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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09 12:58
금사(金史)에서 기술한 여진족의 조상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584  

국역자 : 무쿠리(mvkuri) × 감방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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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之先,出靺鞨氏。靺鞨本號勿吉。勿吉,古肅慎地也。元魏時,勿吉有七部:曰粟末部、曰伯咄部、曰安車骨部、曰拂涅部、曰號室部、曰黑水部、曰白山部。隋稱靺鞨,而七部並同。唐初,有黑水靺鞨、慄末靺鞨,其五部無聞。粟末靺鞨始附高麗,姓大氏。李績破高麗,粟末靺鞨保東牟山。後為渤海,稱王,傳十餘世。有文字、禮樂、官府、制度。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黑水靺鞨居肅慎地,東瀕海,南接高麗,亦附於高麗。嘗以兵十五萬眾助高麗拒唐太宗,敗於安市。開元中,來朝,置黑水府,以部長為都督、刺史,置長史監之。賜都督姓李氏,名獻誠,領黑水經略使。其後渤海盛強,黑水役屬之,朝貢遂絕。五代時,契丹盡取渤海地,而黑水靺鞨附屬於契丹。其在南者籍契丹,號熟女直;其在北者不在契丹籍,號生女直。生女直地有混同江、長白山,混同江亦號黑龍江,所謂「白山黑水」是也。《金史 本紀第一》

금의 선조는 말갈씨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물길이라 불렀다. 물길은 옛 숙신의 땅이다. 원위(북위) 때에 물길은 7부가 있었는데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라 했다 수나라 때에는 말갈이라 칭했으나 7부의 명칭은 나란히 동일하다.

당나라 초에 흑수말갈, 속말말갈이 있었고 그 (나머지) 5부는 들은 바가 없다(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속말말갈은 처음부터 고구려에 속하였는데 성이 대씨였다. 이세적이 고구려를 파하고 속말말갈이 동모산에서 보전하였다(거란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당 영주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킬 때에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동모산에서 건국한 것을 가리킴. 당나라는 이해고를 수장으로 하여 12만 명을 보내서 이들을 정벌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천문령에서 대패하고 일부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갔다). 후에 발해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10여 세를 전하였다. 문자, 예악, 관부, 제도가 있었다. 5경, 15부, 62 주가 있었다.

흑수말갈은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잇닿았고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였는데 역시 고구려에 속하였다. 일찍이 15만 병력으로써 고구려를 도와 당 태종에 항거했는데 안시성에서 대패하였다. 개원 년간(713~741)에 (당나라에) 내조하여 흑수부가 설치되어 흑수부  추장을 도독과 자사로 삼았으며 장사감을 설치했다. (당나라는) 도독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고 헌성이라 이름하였으며 흑수경락사에 제수하여 다스리게 했다.

그 후에 발해가 성강해져서 흑수는 발해에 속하게 되어 (당나라에) 조공 보내는 것을 단절하게 되었다. 오대 시대에 거란이 발해 땅을 차지하니 흑수말갈은 거란에 속하게 되었다. 거란의 호적에 있으면서 남쪽에 거주하는 자들을 숙여진이라 불렀고, 북쪽에 거주하면서 거란의 호적에 있지 않는 자들을 생여진이라 불렀다. 생여진의 땅에는 혼동강, 장백산이 있는데 혼동강 역시 흑룡강이라 불렀던 바 이를 일컬어 백산흑수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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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읽고서
"봐라, 여진족 조상은 말갈족이라 하지 않느냐"
하며 헛소리 하는 인간들이 제발 이 땅에서 사라지기를 바란다

이 땅, 우리 대한민국에서 역사연구는 미완의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다름 아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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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바클럽 20-10-09 13:06
   
뭐랄까 저 시대는 요즘시대 다민족 국가 중국과는 느낌이 다른것도 같네요. 고구려나 발해를 오늘날 중국에 빗대서 다민족국가였다고 하는건 어쩌면 시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조선족도 살고, 고려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살고 탈북인들도 사는데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다 달라도 민족이 다르다 말하긴 어려운것 처럼 말이죠. 듣다보면 우리랑 그냥 같은 민족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역알못이 대충 줏어듣기에는 말이죠.
Assa 20-10-09 13:08
   
고구려를 동북의 변방국가라 칭하기에는 북방에서의 영향력이 너무 쌘 국가인듯
나스디 20-10-09 13:09
   
글이 너무 어려워서 웹툰 나오면 한번 진지하게 봐드리리다.
화이팅하시길 ㅎ
촐라롱콘 20-10-09 13:23
   
[[일찍이 15만 병력으로써 고구려를 도와 당 태종에 항거했는데 안시성에서 대패하였다.]].....???
.
.
위 문장에서만 보면 당시 고연수-고혜진이 이끈 고구려군 15만명 전부가
흑수말갈에서만 동원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저만의 착각인건지.....???

당시 말갈7부 각 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규모가 각기 수 천명 규모이고
7부를 죄다 합쳐도 수 만명 규모인데, 어떻게 흑수말갈 단독으로 15만을 동원할 수 있는지....???

확실히 "금사"는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운 사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또다른 예로 완안부의 시조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기록 하나로 인해
이 땅의 적지않은 환빠에 가까운 무리들이 혹하는 결과를 낳고 있으니.....^^
     
굿잡스 20-10-09 13:45
   
?? ㅋ

촐라>

이 무식한 인간의 허접 소리는 여전하구만(환빠 드립 몰아가면 본인이 좀 유식해보임??ㅋ

식근론 타령질에 반자이 무대포나 찬양하는 수준이니)

당연히 저 내용의 15만에는 흑수말갈이 소수로 참가.

나아가  아래 당나라 이세민에 대패 어쩌고도 사실이 아니지. ㅋ(주필산 전투에서 이세민의 계략에 전초 일부가 패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력 고구려 10여만 대군은 건재 안시성의 수성과 함께 야전에서 효과적으로 당나라 대군을 내지로 들어 오지 못하게 수개월 봉쇄.

결국 당 이세민은 요동의 밀집 외곽 방어선을 제대로 뚫지 못한채 허겁지겁 도망가듯 퇴각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 돌아와 병사)

저런 당나라 뻥질 내용이 어디서 나오는지나 쳐알고 어쩌고 허접소리 하남?

엄연히 당나라가 편찬한 춘추필법의 소위 정사에서 나와 후대 재조합. 그렇다고 몇몇 구절로 전면 부정할거면 서토 사서는 괘사가 수두룩.

그래서 여러 사서를 비교 교차해서 검증을 하고 연구라는걸 하는 것이고.

한심한 인간하군. 쯧
     
굿잡스 20-10-09 13:57
   
자 그럼 저 금사 내용 뒤편에 등장하는

이런 소수의 흑수부락에 들어가 이후 서로 죽고 죽이는 원한 분열된 부족을 선진 규범으로 통합시킨 신라계(고려인) 인물의 내용이 단순 뻥가에 이걸 말하면 환빠질??ㅋ 일가?

이 금사외에도 송의 송막기문이나 고려의 기록등에서도 대동소이하게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

그럼 이런 여러 사서의 비교 교차에서도 다르지 않은 기록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몬 무식한 용자에 자폭질 쳐한다고 전면부정에 환빠니 쳐 모는지? ㅋ

이런 동북아 여러 정사 그것도 비교 교차된 기록마저 부정 쳐하면서 연구니 논문 드립을 쳐하남? 한심한 인간하군.(저번에 보니 연구 논문을 올려줘도 정작 본인이 ㅂㄷㅂㄷ 허접소리나 주구장창 쳐하더만)

이런 흑수말갈은 우리와 오랜 지역 공동체로 이후 발해부흥 후예들과 연합 반요의 요와 송까지 멸망시키는게 엄연한 사실인데 그걸 마냥 반자이 무대포나 빨면서 부정쳐하고  싶으니 환빠니 ㅂㄷㅂㄷ질  매번 쳐하군.(또 지나면 똑같은 어그로질 반복)

애잔.



정강의 변(靖康之變)

서토 하한족 송이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군주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자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여진(女真)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완안씨(完顏氏)라 호칭하였다. 완안(完顏)은 한어(漢言)로 「왕(王)」과 같다.

ㅡ『송막기문』남송 홍호가 포로로 잡혀간 송 군주의

송환을 위해 15년간 대금의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쓴 견문록.


어떤 이가 이르기를, “옛날에 우리 평주(平州)의 승려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를 일컬어 금의 선조라 한다.”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평주의 승려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았는데, 여진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 태사(古乙 太師)라 하였다. 고을이 활라 태사(活羅 太師)를 낳았다. 활라에게는 아들이 많았는데, 맏이를 핵리발(劾里鉢)이라 이르고, 막내를 영가(盈歌)라고 일컬었다. 영가가 가장 재지와 용력이 뛰어나[雄傑], 뭇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맏아들인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였다. 오아속이 죽으니 동생인 아골타(阿骨打)이 섰다.”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8 > 예종2(睿宗二) > 예종(睿宗) 10년 > 1월
     
굿잡스 20-10-09 14:00
   
태조가 국경에서 요병을 패배시키고 야율사십(耶律謝十)을 사로잡자 양복(梁福), 알답자(斡答刺)로 하여금 발해인을 회유하면서 말하기를, "여직(女直)과 발해(渤海)는 본래 한 집안입니다."라 하였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두 물길 7부였다.

시조(始祖)는 완안부(完顔部)에 이르러 오래 살았는데 그 부 사람들은 일찍부터 타족 사람들을 죽였고, 이로 인해 양족은 원한으로 싸움이 그치질 않아 해결되지 않았다. 완안부(完顔部) 사람들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 "만약 당신이 완안부 사람의 복수심을 서로 풀어주어 양족이 서로 죽이지 않게 해 준다면, 완안부에 나이 60에 미혼녀가 있으니 서로 결혼시켜 주고 완안부 사람이 되게 할 것이요."라 하였다.

시조(始祖)는 말하기를, "좋습니다."고 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사람 1명을 살인한 후 싸움이 해결되지 않으면 손상은 점점 더 커집니다. 살인사건들에 대해서는 주모자 1명만 처벌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건으로 보상토록 하면 싸움도 그치고 이득도 될 것입니다."라 하니, 피해자 가족들은 이에 따랐다.

시조와 사람들은 규정하기를, "만일 사람을 살상할 경우, 살인자가 피살자 가족에게 자기가족 1명, 암말 10마리와 수말 10마리, 암소 10마리, 황금 6냥을 주면 즉시 양측은 화해하고 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의거하여 위 사건은 이 규정대로 시행되었다. 여진(女眞)의 풍습에 살인하면 소와 말 30마리 보사아은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살상한 자들의 배상이 규정대로 시행되면서 완안부 사람들은 이 규정을 믿고 준수하였으며 시조에 대한 사례로 청우(靑牛) 1마리를 주고 60세 된 여자를 신부로 데려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시조는 마침내 청우를 이용하여 신부집에 보낼 결혼예물을 마련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마련하였다. 후에 아들 둘을 낳아 오로(烏魯), 알로(斡魯)라 하였고 딸 하나를 낳아 주사판(注思板)이라 하였는데 이로써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 14년(1136년) 함보는 시호를 경원황제, 묘호를 시조(始朝)라 하였다.

황통 4년(1144년) 그의 능묘를 광릉(光陵)이라 하였다.

황통 5년 시호를 추증하여 시조의헌경황제라 하였다

ㅡ금사(金史) 서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