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한민족 역사상 주몽과 함께 불세출의 신궁이었던 이성계의 기록. 심지어 야사가 아닌 공식 역사서인 실록에 남아있는 기록들임.
"태조가 젊었을 때 정안공주 김씨의 집 담모퉁이에 까치 다섯마리가 있었다. 태조가 한 발을 쏘니 5마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가 이를 괴이하게 여기니 태조는 ‘절대 발설하지 마라’고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담비 20마리를 차례차례 쏘아 모두 죽였다. 이성계의 활과 화살은 남들과 달랐다. 신묘한 사법(射法)으로 유명했으며, 싸리나무로 화살대를 만들고 학의 깃으로 깃을 달았다. 또 순록의 뿔로 촉을 만드니 촉의 크기가 배(梨)만 했다. 그러니 화살의 힘이 엄청났다. 일찍이 태조가 화살 한 발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노루 두 마리를 꿰뚫고는 풀명자나무에 꽃혔다. 신하 이원경은 “화살이 너무 깊이 박혀서 쉽사리 뽑을 수 없었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공민왕은 은 거울 10개를 80보 밖에 두고는 신하들에게 맞히면 이 은거울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시대의 척도로 계산해볼 때 1보가 120㎝ 정도 되므로 80보라면 96m에 이른다.그런데 태조는 이 은거울 10개를 모두 맞혔다.
한번은 이성계가 ‘절친’들을 초대, 술자리를 주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00보(120m) 밖에 배나무 위에 배 수십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 있었다. 친구들이 “한번 쏘아보라”고 청했다. 즉각 활을 뽑은 태조는 시위를 당겼다. 과연 한 발에 배 다발이 다 떨어졌다. 여러 손님들이 감탄사를 연출하면서 건배했다.
또 하나의 일화. 원나라에서 벼슬길에 오른 황상(黃裳)이라는 자는 원나라 순제가 감탄할 정도로 명궁이었다. 공민왕과 신료들은 과녁을 150보 밖에 두고 “두 사람이 한번 겨뤄보라”고 권했다. 150보 밖이면 무려 180m에 이른다. 그야말로 까마득했다. 황상은 물론 명궁이었다. 하지만 연달아 50발을 맞힌 이후에는 힘이 빠져 화살이 번번이 과녁을 빗나갔다. 하지만 이성계의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공민왕은 그런 이성계를 두고 “정말 비상한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고려 우왕(1374~1388) 때의 일이다. 임금이 사냥터에서 무신들을 대상으로 활쏘기 대회를 열었다. 50보(60)m 거리를 두고 주발크기로 큰 과녁을 만들고, 그 가운데 은(銀)으로 작은 과녁을 만들어 복판에 붙였다. 지금으로 치면 10점 골드 안에 ‘퍼펙트 골드(X점)’ 과녁을 더 만든 것이다. 그 X과녁의 직경은 2치(6㎝)였다. 이성계는 정확히 그 X과녁에 화살을 명중시켰다. 이성계의 활쏘기는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됐으며, 우왕은 이성계에게 말 3필을 하사했다.
또 있다. 1384년 우왕과 함께 사냥을 나선 이성계는 “오늘 짐승을 쏠 때 등골을 맞힐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는 평소 짐승을 쏠 때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는데, 이날만큼은 등골을 쏘겠노라고 예약한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이성계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등골을 명중시켰다. 주변 사람들은 신묘한 사법에 탄복했다.
조선시대 군관들이 일기들을 보면 1년에 최소 120일 이상, 연습시 최소 10순(50발)에서 30순(150발)을 연습 한답니다. 심하게 할땐 60순도 쐈데요.
금주령때에도 활 훈련 또는 활 시합때 술이 허락됐었다네요.
군관들의 시험때 10순(50발)사격해서 군관들 평균점수가 47발 명중이고........꼴지들 평균 점수가 43점대 라네요. 그리고 꼴지는 심하면 곤장도 맞는답니다.
조선 건국이래 "소중화"를 자처하는 성리학 탈레반들에 의해...
여진족의 역사가 분리되었죠...
이성계의 전설이나 설화, 야사를 보면..
이성계 못지 않은 아니.. 어쩌면 이성계보다 더 활을 잘 쏘았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퉁두란(쿠란투란티무르, 후에 이성계로부터 이씨성을 하사받아 창해 이씨의 시조가 됨)이죠...
동북지방의 군벌이었던 이성계의 가별초는 여진인들이 주축이었습니다...
여진인들이 이성계를 따랐던 건 바로 퉁두란이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죠...
이 둘의 설화를 보면 재밌는 일화들이 많죠...
전설속의 이야기들이지만.. 그만큼 활을 잘 쏘았다는 반증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