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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12 18:16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까지 몰아낸 후에
 글쓴이 : 워해머
조회 : 1,422  

백제계와 고구려계 유이민들을 적당히 분류해서 각 지역을 안정화시킨 후

신라는 갑자기 확 늘어난 영토에서 거두는 세금과 각종 물산 때문에 

지배층이 거주하는 경주 지역은 급격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 겁니다. 

신라 지배층 입장에선 축복과 같았을 거예요. 망국의 유민들은 한동안 그렇지 않았겠지만요.

예전에 어디서 본 글인데 문무왕의 어마어마한 식사량에 대한 기록이 통일 후에

특히 옛 백제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식재료 때문에 생긴 음식의 변화와 관련됐을 거라고 그러더군요.

멸망 당시 백제의 중심지이던 충남 지역은 농사도 잘되고 토양이 기름진 데다가

전라도 지역은 기후도 워낙 온화하고 서남해에서 잡히는 각종 해산물과 생산하는 소금 때문에

동해 쪽과는 다른 식자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되면서 신라 지배층이 더욱 풍족하게 음식을 먹었을 거라고.

통일신라 역사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대구로 천도하지 못한 것. 천도했으면 아마 신라가 더 오래 갔을 듯.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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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새이닫컴 20-12-12 18:19
   
당시 경주는 세계도시중에서 거의 탑급
     
워해머 20-12-12 18:20
   
당시 경주 인구가 90만이니 100만이니 하는 건 개인적으로 믿지 않습니다만 통일신라 전성기 때 경주는 분명 상당히 화려했을 겁니다.
          
인왕 20-12-12 18:29
   
상하수도가 없는 100만 도시는 상상하기도 싫으네요....으~디러
               
G생이 20-12-12 18:30
   
월성 해자 부분 발굴결과 보니 기생충으로 엄청나게 득시글 거리더라고요 아마 통일신라 초기까진 해자였다가 평화가 오고나서 해자를 상실한후 오물통 비슷하게 변했을거라고 하더군요
                    
워해머 20-12-12 18:31
   
백제 유적 중에서도 화장실로 쓰던 곳에서 기생충이 엄청 나왔죠.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전근대 사람들은 몸에 기생충을 달고 살았습니다. 당장 북한만 봐도 탈북하는 과정에서 총에 맞은 군인 몸에서 기생충이 엄청나게 나왔죠 ㄷㄷ
                    
안알려줌 20-12-12 20:47
   
조선말기 대한제국시기 외국 선교사나 해외 교육자들 오자마자 하던게 기생충 구제.

머리부터 발끝 이 벼룩 부터

소화계통에 엄청난 기생충이 있었다고
               
굿잡스 20-12-12 18:47
   
신라는 바둑판 형태의 정렬된 계획도시 아래

일정 블럭의 방이라는 각구역내 공간에는 각 집안내 우물 옆에 배수로가 집밖 담장의 소배수로를 통해 다시 대배수로 연결되어 있는게 확인되군요(길도 마차가 단니는 도로와 사람이 단니는 인도가 구분)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eunayoon715&logNo=220882810189&proxyReferer=https:%2F%2F
G생이 20-12-12 18:40
   
신라 골품제의 한계로 각국 유민들의 불만은 계속 누적되어 왔던것으로 압니다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고 장안국을 세웠을때 호응한곳 대부분이 거의 구백제 영역이더라고요

견훤도 나라를 세울때 백제 재건을 모토로 하고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한걸 보면 옛 삼국의 유민의식이

계속 남아있던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선 초중기까진 고구려, 백제 ,신라 옛언어로 된 노래가 전래되서 세종이 수집하라고 하는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고 생각보다 삼국유민의식이 오래갔던거 같아요
     
워해머 20-12-12 18:42
   
그래서 신라가 좀 더 오래 가고 싶었으면 잠시 고통이 따르더라도 전통적인 경주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좀 더 한반도 중앙에 가까운 곳으로 천도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그래야 변방 백성들과도 좀 더 가까워질 수 있고 동화도 더 빠르게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라 왕실의 뛰어난 외교력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남을 먹은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후에도 지속한 지배층의 폐쇄성은 아쉽게 보는 입장입니다.
          
G생이 20-12-12 18:55
   
그것도 임진강 이북은 완전히 한번에 줏어온게 아니라

700년대 중반  ~ 신라말 쯤에 서서히 먹은걸로 압니다

개성은 신라말기 로 치면 신도시라고 할까나요?

왕건이 아직 고려를 세우기 이전인 신라영향력이 미치던 시절부터 어느정도 형성된 곳이라고 하더군요
               
워해머 20-12-12 18:57
   
그건 저도 알아요. 신라의 통일이 여러모로 불완전했죠.

그래도 어쨌든 각 나라의 백성들이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역사 때문에

후에 분열이 됐더라도 또다시 금방 뭉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신라가 한민족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고 생각함.
이름귀찮아 20-12-12 19:04
   
그 당시 유통 시스템 생각하면 제한적으로 몇몇 품목들이 장기 보관할수 있는 상태로 좀 들어온거겠조

지금처럼 생각하면 곤란하저 하물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내륙지역에서는

염장하지 않은 바다 생선 먹기는 거의 불가능 했었음
     
워해머 20-12-12 19:05
   
해산물은 염장해서 옮겼을 것이고 과일도 대량으로 수송해서 썩은 건 다 버려도 소수 온전한 건 지배층이 소비했겠죠. 강과 해로를 이용할 수도 있으니 무시 못 함. 서남해 쪽을 신라가 먹으면서 소금도 대량으로 얻을 수 있었을 거고요. 별거 아니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름귀찮아 20-12-12 19:11
   
그당시 소금을 얻는 방식은 바닷물을 끓여서 만들었어요

지금 처럼 염전에서 소금물 말려서 소금 얻는것처럼 생각하시면 곤란;;;;
               
워해머 20-12-12 19:17
   
당시에도 서해와 남해가 소금 얻기 더 좋았습니다. 백제 영토 전체를 꿀꺽 삼킨 게 신라인데 소금 생산량도 당연히 월등히 높아졌겠죠. 일제 강점기 때 천일염이 들어오기 전 삼국 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쓰던 게 자염인데 그중에서도 갯벌을 끓여서 얻는 방식이 정통이고 이 자염은 갯벌이 발달한 서해와 남해를 중심으로 생산됐어요.
싸만코홀릭 20-12-12 20:29
   
유래가 없는 천년왕국인데 얼마나 더 오래가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