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40만명 VS 고려 3천명 / 133배 병력차를 이긴 양규 장군
1010년(현종 1) 거란 제2차 침입 당시 거란의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으로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전투는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간 전개되었다.
흥화진에는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가 거란의 압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어쩔 수 없이 거란은 흥화진을 남겨둔 채 통주(通州) 방면으로 진격하여 삼수채에서 고려 삼군(三軍)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康兆)는 적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거란은 강조의 서신을 만들어 흥화진의 항복을 재차 요구하였으나 양규는 이를 단연히 배격하였다.
거란 제2차 침입 때의 흥화진전투는 양규 등의 결사항전으로 흥화진이 고수됨으로써 거란군의 남하 병력을 분산시키고 그들의 후방을 교란하게 되어 고려군이 반격의 여건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거란 제3차 침입 당시 흥화진전투는 강감찬의 뛰어난 전술구사와 병력운용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귀주대첩의 전승을 거둘 수 있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