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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28 17:10
한민족과 한반도를 구한 또하나의 인물
 글쓴이 : 제리리
조회 : 1,409  

바로 

고려 원종

쿠빌라이칸이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을때 

쿠빌라이칸의 편을 듬 

당나라도 물리친 옛 고구려의 계승국 고려의 왕자가 자기 편을 들고 이에 힘입어 

대칸이 됨 

흥분한 쿠빌라이칸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징기스칸의 황금씨족인 자신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를 아내로 줌 

그리고 공석인 고려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려는 

고유의 풍습과 역사를 인정 받을 수 있는 불개토풍을 허락 받음. 

불개토풍...말그대로 원래의 땅을 뒤집지 않는 다는 말..


몽골은 말그대로 

바이킹이 영국에 상륙해서 힘쓸던 거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을 죽음의 사신들..

몽골에게 사라진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수많은 제국들..

러시아와 동유럽.

멸망직전의 송나라..

일본을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다 싶이 보전됨..

물로 몽골 항쟁시 말로 할수 없는 국가와 민족에 피해는 있었지만 적어도 

멸망하지 않은 건 이 분의 한순간의 탁월한 선택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아재에요 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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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a 20-12-28 17:13
   
불행 중 다행..
우갸갹 20-12-28 17:15
   
대단한 배팅이었음
그 당시 쿠빌라이가 열세였다고 하던데
워해머 20-12-28 17:16
   
원종은 솔직히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다 보다는 줄을 잘 서서 그랬던 것이고 진정 고려를 구한 고려의 왕은 현종이죠. 어렸을 때부터 온갖 살해 위협과 협박으로부터 살아남고 즉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거란의 침입을 받았지만 모두 극복하여 고려가 최전성기를 맞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인물.
     
화난늑대 20-12-28 17:17
   
현종은 ㅇㅈ
     
Assa 20-12-28 17:19
   
그분은 당연하죠..
     
웰빙생활 20-12-28 17:26
   
현종인정합니다.
조선이 고려를 우습게 알아도 고려는 대단했죠.
현종시절 요나라를 막아냈던 그 기백이 살아 있었으면
무신정권으로 인해 나라가 엉망진창이 아니였다면
몽골도 고려에 이기지 못했을 듯
몽골이나 요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깐
스핏파이어 20-12-28 17:16
   
줄서기의 중요성!ㄷㄷㄷ
화난늑대 20-12-28 17:16
   
막내딸은 지금이나 저때나 특별했쥬 ㄷㄷ
북두구진 20-12-28 17:17
   
근데 아리크 부케와 쿠빌라이가 싸울 때 고려가 아리크 부케편을 들고 후방에서 쿠빌라이를 치면

쿠빌라이가 골로 가는 것임..

고려가 운이 좋은게 아니라 쿠빌라이가 운이 좋았던 것임.
     
워해머 20-12-28 17:18
   
당시 고려는 쿠빌라이를 공격할 역량이 없었어요. 국토가 모두 초토화되어서 잿더미 된 상태였음.
          
북두구진 20-12-28 17:20
   
그렇더라도

왕자 두명이 피튀기게 싸우는데 고려가 편들어준다는게 얼마나 명분인데

북한이 지금 굶어죽어도 우리가 북한 못치고 한대 패줄까 못하듯이

아무리 고려가 힘들어도 몽골도 쫄리는거임..징기스칸 죽고 제국이 쪼개지고 형제끼리 싸우는데

쟤들이 고려 상대할 정신이 어딨음? 그러니 쫄리는거지

고려가 쿠빌라이를 편들어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쿠빌라이가 칸에 오르는데 그게 고려의 위력인거지..그러니 쿠빌라이가 고려를 산신령대접 해준 것도 그게 고려의 가치임..

고려가 개껌이었간디...여의주에 도깨비방망이었지..
               
워해머 20-12-28 17:23
   
40여년 간의 몽골의 일방적인 침입 때문에 당시 고려는 나라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기록만 봐도 전 국토가 잿더미가 돼서 세금도 제대로 못 거두는 상황이었는데 무슨 힘으로 원정대를 꾸려서 한반도 밖으로 나가나요? 보급도 제대로 못 하는데. 백성들은 무슨 죄임. 원종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어설프게 쿠빌라이 자극했다가 아예 한반도 전체가 원나라 땅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죠.
                    
북두구진 20-12-28 17:25
   
그렇게 비루하게 생각하고 살든지

그렇게 고려가 비루하면 고려가 편들었다고 쿠빌라이가 왜 그렇게 감격해서 칙사대접을 하나?

고려가 그렇게 비루했으면 쿠빌라이가 식은 밥 한덩이 던져 주고 말았겠지..근데 왜 그렇게 칙사대접을 하냐고요

그게 고려의 가치라니까요......왤케 생각이 단순하고 비루한가
                         
워해머 20-12-28 17:26
   
그게 뭐가 비루한가요? 현실 파악 못 하는 게 더욱 웃긴 것 같은데? 그럼 원종은 비루한 왕입니까? 나라 전체가 불바다가 돼서 제대로 기능도 못 하는데 무슨 비루 타령이죠? 오히려 원종이 현실 파악 제대로 해서 쿠빌라이로부터 온갖 혜택은 다 봤는데? 고려가 옳은 선택을 함으로 무려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인 황금씨족에 해당하는 쿠빌라이의 막내딸이 고려로 시집왔어요. 이거 정말 대단한 겁니다.
                         
북두구진 20-12-28 17:27
   
뭐 그렇게 생각하고 살든지
바야바라밀 20-12-28 17:19
   
저거 덕분에  몽골 대빵 선출 투표권도 얻은걸로 아는데....
굿잡스 20-12-28 17: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大金皇帝寄書于高麗國皇帝

"대금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보낸다" ㅡ帝王韻紀

고려가 무신집권기로 무신들의 개인사병화와 정치적 불안(거듭된 정변)으로 강력했던 군사력이 막장화되기 전의

고려 황제의 권위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던 시대상이였군요.

(북방의 패자였던 거란의 요제국 당시 몽골은 거란에 무기등 철저히 간섭 피지배 아래 따구리 종속되어 있었고 송도 이리 저리 쳐발리던 국제 정세. 그런 요를 상대로 고려는 크게는 6번의 여러 대전을  치르면서 귀주에서 유목제국 요의 정예 10만을 회전에서 대패시켜버리다보니 폭주하던 요 전성기의 기세를 쇠퇴시킴)
북두구진 20-12-28 17:37
   
몽골이 대단한 것 같았어도
솔직히 김용옥이 말대로, 걔가 뭐 중화사대주의자이긴 해도, 걔들이 말발굽으로 유럽땅 한번 밟고 온 것 뿐이지 문명이 있기를 했나..초원에서 양이나 치던 놈들이지..
걔들은 제국은 세웠지만 그걸 관리할 능력은 없어서 징키스칸 죽고 바로 망조들었는데
원나라도 오래 가기나 했나..
지금도 몽골 후손들 비루하게 사는 거 봐...백정으로 살잖아..양이나 키워서 잡아먹으면서..
몽골은 800년 전에 한때 국운이 뻗쳐서 불세출의 영웅의 힘으로 단 한번, 딱 한번 빠짝 일어선 것뿐이지 결코 저력이 있는 애들이 아님..

아니 고려를7번이나 침략하고도 멸망을 못시켰는데 뭘 
고려가 그렇게 비루했다는게 도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하는 역사관이여?
몽고놈들과 악착같이 싸워서 전국토가 피폐해졌어도 고려가 안망했어..근데 그런 고려가 마냥 비루해? 개소리지
굿잡스 20-12-28 17:54
   
몽골은 징기즈칸을 이은 오고타이 이후 내부에서 정치적 투쟁이 점차 본격화.

이후 이런 갈등이 노골화 된 시기가 다름 아닌 아리크 부케와 쿠빌라이임.

1259년 몽골은 대대적 남송 정벌을 강행하던 중

몽케 칸이 병사하면서  막내 아리크 부케가  수도에서 정식으로 칸에 등극하자 쿠빌라이도 대대적 남송 정벌을 중지 강화를 맺고

내부 투쟁에 우선 전력하게 되던 시기이군요.

여기서 막내인 아리크 부케는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에서  몽골의 여러 일족과 오고타이가의 지지를 얻으면서

쿠릴타이를 열고 정식 절차를 밟아 대칸에 오르는데 반해

쿠빌라이는 이를 거부 대도에서 편법으로 스스로 대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 무력 투쟁이 시작.

그런데 이미 몽골 수도인 카라코룸은 서토 강북 일대의 물자에 의지하다보니

쿠릴타이를 통해 여러 정치적 입지와 협의에서는  아리크 부케가 우세했고 쿠빌라이는 정치적 동지에서는 열세였지만(고립무원격) 강북을 장악하고 있다보니 수도로 가는 물자를 통제  결국 장기 군사 작전에서 아리크 부케는 열세에 직면하면서 좌절하게 되군요.

이런 상황에서

오랜시간 동방의 천자로 이어져 군림해오던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황제의 정치적 지지와 동북방의 반란 세력이였던 동방왕가를 견제하려는 쿠빌라이의 정치적 실리적 이해는 무신집권기로 이원화 허수아비로 전락한 고려황제의 무신 타도의 서로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고몽간의 강화협상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고려는 몽골제국의 부마국으로 고려는 쿠빌라이의 몽골제국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게 되군요.


쿠빌라이 "당 태종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절요 1260년 원종 1년 3월 17일
굿잡스 20-12-28 18:12
   
거란의 요는 

서토 연운 16주와 동경(요동일대)을 얻음으로

단순한 유목국에서  정주문명권의

곡창지대의 생산력과 인구를 크게 늘리면서 장기적  군사력을 지속할 유목제국으로 본격 발돋움.

특히나 서토의 태행산맥이라는 천연 방패  내지를 얻게 됨으로써 서토 한족 송왕조는 본격 이민족에게 군사적으로 노출되게 되었고

이후 신라계 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대금이 반요의 요와 송 수도까지 함락시키고 북경에서 고구려계 장호가 중도 건설을 총지휘 도시문명을 닦고

다시 몽골의 쿠빌라이에 의해 동방 고려가 부마국으로 몽골 내부 분열까지 제압하자 본격적으로

남송 정벌의 기치를 올리게 됩니다.

이후 서토 한족은 북송의 패망과 내려가 세운 남송마저 멸망하면서

몽골의 사고 팔리는 최하층 노예로 전락.
살게라스 20-12-28 18:55
   
거의 30년동안을 몽골에 침략 당함
강화도로 도망가서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항복선언 하러 몽골에 갔는데 왕위 계승 전쟁중이였음
인적, 물적 자원을 죄다 몽골에 뜯기고 고려 공녀들이 몽골로 엄청나게 끌려갔음
사실상 반식민지 취급당함
     
굿잡스 20-12-28 20:04
   
??

고려 공녀가 몽골에 얼마나 갔다고?? ㅋ(공녀는 모며?ㅋ)

고몽 기간에야 최씨  무신정권이 자신의 보신에 급급 강화도로 천도 정예병들은 측근에 두고  쳐박혀 놀다보니(정치적 이원화로 이미 고려 황제는 허수아비로 전락. 고요전쟁 때 같은 국력 결집을 시키기 힘들었던 상황)

정작 고려의 일개 승려와 노비등 민병대에 당시 날고 뛰던 몽골군 사령관이 사살 당해 퇴각하는 등 악전고투에 몽골은 이들  무신 세력등을 육지로 끌어 내기 위해 약탈을 자행했지만

강화 이후는 달랐군요.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ㅡ원 황제 무종(武宗: 카이산)이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 조서[詔書]) 

고려  충선왕이 쿠빌라이 외손자로 이후 무종 옹립의 일등공신으로 원조정내 서열부터 상당한 권력자의 위치에 있던 신분.

강화 이후는 쳐박혀 있던 무신 정예병들이 도리어 입지가 좁아지고 팽당하게 생기자 본격 투쟁한게 삼별초 항쟁.

이런 정예병의 군사 공백으로 도리어 이후 고려에게 식량이나 군사적 지원까지 해준게 몽골임요.


그리고 고려 내부 부원배들이 입성책동같은 이완용급 나라를 갖다 바치려는 움직임과 여러 패악이 심했지

황금씨족 직계 대우까지 받던 고려 충선왕 이후 입지가 약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서토의 노예 다수 하한족들을 소수 몽골이 다스리는데에 본인들의 문화적 욕구와 조정내 내치 행정력등을 위해 고려와 상호 공생 관계였다보니 원조정내
고려의 정치 입김도 무시할 수 없어 버러지들의 말만 오가다 반대에 실행되지도 못했군요.
     
굿잡스 20-12-28 20:16
   
서기 1334년 5월, 원(元)나라 사람의 요청으로 고려 사경승(寫經僧·불경의 글과 그림을 필사하는 승려)이 제작한 감색(紺色) 종이에 금가루로 그린 변상도(變相圖·불교의 경전 내용이나 가르침을 알기 쉽게 그린 불화)가 발견됐다. ‘고려사(高麗史)’는 원나라가 고려 사경승을 원으로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을 정도로 고려의 사경(寫經)기술이 뛰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그림은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현전 최고(最古) 유물로 평가된다.

https://www.google.co.kr/am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3/06/23/2003062370319.html%3foutputType=amp



몽골 황실과 조정내에는 다양한 고려 양식(고려 의복이나 모자 신발 바둑 고려청자 고려한지 나전칠기 화문석 약과 시루떡 상추쌈등) 뿐 아니라 이런 수준 높은 불교 예술 문화나

세계제국의 통치자였던 대도의 쿠빌라이가 병석에 눕자 주변에 이름난 의원들도 못고치던 병을 신라시대 설총의 후예라는 고려 의원 설경성이 쿠빌라이와 이후 성종을 고치는등 뛰어난 고려 의술을 펼치거나

서구로의 중세 암흑기를 깨고 종교 지식 혁명을 촉발시킨 세계 최초의 고려 금속활자 기술도 이 시기에 전파 및 고려국 유학등이나 고려 몽골간의 다양한 학문 연구 결속과 증진등 여러 방면에서 고려와 몽골간에 수준 높은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증진되었군요.

이런 서토 한족을 노예로 지배한 몽골제국에서 수준 높은 고려의 다양한 문화가 상류 문화로 자리하면서 이후 서토 명 한족 왕조시기에서도 여전한 영향력을 발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