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많이 깨달았지요..ㅋ 일본에대한 의존성으로 우리의 게으름을 알게 되었고 일본의 맹공에도 우리가 잘 버티는 것을 보며 성장했음을 알게 되었고 자발적 불매운동을 통하여 우리가 일본에 지닌 영향력을 알게 되었으니.. 참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론은 일본은 우리가 한번 붙어 볼 만한 나라였다.. 그리고 망해가는 나라였다..ㅋ
당시 일본은 한일협정에 따라 3억 달러에 해당하는 생산물 및 용역으로 10년간 분할 제공했다. 나머지 2억 달러 규모의 대출 역시 마찬가지다. 현금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어떻게 쓸 것인지는 양국 정부 대표로 구성된 합동위원회에서 결정됐다. 한국 정부가 마음대로 쓸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일본 정부가 제공한 생산물과 용역은 어떻게 쓰였나.
일본 기업이 한국에 생산설비를 지어주는 형식이 많았다. 당시 부진했던 철강회사 신닛테쓰(新日本製鐵)로부터 전체 액수의 10%에 해당하는 5000만 달러어치의 설비를 사들인 뒤 이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으며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를 계속할 수 있는 '일석삼조'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 전부터, 미국은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에 신경을 썼다. 한국 경제가 종전대로 일본에 예속된 상태로 남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이 벌인 일 중 하나가, 한국에 제공한 원조자금을 일본 상품 수입에 쓰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1953년 8월 4일부터 9일까지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을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부흥원조의 대일 구매를 요구할 목적도 갖고 있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시작된 미국의 부흥원조를 둘러싼 한·미·일의 갈등은 한·일 무역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은 1953년 8월 4일부터 9일까지 미 국무장관 덜레스의 한국 방문으로 부각되었다. 덜레스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을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부흥원조의 대일 구매를 요구할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공업화를 위해 원조(자금)의 사용권과 원조 조달 지역, 구입 품목을 한국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구매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소비재를 도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무역업자에 대한 민수물자 공매제도를 한국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구매권을 넘겨줬다."
미국이 대한(對韓) 원조를 제공하면서, 그것을 일본 소비재 상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1953년에는 국무장관까지 보내서 압박을 직접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대한 원조가 한국이 아닌 일본의 경제부흥에 쓰여지도록 배려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일본과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 이후 받은 겨우 3억 달러의 청구권자금(유상 2억 달러) 때문이다. 실제 우리가 일본의 인적 물적 수탈로 입은 손실은 현재가치로 천억 달러가 넘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대일무역은 그 여섯 배가 넘는 역조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그때 이미 우리 경제를 일본경제에 예속시키는 경제식민지화 작업을 했다. 마치 일대일로사업을 통해 상대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려는 중국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