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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6-09 17:44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4,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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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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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중장기병인 개마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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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안악 3호 고분 행렬도.


 



산을 내려가 도적으로 지주의 소와 양을 먹고 사네.
관군이 침범하면 앞서 나가 칼을 들고 맞설 거야.

어차피 요동으로 가면, 헛되이 죽느니만 못해
설령 내 머리 잘린다 해도 뭐 어떠리!

-왕박(王薄)의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북방 유목 선비족이 남하하여 북위 대국을 세우고 다시 끊임없는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북조에 의해 300여년 시대의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등장한게 선비족 통일왕조 수나라군요.

이 당시의 수나라는 북방 유목기병의 전투력과 서토 하한족을 노예로 한 풍부한 노동력과 토지를
바탕으로 엄청난 물량빨까지 손에 넣게 되면서 지금으로 치면 2차대전 시기 미국급의 국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나라의 압도적 국력에 바탕한 갑옷으로 무장한 100만대군의 기세 앞에 호전적 전투 유목제국인 돌궐마저 깨깽하면서 이제 동아시아는 동방문명권의 전통적 천자[天子]였던
우리 고구려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군요.


그러면서 4차에 걸친 고수(려수)전쟁으로 근대 세계 최대급인 독소전쟁 이전 고대 세계 최대급의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수많은 종족들이 참여한 서토와 우리 동방문명권간에 문명대전의 불이 붙게 됩니다.


서토의 남북조 시대에 북위 북조가 열리기 전  강북은 북방 이민족의 남하가 본격화 되면서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을 열게되었고 이에 앞서 고구려는 태조대왕시기 대국의 위치에 오르면서

이후 172년 한나라의 10만 대군의 침입에 고구려의 명림답부가 좌원대첩에서 이들 한나라 군대를 몰살시키고 5세기에는 난립하던 북방의 전투 유목 민족까지 굴복시키면서 만주일대를 석권하게 되군요.(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 후대 금,청등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화)

이런 가운데 요서의 모용씨 후연(後燕)을 공략해서 압박하자 고구려계 고운이 등극한 북연을 동족의 예로 대우하다 이후 북위의 침공에 장수태왕이 수만의 군사를 동원 요서일대의 북연의 물자와 사람들을 고구려 내지로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화룡성(和龍城)에서 북위 군사와 맞닿게 되는데 북위는 이런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쳐다보기만 하게 되군요.

이후 북위는 북방의 난립하던 세력을 병합하면서 북조사를 열게 되고 이후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하게 되면서 고구려 귀족이 시집을 가게 되는데 고조의 여동생 문소태후가 후에 세종을 낳고 고구려계 세종이 북위의 황제로 등극. 이렇게 되면서 고구려계 고조가 북위 조정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설치하고 아예 고총, 고도열등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활약하는 등 따로 우리 고구려인만을 추대하는 벼슬까지 만들게 됩니다.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이때문에 고구려의 장수태왕이나 문자명태왕이 서거를 하면 북위의 황제나 최고 권력자가 애도를 거행하는 기록들이 그래서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이후에도 이런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계가 득세하자 선비족계열에서 고구려계 고조를 제거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동방의 천자로 있던 고구려의 위세에 북위내 다른 고구려인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이후 북제등도 고구려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군요.

하여튼 이런 가운데 결국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통일 수나라는 선비족의 기병 전투력과 물량빨을 통해 2차 고대 세계최대 대전급인 400만을 동원하기 전 1차에서도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다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2차는 아예 수양제가 친정 즉 직접 군을 이끌고 참가하게 되는데
이런 고수간의 대전에 우리 고구려도 더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먼저 요서 임유관의 보급기지에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동아시아 대전의 서막에 불이 붙게 되군요.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런 세계 대전급 전쟁은 글자 그대로 인력과 물자가 무제한으로 갉려 나간다는 점에 이런 엄청난 수나라의 침공은 결국 서토 내부에서 수많은 민중의 막대한 희생으로 점철되었고 결국

지금까지도 요동 즉 고구려를 침공하면 헛되이 죽게 될거라는 노래가 아직까지도 전해질 정도에
이당시 얼마나 민초들의 고초가 심했는지 아예 전쟁에 끌려가 죽느니 산에 들어가 숨어 도적질을 하던지 자기 손을 스스로 잘라 이것을 복수(복된 손)이라고 해서 고구려와의 대전에 참여를 하지 않는걸
더 복으로 여길 정도였군요.


그렇게 수나라의 4차 대전은 결국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그리고 여담으로 수나라가 북방등 여러 주변 세력과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수나라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했던 말이 고구려와 싸움은 하지 않겠다 였군요.ㅋ 이정도로 당시 통일왕조 수나라 군대나 민간에서 조차 고구려와의 싸움은 엄청난 공포로 각인)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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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9-06-09 17:59
   
쿠빌라이 "당 태종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절요 1260년 원종 1년 3월 17일

몽골 뭉케 칸의 대대적 남송 정벌에 앞서 서거하게 되면서 유목 세계를 지향하던 아리크 부케가 당시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정식으로 칸(汗)에 등극하게 되군요.

이때문에 쿠빌라이 역시 남송 정벌을 대대적으로 중지하고 이후 요, 금이 닦아 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본인도 일종의 편법으로 칸에 오르면서 물자를 통제하는등 몽골 내부에 정치 투쟁이 가속화되던 시점에 중세 고려도 백여년의 무신집권기로 이미 고려 황제도 허수아비로 전락 이런 몽골을 통해 무신집권기를 끝내려는 서로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고려 황자가 쿠빌라이와 강화를 하게 되는데

이에 쿠빌라이는 이런 고려와의 동맹을 자신에게 칸과 이후 서토를 지배할  세계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로의 천명이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할 정도. 또한 만주일대 이런 쿠빌라이에 대항할 수 있는 동방왕가도 견제할 겸 고려를 부마국에 자신이 아끼던 제국대장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면서 고려는 황금씨족 직계 대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치 행정력이 약했던 소수의 몽골 입장에서는 가장 측근 궁내에 서토 한족들을 들이기에는 리스크가 워낙 높다보니 더욱 고려와 밀접한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일종의 공생하에 서토 지배. (이때문에 원 말 명초까지도 고려양이라고 고려문화에 서토가 미쳐 취하니 요사하다는 표현까지 나오게 된 시대 배경)
굿잡스 19-06-09 18:06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ㅡ원 황제 무종(武宗: 카이산)이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 조서[詔書])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풀어헤치기 19-06-09 18:12
   
스크랩 했어요.
바람노래방 19-06-09 18:19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