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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09 13:53
말갈 여진족에 대한 문외한의 질문`
 글쓴이 : 치즈랑
조회 : 703  

사실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헷갈리는 게 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만
우리 역사에 포함되지 않은 걸 이상하게 봅니다.

누구도 얼버무립니다.

<항상 이게 의문입니다.>

언어가 다르긴 하지만...
이민족이고 오랑캐라고 말하죠.
우린 짱개들의 범주에서 오랑캐인데도.
우리 조차도 분리 하는 것 같아요

우리 민족의 흥망 성쇠와 항상 같이 하였습니다.
그들이 융성 하였을 때는 더더욱이나 분리 되어 보는 것 같아요.

여기서 의문...
여진족 말갈족 만주나 몽골도...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우리 역사에 편입 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우리 역사에 편입 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보통 북방 영토 얘기가 나오면 환빠라고 몰아 비하하는 목적이 무얼까?
곤란한가

만주족이나 여진족이 우리 민족의 주변인이라도 
대륙을 정벌한 우리 역사가 된다면...

<우리는 중국을 정복 한거 아닌가 말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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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lector 20-10-09 13:58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랑 아주 가까운 친척이긴 하겠습니다만...
지금도 그 직계 후예들이 명백히 존재하니...
우리가 그 후예임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족보 꼬여서 그러는 거 아닐까요???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명분을 주게 되는 거고...

어차피 이핏줄 저핏줄 다 이어져 있으니, 힘센 놈이 통합하면 그 뿐이다... 그럼 하나의 민족이고 하나의 나라다... 이딴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해버릴 우려가 크죠...

아깝고 아쉽지만 멀리 해야 한달까... 그보다는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게 더 우선이니까...
     
치즈랑 20-10-09 14:01
   
그런가요...
없습니다 20-10-09 14:01
   
언어나 문화가 한민족계열과는 전혀 다르고 명백한 후손인 만주족이 존재하거든요..
     
치즈랑 20-10-09 14:04
   
명백히 그 곳이 우리 땅이라는데 확실하지 않나요.

조선과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땅
그곳에 사는 우리 민족의 백성 아닐까 싶어서요.

조선의 토호들은 여러 이유로 대륙을 흠모해 왔고
그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민족과 선을 그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다.

의미없는 국경선은 조선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짱개들이 그어 놓은 선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 생각했겠죠.
인정 받기 위한 국경선
          
없습니다 20-10-09 14:11
   
영토 개념으로 접근할께 아니죠. 그쪽 땅은 소유기간도 여잔족이 훨씬 긴데요..
          
booms 20-10-09 15:00
   
에이 그런식이면 오히러 만주족 땅이죠.

고구려때도 그들이 피지배층으로 생활했던곳인데
촐라롱콘 20-10-09 14:07
   
여진-만주는 우리 민족과 역사적으로 얽힌 게 많으니

우리 역사 편입 어쩌고의 건덕지가 다만 몇 %라도 존재한다지만....

몽골은 우리 역사 편입의 근거로 다만 0.1%라도 존재할만한 근거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쌈바클럽 20-10-09 14:08
   
환빠얘기는 사실 좀 복잡한거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환단고기라는 위서(위서인게 정설일걸요)를 기반으로 일부 일리있어 보인다 여기거나 다소 허황된(다른 사서로는 도저히 검증이 안되는 오직 환단고기에만 있는)내용을 사실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서들의 기록에 대하 부정하는 태도를 지적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일부의 서서만을 기준으로 그와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을 입막은 하는 용도로도 널리 쓰이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역사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치즈랑 20-10-09 14:10
   
그렇죠. 공부 좀 할 걸 그랬어요.~ㅋㅋㅋ
이제와서...대가리 뽀개지게 공부 좀 해 볼까요.
감방친구 20-10-09 14:10
   
말갈과 우리를 구분해서 보려는 것은 중국, 특히 당나라의 의도에요

북사, 수서, 진서 등이 당 태종과 당 고종 시기에 편찬됐는데

진서에서는 아예 고구려전을 수록하지 않았고
북사와 수서는 말갈과 고구려를 분리해서 이질적으로 인식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런 이유는 고구려를 적대시하고 정벌하고자 하는 야욕과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 때문입니다

그 이전 시대인 6세기 말에 편찬된 위서(북위와 동위의 역사)도 광개토ㆍ장수ㆍ문자왕 시대의 고구려 강역을 동서 2천 리, 남북 1천 리의 소국으로 왜곡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죠
북위 스스로가 요서(북위에서 요서는 현 진황도시를 가리킴) 바깥의 모든 나라와 종족에 대한 지배권이 고구려에게 있음을 여러 경로로 인정했으니까요

말이 다르다 하는 것은
삼국시대까지 돌화살촉을 쓰고, 12세기까지 갑옷 하나 못 만들고 없던 문화수준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들은 흑룡강과 연해주 일대에서 수천 년 낙후된 생활을 하던 이들입니다

애초에는 같았을지라도 점차 이질화됐고 그것이 격심해졌을 것입니다
     
치즈랑 20-10-09 14:13
   
말이 다르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찐제주도 방언도 못 알아 듣는데요 뭐...

사실 말갈이야말로 우리 역사로 편입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북창 20-10-09 14:11
   
딴 거 없죠. 우리나라가 민족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때는...누가 뭐래도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하면서부터거든요. 교과서에는 통일 신라라고 되어 있는데...발해는? 완전 미친놈들임. 스스로 발해를 버리면서 우리 역사라고 하는 게 말이됨?
암튼, 우리나라는 서양에서 민족주의라고 불리는 것이...18세기가 아닌...10세기에 이미 형성...
따라서 당시 우리나라가 아닌 주변국은 다 오랑캐가 되는 것이죠.
고려는 거란, 여진과 경쟁하면서 지냈으니...더더욱 우리 역사가 될 순 없죠.
     
치즈랑 20-10-09 14:17
   
그럼에도 수작질에 놀아 나는 거 아닌가 싶어요.

말 잘 하셨습니다.
우리 역사에 발해 만큼 중요한 역사가 없지 않나요.
근데도 우리는 말갈 때문에 발해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강력한 발해가 역사 교과서에 몇줄로 정의 내려진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모종의 꾸밈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요.

주변 찐따들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내서 우뚝서려 하는데...
우리는 선의라는 명복으로 나서서 발해를 버리네..아이쿠야
     
촐라롱콘 20-10-09 14:31
   
그러고보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신적으로도 온전한 삼한-삼국의 통합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중후반에 해당하는 몽골침략기를 거치면서부터군요....!!!

고려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민란 가운데 백제-후백제 또는 신라계승을 표방한 무리들도
있었으니까요~~ 다시말해 구 후백제나 신라 지역의 지방민들 가운데서는 고려보다는
후백제, 신라인으로의 정체성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었던 인구비중이 상당했다는 반증이지요!

당장 무신정권을 거쳐간 실권자 가운데 하나였던 이의민조차도 신라부흥을 시도한 적이
있는 걸 보면.... 

몽골 침략을 거치며 한반도 서북지역에 한정된 지역시조에 한정되었던 단군이
민족 전체의 시조로 부상하며 울 민족 전체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북창 20-10-09 14:53
   
잘못알고 계신듯...
고려 중기의 민란은 그냥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그들이 아직 동화가 안되어서가 아닙니다. 이미 거란과 여진과의 전쟁에서 민족적으로 동질감을 얻었죠.
발해 황족과 그 유민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발해와도 통합을 이뤘구요.
한마디로...왕건으로 민족의 완전한 통합 > 대외 전쟁으로 민족주의 형성...이런 과정이죠.
     
굿잡스 20-10-09 14:36
   
수서(隋書)에 백산부(白山部)·속말부(粟末部)·백돌부(伯咄部)·안거골부(安車骨部)·불녈부(拂涅部)·호실부(號室部)·흑수부(黑水部)라는 7부의 말갈 기록.


이 수서라는게 고수 고당 대전으로 수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당나라 전기부터 고종 즉 계속된 고구려와의 대전에서 추가 집필된 내용인데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두번의 대전 마저 대승을 하고
이후 고구려 내분으로 대막리지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는 초유의 사건으로

이후 당나라도 국력을 쥐어짜내면서 3차 대전이 급발발하여 요동의 허실과 동요하는 고구려 성을 상대로 점으로 치고 들어가 평양성 함락은 어찌 성공했지만

여전히 건재한 각지의 고구려나 백제등의 저항으로 국력만 크게 고갈 얼마 다스리지도 못하고 평양에서 요동 요서로 밀려나 버리군요.

이런 가운데 대조영이 끌려간 유민들과 탈출 요동 고구려 세력과 재규합 30여년이 안되어 대발해를 세우는데

뜬금없이 발해 즉 고구려 전역에 말갈 어쩌고 서토인 사서에서 기록장난질. ㅋ

(이건 딱 다분히 오늘날 동북공정식 의도적 사관이 반영. 이게 지나서 후대에 다시 새로운 기록을  추가 편찬할때는 이런 ㄱ장난질을 그냥 편집해서 재반복 재생산하는게 상당)
     
굿잡스 20-10-09 14:42
   
그런데

중세 고려는 알겠지만

발해인들을 대거 동족의 예로 받아들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에 상당히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군요.

즉 말갈로 기록된 발해  특히나 속말,백산등은

우리 부여계나 예맥계 즉 고구려민에 그외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이어지는 수천년 예 맥  계의 한민족으로 동화되어진 우리 민족을 엄연히 지칭에

그외 외곽의 수렵이 강하던 흑수부등도

부여에 신속에 고구려에 복속 발해시대에는 당의 획책에 발해 무왕이 직접 지배지화 할 정도로

오랜 지역 공동체 백성으로 살았군요.
     
굿잡스 20-10-09 14:44
   
먼저 여진과 발해인은 종족 및 지역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금사에는 完顏部가 고려와는 “본래 같은 곳에서 나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금 태조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여진의 발해인에 대한 인식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이 건국한 나라이며 고구려를 계승하는 의식이 뚜렷했다. 그리고 금 왕실의 시조 역시 고려인 函普15)였으므로 완안부와 발해인 사이에는 혈연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여진족은 발해의 구성원이었으므로 발해인과 지역적으로도 밀접했다. 따라서 금의 통치자는 양족 간의 이러한 친연성을 매우 중시했고, 발해인을 동맹자로 회유하는데 자연스런 기회로 삼았다.
.
.


여진 황실과 혼인을 맺은 자는 주로 요양 大氏, 李氏, 張氏 등 세 가문의 발해 우성이다.

 그들은 태조에서 세종 때까지 황실과 대대로
통혼하였기 때문에 금조 9명의 황제 중에 4명이 모두 발해인 소생으로 바로 해릉왕, 세종, 위소왕, 선왕이었다.

발해 세가와 여진 황실의 정치적 혼인은 두 민족 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발해인이 금대 향유한 우월적 지위를 장기간 보유할 수 있었다.

.
.

희종 초에 삼성을 설치할 때 宰執은 거의 여진 종실 일색이었다. 그러나 해릉왕이 희종을 시해하고 즉위한 후에 종실 귀족의 강열한 반대에 직면하자 자신의 황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종실을 배척하고 일반 여진인 및 한인ㆍ발해인ㆍ거란인 등 가운데 재주가 있는 사람을 발탁하여 재집에 임명하였다.

그 중에 가장 전형적인 사람이 장호였다. 그는 貞元3年(1155)에서 正隆6年(1161) 혼자서 수상을 7년간 맡았는데 금대 극히 드문 경우로서 이것은 해릉왕의 용인정책
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원비가 모두 발해인이었던 해릉왕은 그들에 대해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발해인 관료를 중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재위시기에 궁중의 근시조차도 대부분 발해인 내지는 발해인과 특수한 관계를 가진 자들이었다.

예컨대
해릉왕이 양주에서 시해를 당했을 때 그 신변에 유일한 보위자가 바로 大慶山이었으며 또한 변고를 들은 후에 정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온 자도 발해인 大磐이었으므로 해릉왕과 발해인의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해릉왕이 시해당하기 직전에 동경유수 烏祿은 주변으로부터 추대되어 황제에 즉위하였다. 세종도 그의 어머니 및 다수의 후궁이 발해인이었다.

그가 요양에서 칭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발해인의 도움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세종 어머니의 동생이었던 李石이다. 그는 이전에 동경부유수 高存福 등이 해릉왕의 뜻에 따라 세종을 감시하며 격구를 빙자하여 그를 살해하고자 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세종에게 기선을 잡아 거사를 실행하도록 권했다.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 「유예열전」에 이석이 빠져있으나 外山軍治에 의해 그가 발해인으로 고증된바 있다.27) 또한 三朝北盟會編 권245에서 「族帐部曲錄」을 인용하여 “李受는 발해인이다. 葛王(세종)이 즉위하자 외삼촌을 참지정사로 삼은 적이 있다”28)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의 외삼촌이면서 참지정사를 맡았던 자는 오직 이석뿐인데 여기에서는 이수라고 기록되어 있어 아마도 이석의 誤記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금사 권86 「李石傳」에 의하면, 이석의 자는 子堅이고 요양인인데 貞懿皇后의 동생이다. 선대가 요에 출사하여 재상이 되었다. 고조는 仙壽이고 …… 부친은 雛訛只이다. 이석은 인정이 많고 말 수가 적었다. 그리고 도량과 식견이 뛰어났다. 천회2년(1124)에 세습모극을 받았다. … 여러 관직을 거쳐 景州刺史에 이르렀다.29)라고 기록되어 있어 정의황후의 동생인 이석이 요양의 호족이었고 금조에 관리가 되어 그에 상응하는 지위까지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

 금사에는 세종 추대에 힘을 다한 사람으로서 이석만을 들고 있으나 세종의 원비 장씨의 생가에서도 그녀의 오빠와 숙부인 張汝弼, 張
玄素가 세종의 즉위를 기회삼아 달려왔다.
이러한 일은 금사 권83 「장현소전」에 소략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裏面에 이석을 중심으로 발해인의 지원이 있었고, 또한 장씨 일가와도 사전의 묵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발해인은 거란의 반군으로부터 요양을 보호해준 세종을 신뢰하고 숭경했으며 재차 이석의 암약으로 그들을 단결시켜 세종 추대의 분위기를 숙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30)

따라서 세종은 즉위하기 전후에 발해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해릉왕이 즉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종도 종실로부터 유력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많은 종실이 관망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히 신임하고 의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이 가장 신임할 만한 집단은 외척이었다. 당시에 재직했던 재집 가운데 외척 신분의 재집이 6명이었는데 바로 이석, 장여필 등 두 사람이 발해인 외척이었다. 외척의 절대 수는 비록 종실보다 많지 않았으나 직무를 맡은 연인원, 시간과 직위는 모두 종실보다 확실히 높았다.31)




주의할 만한 것은 발해 상층인물과 여진 통치 집단의 갈등으로 인해 이들 양 민족이 서로 미워하지 않았으며 금조 치하에서 발해인은 줄곧 협조적이었다. 요대에서와는 달리 줄곧 어떠한 정치투쟁도 없었으므로 그 민족지위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ㅡ金代 渤海人의 存在樣態 및 政治的 位相(羅 永 男) 중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치즈랑 20-10-09 15:07
   
잘 봤습니다.
노원남자 20-10-09 14:20
   
말갈더러 우리민족이라하는건 역사를 똥구멍으로 배웠나 생각케하네요.여요전쟁은 배우지도않았는지..
     
치즈랑 20-10-09 14:22
   
네...
떵구멍...


고구려랑 백제랑 신라가 안 싸웠던가요? ㅇ.ㅇ
님은 뭘로 배웠을까요?
     
굿잡스 20-10-09 14:22
   
요나라는 거란이군요.ㅋ
     
Collector 20-10-09 14:27
   
견해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너무 과격한 표현들은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과격한 표현이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논리적 토론이 아니라...
그냥 감정적인 싸움일 뿐이잖아요...
제 3자가 보기엔 상당히 불편함...
미친둘리 20-10-09 14:25
   
국경 확장과 동화 정책이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같습니다. 고구려 때 비록 그들을 복속하긴 했으나 세력권에 둔 정도라 강한 동화 정책을 펴지 않았고, 후에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이 뚜렷해진 고려나 조선 시대엔 지속적으로 동화 정책을 폈으나, 국경 확장이 원하는 만큼 되지 않아 동화시킨 인원이 소수에 불과했고요.
     
치즈랑 20-10-09 14:27
   
그런 요인도 있었을 것 같네요
하시바 20-10-09 14:41
   
경제력의 부족으로 저들을 포섭못한것이죠.
실제 조선 왕조 세조 까지만 하더라도 조선백성으로 받아달라청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기술적으론
도로사정도 열악했고요. 근현대까지도 전라 경상남도에서 서울 올라오기 어려운데
의주 만포 중강 백두산 넘어서 오가기가 쉽지 않았을거예요.

많은 얘기를 해드리고 싶지만 진빼기는 싫으네요.

명나라 역할도 컸어요. 만주와 조선의 틈을 벌려놓고 싶어했거든요.
짜 ㅇ 개... 더 말 안할랍니다.
     
치즈랑 20-10-09 15:02
   
222
booms 20-10-09 15:03
   
말갈은 유목민이고 여진은 유목+농경을 같이한 민족으로 압니다. 우린 농경이구요.

생활상이 다르니 문화와 언어가 고착화 되고 당연히 이질감이 생기고 굳어지니 융화되지 못하는거죠..

그래도 과거 북한주민들이 만주족과 말이 통했다라고 하는거보면 한국가로 묶였으면 이질감은 크게 해소 됐을것같긴한데...우리(조선, 고려)에선 그들은 이용하기 좋은 망나니들 정도일뿐 크게 존중하지는 않았고 포섭하려는 노력도 안했습니다.
     
치즈랑 20-10-09 15:10
   
우리를 기마민족이라고 하긴 하죠.
          
booms 20-10-09 18:26
   
고구려때문에 기마민족 이야기가 있지만 솔까 기마민족이라기엔 좀 그렇습니다.
굿잡스 20-10-09 15:07
   
근현대 지금의 요동 동북삼성과 역사를 일대를 잃게한 주적은

버러지 전범 Jap이 주요 제공자 중 하나군요.


근세 조선시대에도 압록강을 너머 요녕성 일대의 봉황성 책문을 서토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자 경계에 내지로 인식되었고

명 하한족 왕조 시절에는 요동은 요동도사같은 일반 행정 기관으로 편입되지 않는 군정 기관을 일부 요동에 국한해서 설치에 대한제국은 근대 간도에 영향력을 키우고 있던 상황.


(지금의 요동 일대는 서토 하한족을 정복한 만주 왕조의 산타크로스 선물이자)

이걸 버러지 전범 쨉이 대한제국과 만주 침략 이후에도 계속해서 온갖 쓰레기 짓거리를 쳐하다 핵쳐맞고 급패망하면서

요동 일대가 공백 상태가 되면서 역사적으로 우리 대(삼)한의 수천년 본거지이자 활동무대에 여진과 오랜 지역 공동체로 어느 정치 세력이 건재했다면

자연스럽게 귀속될 공간이 수천년 유사 이래 없던

피지배 서토 하한족들에게 어부지리로 넘겨줘버리게 되군요.
     
치즈랑 20-10-09 15:09
   
이건 알아요...쪽바리 세킫
굿잡스 20-10-09 15:10
   
수천년 우리 역사에서 유례가 없던 국호가 지워진 35년이

길지는 않지만 수천년 미개 우리 발 아래 있던 왜구에게 침탈 당한 것이 이후 정치적 공백속에 분단이나 요동의 지배력이나 영향력 상실에 상당한 도미노 악영향을 미치게 되군요(역사관 마저)

서토 하한족이야 고조선 말기 만주의 강자 부여부터 열국시대의 여러 세력 중 위만조선 정도 침공(이것도 상당히 개고생)이였지

도리어 북방과 동방에 쳐발리고 살았던게 서토 하한족들의 실체이고

앞에 보이는 화살도 위험하지만

전범 쨉같은 우방같은 모양새로 뒤에서 칼침 놓는 버러지들을 가장 경계 해야 하는게 역사적 뼈저린 경험이자 교훈(이러한 버러지 전범 쨉의 식사관은 고대부터 자행된 서토인들의 동북공정질에 오늘날에는 노골적  문화재 파괴 조작과 맞물려 쨉쭝과 토왜들의 의도적 대한 역사에 대한 조작과 폄하들이 난무)
     
치즈랑 20-10-09 15:19
   
동감합니다.

토왜들이 진짜 나쁜 넘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