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고구려 중장기병인 개마무사
고구려 안악 3호 고분 행렬도.
산을 내려가 도적으로 지주의 소와 양을 먹고 사네.
관군이 침범하면 앞서 나가 칼을 들고 맞설 거야.
어차피 요동으로 가면, 헛되이 죽느니만 못해
설령 내 머리 잘린다 해도 뭐 어떠리!
-왕박(王薄)의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병이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 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수(隨) 왕조의 멸망도 요동 정벌에 의한 것입니다."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隋皇失馭 由於征遼
-삼국사기 <최치원전>
북방 유목 선비족이 남하하여 북위 대국을 세우고 다시 끊임없는 분열을 거듭하다 결국
북조에 의해 300여년 시대의 남북조 시대를 종식시키고 등장한게 선비족 통일왕조 수나라군요.
이 당시의 수나라는 북방 유목기병의 전투력과 서토 하한족을 노예로 한 풍부한 노동력과 토지를
바탕으로 엄청난 물량빨까지 손에 넣게 되면서 지금으로 치면 2차대전 시기 미국급의 국력을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나라의 압도적 국력에 바탕한 갑옷으로 무장한 100만대군의 기세 앞에 호전적 전투 유목제국인 돌궐마저 깨깽하면서 이제 동아시아는 동방문명권의 전통적 천자[天子]였던
우리 고구려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군요.
그러면서 4차에 걸친 고수(려수)전쟁으로 근대 세계 최대급인 독소전쟁 이전 고대 세계 최대급의 동아시아의 운명을 건 수많은 종족들이 참여한 서토와 우리 동방문명권간에 문명대전의 불이 붙게 됩니다.
서토의 남북조 시대에 북위 북조가 열리기 전 강북은 북방 이민족의 남하가 본격화 되면서 오호 십육국 시대(五胡十六國時代: 304년 ~ 439년)을 열게되었고 이에 앞서 고구려는 태조대왕시기 대국의 위치에 오르면서
이후 172년 한나라의 10만 대군의 침입에 고구려의 명림답부가 좌원대첩에서 이들 한나라 군대를 몰살시키고 5세기에는 난립하던 북방의 전투 유목 민족까지 굴복시키면서 만주일대를 석권하게 되군요.(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 후대 금,청등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화)
이런 가운데 요서의 모용씨 후연(後燕)을 공략해서 압박하자 고구려계 고운이 등극한 북연을 동족의 예로 대우하다 이후 북위의 침공에 장수태왕이 수만의 군사를 동원 요서일대의 북연의 물자와 사람들을 고구려 내지로 데리고 오는 과정에서 화룡성(和龍城)에서 북위 군사와 맞닿게 되는데 북위는 이런 고구려의 위세에 눌려 쳐다보기만 하게 되군요.
이후 북위는 북방의 난립하던 세력을 병합하면서 북조사를 열게 되고 이후 고구려와 혼인동맹을 하게 되면서 고구려 귀족이 시집을 가게 되는데 고조의 여동생 문소태후가 후에 세종을 낳고 고구려계 세종이 북위의 황제로 등극. 이렇게 되면서 고구려계 고조가 북위 조정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설치하고 아예 고총, 고도열등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활약하는 등 따로 우리 고구려인만을 추대하는 벼슬까지 만들게 됩니다.
북위의 권력을 쥔 고구려인
http://blog.naver.com/csred7/80130397982������
(이때문에 고구려의 장수태왕이나 문자명태왕이 서거를 하면 북위의 황제나 최고 권력자가 애도를 거행하는 기록들이 그래서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는 98세였다. 임금의 호를 장수왕(長壽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효문(孝文)이 이 소식을 듣고, 흰색의 위모관(委貌冠)과 베로 만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장수왕 79년(서기 491)
28년(서기 519), 임금이 돌아가셨다. 호를 문자명왕(文咨明王)이라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28년(서기 519)
이후에도 이런 북위 조정내에 고구려계가 득세하자 선비족계열에서 고구려계 고조를 제거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동방의 천자로 있던 고구려의 위세에 북위내 다른 고구려인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이후 북제등도 고구려계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군요.
하여튼 이런 가운데 결국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들어선 통일 수나라는 선비족의 기병 전투력과 물량빨을 통해 2차 고대 세계최대 대전급인 400만을 동원하기 전 1차에서도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다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2차는 아예 수양제가 친정 즉 직접 군을 이끌고 참가하게 되는데
이런 고수간의 대전에 우리 고구려도 더이상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먼저 요서 임유관의 보급기지에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동아시아 대전의 서막에 불이 붙게 되군요.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런 세계 대전급 전쟁은 글자 그대로 인력과 물자가 무제한으로 갉려 나간다는 점에 이런 엄청난 수나라의 침공은 결국 서토 내부에서 수많은 민중의 막대한 희생으로 점철되었고 결국
지금까지도 요동 즉 고구려를 침공하면 헛되이 죽게 될거라는 노래가 아직까지도 전해질 정도에
이당시 얼마나 민초들의 고초가 심했는지 아예 전쟁에 끌려가 죽느니 산에 들어가 숨어 도적질을 하던지 자기 손을 스스로 잘라 이것을 복수(복된 손)이라고 해서 고구려와의 대전에 참여를 하지 않는걸
더 복으로 여길 정도였군요.
그렇게 수나라의 4차 대전은 결국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그리고 여담으로 수나라가 북방등 여러 주변 세력과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수나라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했던 말이 고구려와 싸움은 하지 않겠다 였군요.ㅋ 이정도로 당시 통일왕조 수나라 군대나 민간에서 조차 고구려와의 싸움은 엄청난 공포로 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