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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목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죽창가 내세운 청와대의 대응
19세기말 反외세·反봉건 정서
국민과 기업 피해 더 키울 뿐
국제관계에선 ‘힘이 곧 정의’
아직 일본 경제력의 3분의 1
냉정히 국익 지키며 힘 길러야
지난 12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한·일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켰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나왔다. 그 직전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일 실무회의에서 일본의 협상 태도가 전해진 후 대통령이 직접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이번 사태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의지와 결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통령의 발언 다음 날, 최측근으로 알려진 조국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SBS 드라마 ‘녹두꽃’ 마지막 회를 보는데 한참 잊고 있던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나왔다”며 고(故) 김남주 시인이 작사한 ‘죽창가’를 링크했다. 녹두꽃과 죽창가 모두 1894년 반외세·반봉건을 부르짖었던 동학농민운동을 기념한 작품이다.
예단일지 몰라도 한·일 무역전쟁에 임하는 청와대의 이런 자세를 보면 그 기저에 반일 또는 항일의 정서가 깔린 듯하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들이 국내정치적으로 손해 볼 일은 아니다. 실무협상에서 우리 대표들이 푸대접받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며 속이 상한 국민으로선 박수 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죽창가를 들으며 이번에는 정말 온 국민이 단결해 일본에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반일 정서에 기대어 여론을 결집한다고 해서 이번 갈등이 쉽게 해결될지 의문이다. 일본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후 오랫동안 제재 방안을 검토해 왔다. 일본 또는 일본인의 특성상, 마음먹고 빼어 든 칼을 아베 신조 총리가 참의원 선거가 끝났다고 쉽사리 거두지 않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가 많다. 결국, 이번 사태는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큰데, 그렇게 되면 일본보다 우리 기업과 국민이 부담하게 될 피해가 훨씬 크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어쨌든 정부는 이 사태를 조속히 해결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권과 여론은 분열돼 있다. 야당과 보수 언론은 이번 한·일 갈등의 원인을 현 정권의 사법부 적폐 청산과 여권 핵심의 반일 정서에서 찾는다. 반면에, 여권과 진보 언론은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 부족과 아베 정권의 반한 감정 조장에서 찾는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 해결책이 같을 수 없다. 여야 모두 외교적 해결책을 내세우고 있으나, 야권은 외교부 장관 등을 교체하고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설 것을 주장하고, 여권은 정상외교보다는 국제 여론전을 통한 간접적 해결 방식을 선호한다. 무엇보다 여야 모두 내년 총선을 앞두고 내심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적 계산을 할 때가 아니다. 청와대와 여당은 국민의 반일 정서에 기대 강공책을 펴다 이 사태가 장기화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일본이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구했지만, 중재위원회에 넘겼다가 일이 잘못될 경우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커 청와대가 거부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만에 하나 정권 차원의 유불리를 따져 접근했다면 한참 잘못된 일이다.
막말로 정권은 바뀔 수 있다. 국가경제가 위기에 빠질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정치적 변화도 감내할 수 있다. 국제관계에서는 힘이 곧 정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유무역과 인권이라는 미국의 기존 정책을 완전 무시하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며 세계 질서를 흔들고 있지만, 어느 나라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것은 국제 관계에선 힘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한 우리 처지에서 감정적인 대처는 능사가 될 수 없다. 우리 내부에서 친일·반일의 프레임으로 싸울 일이 아니라, 살을 내주고 뼈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야당과 보수 언론 일각에서는 문 정권의 책임론을 거론하고 있다.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반한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던 아베 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수출규제 조치를 시작한 상황에서 우리끼리 책임론을 따져 본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야당도 정부 여당과 협조해 최선의 해결책을 도출해야 할 책무가 있다. 우리 국민도 도와야 한다. 아베 정권의 부당한 한국 때리기에 대한 분노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냉정해야 한다. 겉(다테마에)과 속(혼네)이 다른 일본을 이기는 길은 분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