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쓰는 말은 사실 한국어가 아니라 개인이 갖고 있는 개인언어들이 소통이라는 목적으로 절충된 것의 총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개인의 언어들이 사회적 약속으로 사회성과 나름의 특수성을 띄어 구체화된 것이 한국어이죠.
인간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입니다.
개인성과 사회성이 의미상으로 대비관계에 있지만 애초에 대비라는 것은 모두의 다름이 아닌 일부의 다름에서 발생하는 차이이기 때문에 개인성이라는 것과 사회성이라는 것은 사실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적 속성이 표현과 소통으로 사회성을 띄며 집단적 성향으로 나타나는 것이 인간사의 많은 부분들입니다.
이를 두고 여러 학자들이 "~인간", "~인간"이라는 표현들을 쓰지만 다시 말해 인간의 속성을 두고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힘들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최근 가생이질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의견의 분열이 어느 때보다 큰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양편으로 나뉘어 편가르기와 편향적 시각에서의 설전, 혹은 상대방 짓누르기가 매우 치열하게 이루어짐을 목격한 것이죠.
개인의 사상과 철학을 논리적으로 피력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사상과 논리 없는 편향적 사고는 사상적 좀비로 밖에 인식되지 않네요.
이유 없이, 혹은 근거 없이 또는 무비판적으로 특정 사고나 사상을 받아 들여서 이를 확대하여 거대한 집단의 논리고 편승하고 그 집단이 곧 본인인 것처럼 여기며 특정 집단의 선봉대가 되어 혹은 기수가 되어 치열하게 방향성을 표시하는 모습이 저는 조금 낯설기도 합니다.
다름은 큰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사람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에 쟁점이라고 불리는 것들조차 매우 미세한 차이에서의 다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약적 연쇄법으로 아주 작은 사안을 엮고 엮어 매우 큰 일로 둔갑시키고 이를 이용해 그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대립각을 만들어 불구대천지원수로 남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무섭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이념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상황에서 같은 이웃과 심지어 가족에게도 총부리를 겨눌 수 있었던 데에는 아마도 위와 같은 편가르기가 있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작은 불만이나 작은 차이를 확대 왜곡하여 자신의 불만을 거대 조직의 울타리도 덮고 마치 자신의 불만 해소가 곧 정의라고 보는 것은 지양합시다.
누군가 말하기 전에 먼저 들어 보라고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과학적 전제라도 이 말이 와닿네요.
임진왜란이 있던 시기 오리 이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조는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라 출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있어 왕좌를 지키기위해 대의를 보지 못했던 인물로 인식됩니다.
그가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을 때, 이원익은 당시 정승으로 10시간의 임금과의 대결에서 근거 없음을 들어 이순신의 죽음을 막았던 인물입니다.
신하가 왕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실을 기반으로 진실을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산하의 명분 앞에 왕의 개인적 복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살기가 팍팍하면 불만이 생기고 그 불만이 가중되면 사회적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판에 나의 이기심만이 아닌, 그들의 집단 논리가 아닌 사실과 진실이 묻어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