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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14 22:16
제사때 유기를 쓰게된 이유를 추정해보면 임란이후입니다.
 글쓴이 : 원형
조회 : 700  

일단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는 상등품을 사용한다는 가정을 해봅시다.

그리고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그렇다면 왕실에서는 어떠한 재료로 만든것을 제기로 사용했을까요?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청동?

아니면 가장 최신 첨단 제품인 세라믹~~~~ (도자기)


여기서 임진왜란때 벌어진 사건을 따져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양을 수복하고 종묘에 제사를 지내려 해보니까 제기들이 몽땅 없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형편없는 것을 제기로 쓰게 되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없어진 제기가 왕실용으로 만든 (그것도 종묘에서 제례용으로 쓰려고만든) 청화백자 입니다.


이 시점에서 볼때 최고급품은 당연하게도 백자 (고려시대는 청자)였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다음으로 안성맞춤으로 유명한 안성유기가 공납물품이라서 왕실용이었다... 라는건 왕실에서나 쓴다는 것이 아니라 왕실에도 납품이 되는 최고의 제품이다. 라는 이야기 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영국왕실 납품되는 브랜드인 블루뭐시기인지 뭔지 그런...


어찌되었던 임란으로 도공들도 끌려가고 당장 쓸수있는건 없고 해서 대체용으로 유기가 쓰였을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왕실부터 대체품을 쓰고 있는 형편에 신하들이 그보다 좋은걸 쓸 수 있을리도 없고 있다고 하여도 대놓고 쓰기에는...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고급품을 쓰지 못하는 계층에서는 유기등을 제사용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지요.

어릴적 짚풀과 진흙을 이용해서 제사용 놋그릇들을 딲던것이 기억나네요.

그러면서 들었던 이야기가 증조할머니의 수저세트 (일제시대때 어떻게 빼앗기지 않은건 모르겠음)


더불어서 다큐에서 나왔던 것인데 과거 한국의 금속공예 기술이 뛰어나서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밥그릇등의 보급율이 높았다. 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참고로 유기는 기계학적으로 방짜유기를 못만든다고 합니다. (방짜유기는 두들겨서 만드는 유기)

주물로만 가능한건데 한국에서는 두들겨서 만드는것은 서양에서는 원래 불가능하다고 알려져있었다고 합니다. 그걸 한국에서는 대장간에서 두들겨서 만들어서 방짜유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진리 그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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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그늘 20-01-14 22:20
   
유기는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왕실이나 귀족의 식기로 쓰였습니다
역적모의 20-01-14 22:21
   
솥뚜껑이 대장간의 극치라고 들었습니다 ㅇㅅㅇㅋ
하늘그늘 20-01-14 22:24
   
사람들이 도자기가 우리나라의 최고기술 상품이라고 생각하는데 착각이에요
도자기는 흙으로 만들기 때문에 대량제작 대량생산에 적합해서 수출까지 넉넉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널리 쓰이고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정작 더 높은 고도의 기술은 유기였습니다
유기도 역시 수출을 하긴 했는데, 워낙 만드는 데 오래 걸리고, 재료도 흙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비쌌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쓰기도 바빠서 수출을 많이 할 수 없었습니다
도자기공과 함께 유기장인도 국가보호를 받았어요
하늘그늘 20-01-14 22:26
   
간단하게 생각만 해봐도 알거에요
송,금,원,명의 귀족들은 위생적으로 똥망인 나무 수저 쓰는데, 고려의 귀족들은 유기 수저를 썼던 겁니다
기술이나 품질이 낮아서 수출을 안한 게 아니라, 너무 생산량이 적어서 철두철미하게 통제했던 겁니다
하늘그늘 20-01-14 22:30
   
왜구는 임진왜란 때 도자기공만 잡아간 게 아니라, 대장장이도 잡아 갔습니다
당시 대장기술은 국가보안기술이었으며, 절대로 외부로 유출되어선 안되는 특급관리대상기술이었습니다
왜구가 아무리 수출을 해달라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빌어도 안해줬어요
그래서, 당시의 왜구나라에선 대장장이를 신으로 까지 받들어 모시는 지경이었습니다
왜구에게 잡혀간 대장장이들은 일본에서 고위관직을 하사받고 죽은 후에도 사당을 지어 모시기 까지 합니다
왜구의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의 칼이 대부분 연철이었을 정도였고, 무른 연철을 보완하기 위해서 접철기술이 발달했던 겁니다
원형 20-01-14 22:31
   
조선왕조 실록에 실렸던 제수용 그릇 (도자기)에서 추정해본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왕실에서 제사용으로 유기대신 도자기를 사용하고 있었죠.

그렇게 되면 유행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방식대로 쓰게 되는데 문제는 이 모든것이 임란으로 파괴되어서 유행의 변화가 와서 제수용기로 쓰이게 되는 것이죠.

일상에서 유기 수저와 젓가락을 쓰고 쓰지 않고는 다른 것입니다.
     
하늘그늘 20-01-14 22:38
   
최고급품이어서 썼다면서요 ?

유기를 제기로 쓰지 않았던 건 살균작용 때문입니다
유기의 살균작용 때문에 유기는 사악함을 물리친다 또는 귀신을 쫓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기는 제기로 사용하기 꺼렸던 겁니다
제사음식에 고추가루를 쓰지 않는 것과 같아요
아비요 20-01-14 22:32
   
구리는 조선에서 안나던 광물입니다. 그래서 원형님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귀했습니다. 얼마나 귀했냐면 치부를 유기그릇으로 했다는 이야기 즉 재산을 금은이 아니라 유기그릇으로 대신 쌓아뒀다는 이야기까지 내려옵니다. 그에 반해서 제가 아는바로 조선의 도자기는 치부수단은 아니였습니다. 고급 도자기는 분명 비싼 사치품이지만 민간에서도 옹기가 일상화된 조선에서 유기그릇보다 귀했는지는 알수없네요.

다만, 성종이 연못에 물이 넘치는 문제로 조그만 연결수로를 구리로 했다가 대간에게 지적받아서 없앴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대간 눈에는 그것도 사치스러웠던 거죠. 그런면에서 도기를 제기로 사용한것은 소박하게 하기 위해서지 유기가 싸구려라서가 아닙니다. 애초에 조선에선 왕도 사치를 한다 싶으면 대간들이 나서서 비난했습니다.

일본기준으론 맞을겁니다. 거긴 구리그릇보단 도자기가 확실히 귀했습니다. 다만, 워낙 나무그릇 쓰던 문화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