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모든 사상과 신문물이 중국으로 모여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구조였습니다. 우리는 대륙 끝 반도에 걸쳐 있어서 바다로 활개치고 다니지 않는 이상 문물을 접하는 게 늦을 수밖에 없어 중국에 의존했던 게 사실이죠. 그 때 시대상 지정학적 문제 때문에 그런 거지 우리 조상이 한심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전근대시기의 중국은 당시 울 나라가 아는 세계에 한정해서는
인구,국력,문화,생산력 등 대부분의 측면에서 오늘날 미국의 위상에 버금가는 절대적인 나라였는데요....???
심지어 무력적인 측면에서는 이름 좀 날린다는 몽골, 여진 등의 북방민족들과 일본 역시도
틈만 나면 중국과의 조공무역규모를 확대하려는 시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근대 시기의 일본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서양제국으로부터의
식민지-준식민지에 놓이지 않았던 차원을 넘어....
청일전쟁 이전 시기까지 아시아 제1의 강대국인 청나라를 패배시킨 것은 물론
이후 세계최대규모의 육군국가인 러시아마저 패배시켰습니다.....!!!
또한 1차대전 이후에는 명실상부 세계 6위권 이내 강대국의 위상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일본승리는 당시 중국, 베트남, 인도, 오스만투르크, 동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식민지-준식민지 또는 강대국의 압력에 시달리던 약소국들의 민족주의-반식민지 투쟁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러일전쟁 이후 울 나라는 여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과는 정 반대로 일본으로의 식민지화가
촉진되었지만.....
그러한 위상의 일본이 당시 울 나라를 차지하겠다고 집요하게 덤벼드는 이상
당시 울 나라의 국력으로 이를 저지하기란 실로 역부족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당시 울 나라에서의 영향력유지 또는 진출에 여념이 없었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꺾은 이후에야 울 나라에 대한 지배력 구축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
만약 청나라, 러시아가 주변에 존재하지 않고 울 나라 혼자 일본의 침략에 대응해야했다면
1910년은 커녕 훨씬 이른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러일전쟁의 일본승리는 당시 중국, 베트남, 인도, 오스만투르크, 동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식민지-준식민지 또는 강대국의 압력에 시달리던 약소국들의 민족주의-반식민지 투쟁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러일전쟁 이후 울 나라는 여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과는 정 반대로 일본으로의 식민지화가
촉진되었지만.....
그러한 위상의 일본이 당시 울 나라를 차지하겠다고 집요하게 덤벼드는 이상
당시 울 나라의 국력으로 이를 저지하기란 실로 역부족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
??? ㅋ(전범 쨉 극우들이 지들 쓰레기 침략 전쟁을 무슨 아시아 해방?? 어쩌고식
미화 프로파간타질 쳐하군)
국적불명 왜그로상
여기서도 허접 쨉뽕 소리 열심히 또 주절주절. ㅋ(하긴 이런 식으로 빠는 인간이 있으니 아직도 전근대적 전제주의 망상과 군국주의 망령을 21세기에도 여전히 놓치 못하고 버러지 ㅈ밥 쨉 극우와 똥덩어리 토왜들이 설치면서 세계 최대 부채 빚더미와 방사능 바이러스 콜라보로 알아서 삽질 망테크질을 계속하며 자멸해갈 수 밖에 쯧)
아프리카 콩고마냥 딱 왜구 수준 답게 막장 미개로 또다시 자국민을 인신매매 수출질해서 무기 수입질등 쳐하면서 발빠르게 서양무기로 무장질. 그기에 영국등의 막대한 차관과 무기 수입등으로
쨉이 오버쳐하면서 겨우 러쨉 전쟁의 극동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러샤는 배상은 무시 생까버리자 지금까지 고혈 빨린 쨉 내부에서 지들끼리 폭동까지 나면서 경제가 고사 직전까지 갔던게 당시 쨉의 허약한 적날한 체력 수준.(지금의 북한과 다르지 않는 기형적 관치 군비주도의 경제시스템)
대한제국이 비록 문호 개방이 늦어졌지만 이미 오랜 시간 중앙집권화와 전국적 교육 인프라를
구축한 상황에서 전국적 징병제로의 몇년만의 시간만이라도 있었다면(실제 대한제국은
전국적 징병제 시스템 전환 직전에 있었고)
당시 쨉 수준에서 대한제국과 또다른 전면적 전쟁 확대와 출혈은 현실적으로 당시의 쨉의 체력에서는 지속적으로 하기는 불가능. (이러니 지들도 출혈을 극도로 줄이면서 한국인들에게 실상이 알려지는 것 역시 극도로 꺼리면서 정보를 통제하며 친쨉파 매국노들을 통해서 거의 날로 쳐먹었던 상황. 이런 식으로도 가능했던게 당시 근대로의 전환기에 대사의 상설 주둔등으로 전근대라면 스파이 짓거리를 합법적으로 할 수 없던 교묘한 시대적 흐름을 이용 내부에서 매국노 매수나 양성 정보 취득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상황 )
정강의 변 : 북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 많은 송나라 황족들과 황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무엇보다 이 사건 당시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대략 3천 명 중 2천 명)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애당초 그나마 좋은 취급을 받은 경우도 이렇게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한정으로 이 때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또한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다. 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해서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고, 주씨가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끌어당기면서 강제로(성 추행..)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ㅠㅠ)
이에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고 택리를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이 눈물을 흘리며 주씨를 치료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ㅠㅠ) 더 비참한 것은 한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원나라(몽골)의 법률은 서토 한족은 예외 없이 노예로 취급했으며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한족을 살생할 권리가 있었다.
한족 20가구를 1甲 으로 편성하였다.
각 甲마다 한 명의 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몽골 갑주의 몫이었는데,
짱국 漢族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골은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족의 사내아이가 태어 나면 엄지손가락을 절단햇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노예는 사유물이므로 노예의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떄를 보였다.>
2.< 과거 제도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전술>
과거 실시로 체제 불만 제거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3.< 만주족 고유의 풍습과 연고지를 지킴>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4.< 전족등 악습을 폐지않고 생활속에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킴>
청신한 기풍의 진작을 강조했던 청조가 한족 여성의 纏足(전족)을 금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족은 後唐(후당) 시절 이후 차츰 번져 온 한족 여성의 폐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방 기마민족이 만리장성 이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한족 여성들을 납치해 가는 짓 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전족을 했던 것입니 다. 젖먹이 때 전족을 하여 발의 성장을 억제시켜 놓은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뒤뚱거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전족을 한 여성은 북방민족의 약탈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데 명-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족한 여성이 남성들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이유로 유한계층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만주족여성들의 전족만은 엄금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청조는 한족의 약화를 은근 히 조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 언론 장악>
청조는 변경이나 군사문제를 연구한 책, 夷狄(이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책, 명조를 칭송한 모든 논평서 등 모두 2320종의 서적을 禁書(금서)로 정하고, 이런 금서를 보관하거나 편찬한 수천 명의 사대부와 관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王錫侯 (왕석후)라는 학자는 康熙字典(강희자전)을 비판하고 避諱(피휘)해야 할 청조 황제의 廟號(묘호)를 무엄하게 수록한 字典을 만 들었다고 해서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 21명은 노비가 되었고, 편찬을 후원한 江西巡撫(강서순무) 역시 처형되었습니다』
6. 변발이라는 혁명적 풍속을 받아 들이게 함으로서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키도록
하였고 이에 반항할 경우에는 가차 없는 처단이 이루어졌다.
- 조선의 경우는 도리어 청에 대한 치욕이니 말을 하지만 실상 두번씩이나 조선의 청에 대한
충돌 이후의 처벌은 서토에서의 경우에 비하면 도리어 온건하다 할만큼 서토에 대한 저항 세력의 청의 진압은 너무도 무자비하고 강건했다. 그리고 문화적 부분에서도 청은 조선을 인정한 반면 서토의 경우에는 가차없는 만주족 방식을 고수 하도록 철저한 정책을 폈다.
7.< 조선과 만주족의 관계>
이성계의 私兵 집단에는 여진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지역은 여진족 추장 퉁두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함경남도 함흥 지역의 토호인 이성계에게 굴복하고 의동생이 되어 李之蘭 (이지란)이란 이름을 받았지요. 나중에 그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되어 建州衛(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휘하에는 이밖에도 斡朶里族(오도리족)의 만호 猛哥帖木兒(몽거테무르), 火兒阿(할아) 의 만호 阿哈出(아하추) 등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서 강력한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진족이라는 배후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누구입니까.
『建州左衛(건주좌위)의 開祖(개조) 몽거테무르가 바로 누르하치의 직계조상입니다. 아하추는 建州本衛(건주본위)의 개조가 되었지요.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 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창업 초기의 조선왕조는 두만강 하류 孔州(공주 )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학살하던 앞잡이 한족계열은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고려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우 3년 경오 (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유럽의 로마제국을 붕괴시킨 결정적 훈족이나 이후 유럽을 휩쓸고 단니면서 러샤를 꼬봉으로 세금징수 시킨 몽골등 전투 민족들의 발상지가
다 동북아와 만주일대가 본산.
이들 일부가 서진하면서 인도 중동 유럽 일대를 휩쓸고 단니다 보니 이들을 유럽에선 '신의 재앙'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천년사직 고구려 태왕시절 이들 전투민족들(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여진) 후대 금,청등)은
우리 태왕 앞에서는 제대로 대가리도 못들고 살면서 휘하 부용세력들(평소에 고구려의 보호 지원 아래 전시에는 전투병으로 차출)
그나마 문치화로 약했던 근세조선도 초기 이성계가 이들 여진족 대다수를 휘하로 거닐고 있었고 수시로 여진족들이 분란을 일으키면 소거작업 들어갔던 나라.
고대의 쭝국이란 지금의 특정 국가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런 북방유목민족과 동방세력들에 의해 서토의 풍부한 농토와 노예(하한족)을 차지하고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었던 일반명사.
그리고 러시아 대평원 일대를 장악했던 스키타이 유목민족도 보면 상당히 잔인하고 무쌍 찍던 종족인데 유럽사가들이 이들이 잔인하고 포악해도 그래도 나름 좋게 평가한게 뭔가 하면
그나마 이들이 존재했기에 이런 신의 재앙급으로 묘사되던 동북아의 날고 뛰던 전투민족의 서진을 그나마 적게 받아 유럽문명이 유지되어 다행일 정도로 평가.
그만큼 동북아에서 수천년간 줄기차게 국호를 지키면서 길게는 천년에서 오백년을 이어온 우리 왕조사의 전투력(유지를 위한 행정, 민심 도모등 내치도 그만큼 견실)은 세계사적으로 이미 상당한 위치에 있던 역사로 볼 수 있을것임.(북방의 저런 날고 뛰던 거란,몽골등도 길어야 백여년 정도가 전성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