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중국의 왕조 자체가 한족이 세운 왕조가 몇개 안됨
오히려 이민족들에게 지배당한 역사가 더 길죠
그리고 중국인들은 중일전쟁을 지들이 이겼다고 생각해요
실제 표면적으로는 2차대전 승전국의 모임임 상임이사국에 포함되어 있고 나름 승전국 대우 받고 있는 것은 맞죠
문제는 그 승리가 일본이 미국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얻은 어부지리의 승전국 지위라는 거
지금 중국이 이기겠다고 선언한 그 나라가 떠 먹여준 승전국 지위죠
웃긴게 저 어릴 때만해도 반청복명이란 명분걸고 원나라에 대항하는 한족 영웅들 영화만 제작하면서 원나라 청나라 아주 대 놓고 지들 나라 아니라고 욕하던 애들이 요즘은 은근슬쩍 징기스칸도 청나라도 원나라도 자랑스러운 중국의 역사라고 역사책 갈아 엎고 중국 어린애들이랑 무지한 군중들 세뇌하는거보면 웃기지도 않습니다 조선족도 지들 민족이니 고구려 백제 발해 다지들 역사라고 우기는거 보면 .. 조선족이란 말 나온게 체 100년도 안됬을텐데 저모양인거죠 저런식이면 전세계 인류의 조상이 다 중국인이 되는건데 ..생각이란게 있는건지.. 이해 참 안갑니다 중국 과 일본은 .. 하는 짓이 똑같아요
한국 역사 5천년? 위만조선 기자조선 ㅋㅋㅋㅋㅋ 죄다 중국 역사
한사군 400년 식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의 식민지
몽골의 식민지
청나라 식민지
명나라 사대
양나라 사대
당나라 사대
등등
백제 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노 ㅋㅋㅋㅋ 중국 사대국인데
지금 한반도는 현재도 작은 땅덩어리 서로 떨어져 북한 독재자 통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남쪽은 민주주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제 해외에서 한중일 네티즌들이 두고 토론을 하는데
중국인들 말에 한마디도 못하는건 한국인들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네등른 중국을 섬겼잖아 누가 섬기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일본인들은 뒤에서 웃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인들은 너희 한국은 일본 40년 속국 노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국.............................................bts.만세로 끝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
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
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한족을 살생할 권리가 있었다.
한족 20가구를 1甲 으로 편성하였다.
각 甲마다 한 명의 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몽골 갑주의 몫이었는데,
짱국 漢族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골은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족의 사내아이가 태어 나면 엄지손가락을 절단햇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노예는 사유물이므로 노예의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ㅡ원 황제 무종(武宗: 카이산)이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 조서[詔書])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의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철로 된 칠지도를 ○○○○가 만들었다.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侯王)에게 주기에 알맞다. 지금까지 이런 칼이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을 위하여 정교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금동관모의 소유자, 백제의 중앙 조정에서 왕(王)·후(侯)·장군등의 작호를 수여.
*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모 출토지.
공주 수촌리 고분군 등 중서부지역에서 5점, 전남지역에서 1점, 옥전 M23호분 등 가야지역에서도 2점이 출토.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남북국시대(해동성국 대발해와 동북아 해상 무역을 장악한 천년 신국(神國)의 신라) 이후 제대로 된 교류가 끊긴 신라와 왜국.
『삼국사기』를 보면, 일본은 신라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기 698년, 사신을 파견한다.
효소왕(孝昭王) 7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三月, 日本國使至, 王引見於崇禮殿.)
- 방문 이후, 신라의 선진문화와 발전상에 경악한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하여 서기 703년 대규모 사절단 파견을 결심-실행에 옮기는데...
성덕왕(聖德王) 2년,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日本國使至, 摠二百四人)
- 그러나… 통일신라의 수준을 견신라사(遣新羅使) 파견만으로 따라잡기에는 너무나 선진적임을 깨달은 일본. 결국 서기 731년 신라 침공을 통해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데...
성덕왕(聖德王) 30년,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쪽 변경을 습격하였는데, 왕이 장수를 시켜 군사를 내어 이를 크게 깨뜨렸다. (日本國兵船三百?, 越海襲我東邊, 王命將出兵, 大破之.)
- 제대로 상륙도 하지 못하고 박살난 일본, 결국 용서를 빌기 위해 서기 742년에 사신을 파견하지만‥
경덕왕(景德王) 원년,
겨울 10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이르렀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元年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
- 완전히 무시당한 일본, 그러나 자존심은 있어서 허세를 부리면서 다시 사과하려고 하지만..
경덕왕(景德王)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었으므로 왕이 그들을 접견하지 않자 마침내 돌아갔다. (十二年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 재차 무시당한 불쌍한 일본. 결국 서기 804년, 통일신라의 속국이 되기로 결심, 조공을 바친다.
애장왕(哀莊王)
5년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五年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黃金三百兩.)
- 이를 기특하게 여긴 신라는 드디어 일본을 용서하고 속국으로서 인정한다. 서기 806년 속국에게 하교하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7년,
봄 3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므로 조원전(朝元殿)에 불러 접견하였다. 교서를 내려 말하였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을 금하되, 다만 수리하는 것은 허락한다. 또 수놓은 비단을 불교 행사에 사용하는 것과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의 사용을 금한다. 마땅히 담당 관청으로 하여금 이를 널리 알려 시행하도록 하라.』(七年春三月, 日本國使至, 引見朝元殿. 下敎禁新創佛寺, 唯許修葺. 又禁以錦繡爲佛事, 金銀爲器用, 宜令所司, 普告施行.)
- 사찰을 수리하는 것조차 '종주국' 신라의 허락이 없으면 감히 하지 못했던 일본. 이후 '속국' 일본에 대한 종주국 신라의 사랑은 계속되고… 신라의 어버이와 같은 사랑에 감동한 일본은 서기 882년, 보답한다.
헌강왕(憲康王) 8년,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八年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明珠一十箇.)
倭國乃日本國也. 本名倭旣恥其名. 又自以在極東因號日本也. 今則臣屬高麗也 - 郭若虛.『圖畵見聞志』 卷6. 高麗國
왜국은 일본국이다. 倭라는 원래 이름을 부끄러워했는데, 극동에 있다고 해서 스스로가 일본이라고 부른다. 고려의 속국이다
(조선)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성종 28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3월 13일(계묘) 3번째기사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일본국(日本國) 경극전(京極殿) 경조윤(京兆尹) 좌좌목씨(佐佐木氏)와 강기운 삼주 태수(江岐雲三州太守) 태선 대부(太膳大夫) 입도(入道)2907) 생관(生觀)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 신(臣)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役)에서 사사(士師)2908) 가 되니, 마치 진(晉)나라의 범자(范子)와 같은 자2909) 이므로, 오로지 궁마(弓馬)를 맡아 부조(父祖)의 업(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정해년2910) 이래로 중원(中原)에 난리[風塵]2911) 가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매, 신의 고을도 함께 싸움터 안에 들어가서 적을 많이 대하게 되니, 요역(徭役)에 나가느라 농상(農桑)을 폐기하여 피륙이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졸(士卒)들이 타지(墮指)2912) 의 재앙에 많이 곤고(困苦)하여 마치 백등(白登)의 포위2913) 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귀국의 명주와 무명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삼군(三軍)에서 얼어 죽는 것을 구제하고 황제의 은혜를 만세토록 우러를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 몇 가지를 별폭(別幅)에 갖추어 적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반만년 노예민족 화족
대륙은 夷族들이 나들이만 와도 왕조 멸망해왔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나라, 한나라 황제도 흉노에 조공바치며 형님으로 모셨다는 거 기록으로 다 남아있다능
수도 주위로 온갖 민족들 다 몰려와서 잔치벌여도 손도 못쓰고 전전긍긍하던 아시아 최약세 한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