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퇴한 원인은 전술 부재에 있었다. 당시 고지에 해당하는 고갯마루는 이미 관군과 일본군이 점거한 상태였고, 동학농민군은 1km에 달하는 오르막길을 아무런 엄페물 없이 내달려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밀집대형을 유지한 채 돌격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엄폐물이 없는 개활지에서 이루어지는 밀집 돌격은 기관총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군이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우위는 ‘숫자’에 있었지만, 이런 우위를 활용하는 대신 밀집대형에 의한 제파돌격만을 반복했던 터라 사상자 숫자만 늘리고 말았다.
이러한 전술적 실패는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휘관이었던 전봉준의 패착에 기인했다. 그는 이미 황포현 전투에서 관군을 상대로 제파돌격 전법을 써서 대승을 거둔 바 있었고, 군대 지휘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던 전봉준으로서는 이러한 ‘승리의 기억’이 일종의 ‘자기화’ 기제로 작용했다. 한 번 승리를 맛보게 했던 전법을 다시금 꺼내들게 되는 것은 초보적인 지휘관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 중 하나다. 전봉준은 우금치 고개에서 마주친 일본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고, 황포현 때와 마찬가지로 제파돌격을 통해 이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사실 동학농민군이 적의 화력선 정면에 대한 제파돌격에 집착하지 않고, 고갯길 좌우의 경사로를 이용하여 적 기관총의 사각지대로 돌아들어갔더라면 전선 돌파도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봉준이든 동학농민군이든 기관총과 같은 고화력 보병화기에 맞서 전투를 치뤄본 경험은 전무했으므로, 이러한 전술적 발상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전봉준 자신의 욕심도 한몫 했는데, 우금치 고개만 넘어서면 공주를 점령할 수 있는 ‘분수령’에 도달해 있던지라 과중해지는 피해를 외면한 채 무리한 돌격을 반복했던 것도 패착이었다. 고작 반나절 동안 40여차례의 돌격을 시도한 것은 지휘관이었던 전봉준 자신의 과욕이 낳은 결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4일간에 걸친 우금치 전투에서 참가한 농민군 2만명중 살아서 후퇴한 병력은 약 500여명에 불과 했고, 조일 연합군측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12월 완전히 괴멸된 농민군의 총 사령관 전봉준이 체포되고, 농민군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동학 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
200대 20000 일방적인 패배
전쟁은 지도자가 누군지가 중요하쥬
정부보다는 삼성을 믿는게 나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