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갈은 맥, 또는 예맥의 이칭입니다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에요
다만 맥, 또는 예맥을 비칭할 때에 말갈이라 한 것으로
대체로 국가 단위를 이루지 못 하였거나
침략을 일삼을 때에 말갈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고구려는 대수맥과 소수맥이 있었고
대수맥이 소수맥을 흡수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춘천ㆍ강원 일대에는
예맥국, 또는 맥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말갈로도 불리워서 사학계에서는 '영서말갈'이라고 호칭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 목단강-두만강-남연해주 일대를
사학계가 몹시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신당서에서 예맥의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부여와 고구려 역시 예맥, 또는 맥이라 하였습니다
말갈은 우리 역사에서 사서 상으로는
기원전 1세기부터 등장합니다
동명성왕이 졸본천 근처 비류수 하류 가에 처음 창건하였을 때에 말갈과 가까워서 물리쳤다고 나오는데 이후 고구려의 지방민, 또는 부용세력으로 계속 나옵니다
고구려 서쪽의, 사학계에서는 태자하 상류에 비정하는 지역에는 양맥이 있었습니다
말갈이 중국사에 등장하는 것은 6세기 말이며
수나라가 들어서고 나서 본격 등장합니다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을 데리고 598년 요서와 유관을 선제 타격하는데 이 때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때입니다
고구려는 거란을 시켜서 604년 말에서 605년 초 사이에
수나라 영주를 공격하여 빼앗고 그곳에 수십만 명이 운집할 수 있는 거대한 국제 교역시장을 만듭니다
고구려는 속말말갈의 일부세력을 현 요서지역의 거란 인접 지역에 보내서 거란을 단속하며 수나라를 방비하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세력 가운데 일부인 돌지계 세력이 고구려 중앙과 다툼 끝에 이탈하여 수나라에 귀부합니다
이 때가 수 양제 즉위 초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후 사서에는 이를 과장하여 속말말갈과 고구려가 서로 전쟁을 일삼았다는 기술이 등장합니다
북사와 수서는 당 태종을 거쳐 당 고종 때에 편찬된 사서입니다 고구려 정벌이 거듭 실패한 다음입니다
즉 사서기술에 있어서 정치적 의도가 충분히 담겨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당 태종 때 편찬된 최초의 관찬 정사인 진서에는 고구려전이 아예 없습니다
북사와 수서에서 기술한 말갈의 위치를 보면
대부분 북류 송화강과 길림합달령, 동류 송화강 바운더리 안에 위치합니다
이 지역은 본래 부여의 강역이었습니다
그 생활 상도 사서 기술이나 물질문화를 보면
부여나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고 낙후된 정도로
정주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고구려 백성이었습니다
유목이라 함은
돌아댕기면서(유) 목축을 한다(목)입니다
말갈의 대부분은 유목민이 아닙니다
이 시기의 유목민은 거란, 해, 실위, 지두우 같은 족속들이 해당합니다
고구려는
일본에서는 '고마'라 하였고
서역에서는 '뵈클리', '무쿠리', '미쿠리' 라 하였습니다
이 소리값과 말갈의 소리값을 잘 보세요
제가 하는 역사 이야기는
어디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 역사교양서 대충 읽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서를 직접 읽고 교차분석하여 고찰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