량과 생활필수품이 부족하게 되자

쓰시마도주는 여러 차례 왜구의 금압(禁壓)을 서약하면서 통교를 간청하였다.

1426년(세종 8) 조선은 삼포(三浦)를 개항하고 무역을 허락하는 한편,

삼포와 서울에 왜관(倭館)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들의 숙박과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 뒤 조금씩 교류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나가다가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첨지중추부사 변효문이

귀환길에 쓰시마도주 소사다모리[宗貞盛]와 구체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계해조약으로 그 내용은

① 세견선은 50척으로 한다.

②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특송선(特送船)을 파송할 수 있다.

③ 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체류기간은 20일로 한하되

상경(上京)한 배를 지키는 간수인(着守人)은 50일로 한하며 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한다.

④ 고초도(孤草島)에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문인(文引)을 받고 와서 어세(漁稅)를 내야 한다.

⑤ 세사미(歲賜米)는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석(石)으로 제한한다는 것 등이었다.

출 처 : 엠파스 백과사전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067700 )

대마도 정벌과 관련한 <참고> 자료들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세종 원년(1419) * 대마도 정벌 - 기해 동정
세종 25년(1443) * 계해약조 체결

-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세사미두 하사

- 매년 50척의 세견선 인정

중종 5년(1510) * 삼포왜란으로 통교 중단

중종 7년(1512) * 임신약조 체결 -> 교역 재개

- 3포의 왜인 거주 금지

- 대마도 세견선 반감(25척)

- 대마도주 세사미두 100두

중종 39년(1544) * 사량진 왜변으로 통교 중단

명종 02년(1547) * 정미약조 체결 -> 교역 재개

명종 10년(1555) * 을묘왜변 발생 -> 비변사 상설화

보충 설명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고려 말 왜구는 단순한 해적 차원이 아니라 대규모 부대를 이루어 침략하였다.

한창 때는 개경을 위협할 정도였다.

왜구는 서남해 연안 지역을 집중적으로 약탈하였기 때문에

국가 재정과 농민 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들고, 박위가 쓰시마를 정벌하여 한 때 왜구의 기세가 크게 누그러뜨려졌지만

조선 초에도 자주 침략을 해왔다.

조선 왕조(세종 원년, 1419)는 이종무가 이끄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어 쓰시마를 정벌하는 한편

계해약조를 맺어(세종 25년, 1443) 그들이 필요한 물품을 교역하는 교린 정책을 펼쳤다.

자료 제공 - [심마니 한국사]

출처 : 엠파스 dwban22님의 블로그 http://blog.empas.com/dwban22/1928236
[조선 전기의 대일본 관계] 중에서

대마도 정벌의 원조(?) 박위

박위 [66, ?(?) ~ 1398(태조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迂達赤)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낸 뒤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크게 이겼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때 밀성(密城)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된 뒤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출 처 : 엠파스 백과사전 (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372830&v=42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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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onet 19-08-13 04:16
   
"사람을 탐내는 성낸 짐승이 간교한 생각만 품고 있는 것"
세월이 흘러도 방숭이들은 변한게 없네요.
푹찍 19-08-13 04:20
   
우리 세종대마왕 함이 열도 쑥대밭 만듭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