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의 조력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임란 첫 해를 제외하고는
부산지역을 포함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근거지들을 공략하는 일조차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설령 일본정벌을 계획했다 하더라도 임란 직후 피폐해진 조선의 국력으로 무슨 수로 일본본토를
대상으로 보복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
임란 직후 고작 대마도를 정벌하자는 논의조차 피폐해진 국력의 한계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는데...
임란 중에도 일본과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임란 중기에 조선수군진영에 돌림병이 돌아
조선수군전체병력의 30% 가까이에 해당하는 수 천명의 수군이 목숨을 잃는 크나큰 전력손실을
입는 바람에..... 정유재란이 터지던 무렵에는 부산 등을 공략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오직 일본수군이 오늘날 통영과 거제도 사이에 위치한 견내량을 넘어오지 못하게만 하는데
급급했습니다.
더구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전력 대부분이 손실된 이후에 명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의 예봉을
일시적으로 꺾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일본수군의 서해안 진입을 완전히 차단하지도 못했고
오늘날의 전북 북단해역인 고군산군도까지 후퇴하여 은거하며 더 이상의 전력손실을 막는데
급급했습니다.
이후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에 대하여 본격적인 공세로 전환한 시점은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참전하며 수군전력규모 자체가 커진 이후 시기부터입니다.
전혀 억울하지 않은데 그 전에 자신이 통제사라면 부산에 있는 왜군을 공격하겠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다 막상 통제사가 되니 육군이 대군으로 왜군을 밀어부쳐주면 자신이
바다에서 공격하는 합동작전으로 공격하겠다고 주장하면서 버티다 권율한테 곤장맞고
할수없이 나간건데 곤장 맞은 이유도 앞서 저 주장대로 하지 않고 더구나 권율을 통해
왕명까지 전달됐는데도 안나가고 버티다 맞은 겁니다. 참고로 부임해서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던
유능한 참모들 몇명과는 마찰로 인해 참모들이 교체 됐구요 기록을 봐도 출전하기 전에
휘하 장수 및 군사들에게 신뢰를 잃은 기록들이 나오고 칠천량 참패도 왜군의 유인전에 걸려서
소수의 왜선이 나타나면 무리하게 추격을 반복하다 병사들이 지치게 만들고 야간에 경계도 제대로
안해서 한밤중 야습에 당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상륙했다 많은 병사들이
학살당하고 자신도 죽은 겁니다.
우~하하...
그러니까
그릇이 작은 소인배임
싸우다가 불리하면 튈 줄도 알아야 히는데
전락전술도 없고 싸울줄도 모르고 부관이 후퇴하자고 해도 모른척하고
최후의 방법이 튀는겁니다
1단 튀면 최소한의 전투력은 보전합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최고의 수군이 한번의 전투로 녹아내렸어요
만약
배설이 자기휘하의 10척의 전선을가지고 탈영을 안했다면 어쩔번 했나요
그 탈영병들과 전선이 조선을 구하는 주력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