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새 잡담게시판으로 가기
(구)잡담게시판 [1] [2] [3] [4] [5] [6]
HOME > 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작성일 : 20-12-28 19:56
현 서북한 평양에 기자신사가 생긴 것도 고려 시대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430  

1. 삼국유사 기이편 왕검조선(王儉朝鮮)

1)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경(經)』에서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2)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방홀산(方忽山)으로 된 것도 있다.]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2.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

1) 제요(帝堯)와 함께 무진년에 일어나(竝與帝高興戊辰) 우순(禹舜)을 지나 하(夏)를 거치도록 왕위에 계시더니(經虞歷夏居中宸) 은(殷) 무정(武丁) 8년 을미에(於殷虎丁八乙未)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셨네(入阿斯達山爲神)

2) 위 구절의 아사달산에 단 주석
ㅡ 지금의 구월산이다. 궁홀(宮忽) 또는 삼위(三危)라고도 하니, 그 사당이 아직도 있다(今九月山也. 一名宮忽, 又名三危, 祠堂猶存).

삼국유사는 1281 년, 제왕운기는 1287 년에 출간됐으니 비슷한 시기, 또 비슷한 시대의 지리정보와 지리인식이 반영돼 있다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오래된 기록을 찾아보자 하니 구월산, 또는 관련 유적 삼성사의 기록은 찾을 수 없었고 지금의 평양에 소재한 기자묘와 관련한 기록은 찾을 수 있었다.

3. 『고려사』예지(禮志) 잡사조(雜祀條)

ㅡ 숙종 7년(1102년)  10월 초하루 임자일. 예부에서, “우리나라의 교화와 예의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기자에 관한 일은 사전(祀典)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무덤을 찾아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도록 하십시다.”하고 아뢰자 그 말을 좇았다.

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양부, 사묘, 기자사.

ㅡ 고려 숙종 때 정문(鄭文)이 건의하여 서경(西京)의 성안에 세운 기자사(箕子祠)를 말한다.

3과 4의 기록은 1과 2의 기록보다 근 2 세기 전 것으로 비록 구월산 및 삼성사 정보를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조선 초(태종)에 구월산 삼성사의 신위를 지금 평양의 단군묘에 합사했다가 후에(세조) 다시 분리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므로 그 관련성에서 눈여겨 볼 기록이다.

고려 숙종 때에 조성된 기자신사는 그 후대에도 계속 배향되어 조선시대까지 그 전통이 이어진다.

5. 『고려사』예지(禮志) 잡사조(雜祀條)

ㅡ 충숙왕 12년(1325) 10월. 평양부에 명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게 했다.

6. 1428년(세종 10)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의 상소

문화현(文化縣)은 신(臣)의 본향인데, 구월산은 이 고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는데, 산의 동쪽 고개가 높고 크게 굽이쳤으며, 산허리에 신당(神堂)이 있으나 어느 때 세운 것인지는 모릅니다. 북벽에 단인천제(檀因天帝)를 모셨으며, 동벽에 단웅천왕(檀雄天王)을 모셨으며, 서벽에 단군부왕(檀君父王)을 모셨으니 고을사람들이 삼성당이라 부르고, 그 산 아래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 부릅니다

5에서 보듯 사당을 세워(다시 세운 것인지 중건한 것인지 모르나 세웠다 기록돼 있다) 제사를 지내는데 기사신사 제사 기록은  그 후대인 공민왕 대에도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배향된다. 또 6에서는 조선 전기에 구월산 유래사가 더욱 구체화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감방친구 20-12-28 19:57
   
워해머 20-12-28 20:05
   
내용과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전 고려 왕실이 왜 자기 시조를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구라를 쳤는지 이해가 안 가더군요. 어느 나라의 군주가 자기 시조를 좀 있어 보이는 인물의 후예로 사기 치는 건 흔한 일이라 그것 자체는 이해가 가지만 왜 하필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고려 왕가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뻥을 쳤는지 의아함. 당나라 숙종은 고구려 멸망과 상관없는 인물이라 그랬으려나요? 하필 고려가 자기 시조를 당나라 황실이라고 하는 바람에 일본 위키 같은 데 보면 왕건은 중국인이라고 날조 중이더군요. 그냥 동명성왕의 후예라고 하지 -_- 감방친구 님께서 한국사 지식의 깊이가 있으시니 님의 의견이 듣고 싶네요.
     
감방친구 20-12-28 20:09
   
작제건 설화도 본래 신라의 거타지 설화를 차용한 것입니다


이 1천 1백여 년 전 이 당시에도
대민심리 전담팀이 활약했던 것이죠

심지어
서동요 설화에서도
원효 설화에서도
프로파간다는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 시대상이 엿보이죠
          
워해머 20-12-28 20:12
   
흠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