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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8-30 19:19
칭기즈칸 점령국 씨 말렸지만..고려는 유2하게 왕조 지켜낸 나라
 글쓴이 : 러키가이
조회 : 2,495  


칭기즈칸, 점령국 '씨' 말렸지만..고려는 유일하게 왕조 지켜낸 나라


안세영의 중국 바로 읽기
(8) 몽골제국과 고려

몽골군이 적을 제압한 경쟁력인 기마사술(騎馬射術).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기술이다.


“몽골제국은 정복한 나라의 왕조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직접 통치했다. 그런데 단 하나, 현지국의 왕이 통치하게 한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고려다.”

13세기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 아래 유라시아의 모든 왕국이 초토화됐다. 칭기즈칸은 저항하던 서하제국을 아예 지상에서 쓸어버렸다. 사라센 세계의 중심이던 호라즘제국의 도시들도 철저히 파괴했다. 그리곤 무슬림 세계에 ‘일 한국(汗國)’을 세워 직접 통치했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강력히 저항하자 대도시의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고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송왕조를 없애고 원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몽골제국에 30여 년을 끈질기게 저항한 고려는 멸망시키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몽골제국에 거세게 맞선 데 이어 피정복 뒤에도 왕조를 유지한 유일한 나라가 고려다.

약탈전쟁을 정복전쟁으로 바꾼 칭기즈칸

13세기 몽골초원에는 몽골,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등 여러 유목부족이 말과 양떼를 키우며 살았다.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약육강식의 초원이었다. 예를 들어 몽골족이 타타르족을 습격하면 타타르인들은 가축을 내다버리고 도망한다. 몽골 병사는 가축을 약탈하느라 적을 추격하지 않는다. 얼마 후 힘을 키운 타타르족이 몽골족을 기습하고 똑같은 약탈과 보복이 반복된다. 칭기즈칸은 초원에서의 게임 룰을 약탈전쟁에서 정복전쟁으로 바꿨다. 병사들의 개인적 약탈을 금지하고, 도망가는 적을 끝까지 추격해 정복하고, 항복한 부족민은 몽골 우르스의 일원으로 받아줬다. 물론 전투가 끝난 후 약탈물은 공정하게 나눴다.

이렇게 몽골 초원을 정복하고 난 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다. 몽골 기마군단의 압도적 힘은 놀라운 기동성이다. 몽골 병사들은 평균 4~5마리의 말을 끌고 전쟁에 나간다. 2~3일 정도는 말을 갈아타며 계속 달린다. 작은 몽골 말이지만 하루 200~300㎞까지 달리니 서울~부산 거리를 이틀 만에 질주하는 것이다. 원정을 갈 때 병사 한 명의 1년치 식량인 소 한 마리를 육포(보르츠)로 만들어 양의 오줌보에 넣어 말꼬리에 달고 다니니, 다른 군대와 달리 군량미 조달 문제도 없었다.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몽골의 기마사술(騎馬射術), 즉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면 화살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고 날아가 적의 갑옷, 방패를 뚫는다. 이 정도면 현대전의 기총소사(機銃掃射) 수준이다. 칼과 창을 들고 맞붙기 전에 승패가 결정된다.

몽골군이 고전한 한반도

그런데 이 같은 몽골군의 기동성과 기마사술이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맥을 못 췄다. 우선 대부분이 산지고 질퍽한 논이 많아 말이 신나게 달릴 수 없었다. 더욱이 압록강을 건너면 산성(山城)들이 늘어섰는데, 고려 군사와 백성들이 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했다. 공성기(攻城機)를 쓸 수도 없고 몽골 병사가 극히 꺼리는 몸싸움을 해야 했다. 놀랍게도 고려군은 활을 잘 쐈다. 우리 국궁(國弓·그림)은 만궁(彎弓)으로, 둥그렇게 두 번 휘었다. 몽골의 활보다 사거리가 길고 관통력도 뛰어났다.

고려의 만궁은 60m 정도가 유효사거리였다. 이 거리에선 성벽을 공격하는 몽골군의 어깨와 팔을 구별할 정도로 정확히 맞힌다. 말하자면 고려군은 공격엔 약해도 산성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는 수성(守城)에는 탁월했던 것이다. 귀주성을 공략한 뒤 칠순이 넘은 몽골의 한 장군은 “내가 수많은 전쟁을 겪었어도 이렇게 마지막까지 투항하지 않고 완강하게 싸우는 군민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다(고려사, 권103).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활을 잘 쏘니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이 쏜 활을 맞았던 것이다. 몽골의 2차 고려 침공에서는 처인성에서 살리타이가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몽골군이 철수했다.

다음으로 유목민족이나 한족과 다른 우리 민족 특유의 저항정신이다. 양과 말을 몰며 초지를 떠도는 유목민족은 강한 자가 나타나면 그 아래에 복속한다. 한족도 외적과는 싸우지만 일단 패하고 나면 순종한다. 이 점은 일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끈질기게 외세에 저항했다. 지배계급만 저항하는 것이 아니다. 항몽(抗蒙)이나 임진왜란 때 보듯이 승려, 농민, 심지어 천인계급까지 외세에 맞섰다. 침략자에겐 아주 당혹스러운 상대다.

이 같은 점도 있지만 고려의 장기간 항몽이 가능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한반도는 칭기즈칸 군대의 주된 공격 목표가 아니었다. 고려의 항몽기간은 1차 침공 때인 1231년부터 8차 침공(1257년) 후 항복하고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오기까지 약 30년이다. 이 기간 몽골제국의 주된 적은 금나라와 남송이었다.

고려의 절묘한 입조(入朝)외교

망해가는 명을 따르고 청을 배척하다가 병자호란을 자초한 조선과 달리 고려는 몽골의 내분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1259년 강화도에서 나온 고종은 몽골에 입조(入朝)하기 위해 태자(훗날 원종)를 몽케 칸에게 보냈다. 몽케 칸은 당시 쓰촨성에서 남송과 싸우다 죽게 된다.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태자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쿠빌라이를 찾아가느냐, 아니면 아리크부카를 찾아가느냐?’ 당시 쿠빌라이는 서거한 몽케 칸의 자리를 놓고 아리크부카와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30년간 저항하던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그 먼 길을 찾아와 나에게 따르니 이는 하늘의 뜻(天命)이다.”(고려사, 권25)

쿠빌라이가 자신의 진영을 찾아온 원종을 보고 기뻐서 한 말이다. 이 민감한 시기에 정적이 아닌 자신을 찾아온 것은 고려가 자신을 몽골제국의 새로운 칸으로 인정한다는 엄청난 행운의 징표였다. 5대 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호와 왕실을 인정해준다. 이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항복조건이다.

고려·몽골 관계 바로 읽기

‘잔인한 몽골군의 침략을 30여 년간 우리 조상이 막아냈다. 왕과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육지에서는 관군과 백성이 힘을 합쳐 싸웠다. 결국 왕이 항복하고 육지로 나갔어도 삼별초는 난을 일으켜 제주까지 도망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지금까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배운 자랑스러운(!) 항몽의 역사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국방이다.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백성은 육지에서 도륙당하게 내팽개치고 지배계급만 강화도로 도망간 것이 과연 잘한 것인가? 우리 역사는 전통적으로 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무신정권이 주도한 천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항복하면 자신들의 권력유지가 어렵다고 생각해 몽골군과의 적극적 싸움을 회피하고 강화로 천도했다’는 식의 비판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생각한 무신정권이라면 육지에서 결사항전을 하며 몽골군을 물리쳤어야 했다. 힘으로 막을 자신이 없으면 몽골이 입조를 요구할 때 화친해 백성을 보호했어야 했다. 이 점에선 차라리 한족왕조 한(漢)과 송(宋)이 우리보다 현명했다. 흉노, 거란이 강할 때 비단, 은, 공주를 보내 화친하며 어쨌든 백성을 보호하지 않았는가.

우리 역사는 몽골에 끌려가 천역(賤役)을 한 공녀의 비참함을 강조한다. 그런데 몽골의 역사를 보면 좀 다르다. “몽골의 황금씨족 청년들은 모두 몽골리안 처녀와 결혼해야 된다.” 신라의 성골같이 칭기즈칸 직계 순수 혈통인 ‘황금씨족’만은 같은 몽골리안 여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장가가려면 몽골 초원, 아니면 북방 몽골리안에 속하는 위구르, 거란, 그리고 고려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공녀로서 고초도 많았지만 몽골기록을 보면 고려 여인들의 상당수가 귀족의 부인이 됐다. 혜종의 황후같이 몽골제국의 황후도 세 명이나 나왔다. 진짜 비참했던 것은 당나라에 노예신분으로 끌려간 고구려의 지배계층이었다. 어쩌면 역사적으로 한족이 북방 몽골리안보다 우리에게 더 잔혹했는지 모른다.

요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는 중국은 칭기즈칸마저 ‘차이니스’로 포장하고 있다. 이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몽골제국은 북방 몽골리안으로서 수억 명의 한족을 100여 년간 지배했다. 원나라의 4등급 신분제에서 남송의 한족은 최하위계층 취급을 받은 반면 고려는 같은 북방 몽골리안 세계의 혈연국가로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한 번쯤은 되새겨볼 만한 역사다.

안세영 < 성균관대 특임교수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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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키가이 19-08-30 19:20
   
러키가이 19-08-30 19:20
   
유일은 아님 유2 / 베트남-비엣남 도 약 40년 항쟁에서 버텨냄

웃긴 일화는~~~

고려 사신이 조약 맺는걸 확인한 베트남 사신도 ~ 본국으로 가서

고려 조약 맺은거처럼 원나라와 조약 맺음~!

===PS===

참고로 남송도 약40년을 항쟁함 / 약40년 항쟁한 3나라중 유일하게 완전멸망

성안의 가축들도 몰살;;;
khikhu 19-08-30 19:22
   
게다가 고려의 지위는 부마국
모래니 19-08-30 19:22
   
가만있어보자...
원빼고는 다들 정부자체는 무사했던거 아닌가요?
애들 인구가 적어서, 완전한 점령은 못하고, 약탈만 줄기차게 했을뿐이라고 어디서 본거 같은데.
     
Joker 19-08-30 19:41
   
아닙니다. 현지인들로 이뤄진 일종의 괴뢰정부를 만들기는 했지만.
왕조 자체는 없앤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러키가이 19-08-30 19:22
   
그리고 중국=몽골 아님 / 위 글에서 바꿔야할거~!

중국=>동아시아 / 고등과정 동아시아사 신설되었으니

중국 이라는 명칭은 역사 교재에서 사라져야함
영어탈피 19-08-30 19:23
   
저건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니죠
대몽항쟁에 고려가 한건 몽골이 깽판 치든 말든 그냥 강화도 들어가서 버틴거 뿐이죠
본토에선 백성들 학살당하고 있었고요
     
국산아몬드 19-08-30 20:48
   
고려정부가 지배력을 유지했다는것이 중요합니다.  고려정부가 저항했다는건 고려가 저항했다는겁니다. 본토가 끊임없이 저항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한거죠
굿잡스 19-08-30 19:24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commu&wr_id=190581&sca=&sfl=wr_subject%7C%7Cwr_

도표로 한눈에 보는 천년 사직 고구려의 위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1002&logNo=30152299778


발해 

당나라 산둥 등주 공격 

장문휴는 732년(인안 13) 무왕의 명령을 받아 수군을 이끌고 산둥 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를 공격해, 당의 동방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발해 무왕의 대외팽창에 위협을 느낀 동북만주의 흑수말갈이 발해와 우호관계를 단절하고 당과의 연결을 꾀하여 발해를 위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정벌을 결정했으나 무왕의 동생 대문예가 발해와 당 사이에 전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흑수말갈의 정벌을 중지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당으로 망명했다.당에 대한 강경책으로 돌아선 발해는 수군을 동원하여 등주를 공격 초토화시켜버리고 육지로는 요서로 밀어버림.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복속되었다. 
-발해고 무왕- 

발해가 점차 강성함에 따라 흑수 역시 그 소속이 되었다. 
-당회요 말갈- 



'고려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 

≪속일본기(續日本紀)≫ 천평보우 3년 경오 (남북국시대 발해 문왕(文王) 대흠무가 왜국에 보낸 국서에) 


四年春, 以<均貞>爲侍中, 以伊湌<忠永>年七十, 賜几杖. 秋九月, 遣級湌<崇正>使北國.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발해)에 사신으로 보냈다. - 삼국사기 신라 헌덕왕.



정강의 변 : 북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 많은 송나라 황족들과 황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무엇보다 이 사건 당시 휘종 등이 금나라로부터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 일가를 제외한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은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죽었으며(대략 3천 명 중 2천 명)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들과 자신의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애당초 그나마 좋은 취급을 받은 경우도 이렇게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한정으로 이 때 끌려간 황족들 중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또한 치욕을 경험해야만 했다. 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 해서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고, 주씨가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끌어당기면서 강제로(성 추행..)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분노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ㅠㅠ)   

이에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고 택리를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이 눈물을 흘리며 주씨를 치료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ㅠㅠ) 더 비참한 것은 한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굿잡스 19-08-30 19:24
   
정강의 변 : 북송이 신라계황제와 발해인 연합의 금나라에게 패하여 수도 변경(지금의 카이펑/개봉)이 함락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 그리고 수많은 송나라 황족들과 황녀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       

왜 여직(진)발해본동일가(女直渤海本同一家)라고 했을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88992&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5%9C%EA%B7%9C%EC%B2%A0&sop=and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6493129

금나라 황릉의 모델은 고려 황릉(왕릉)이었다.’ 12세기 북중국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1115∼1234) 황릉이 고려 황릉과 형제처럼 꼭 닮았다는 비교 연구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 금 태조 완안아골타(1068∼1123)가 10세기에 건국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던 것을 감안하면, 당대 사회적 문화적 역량을 총집결시켰던 국책사업인 황릉 조성을 한반도에서 벤치마킹했던 것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최근 학술지 ‘동방학’에 게재한 논문 ‘12세기 고려·북송·금 황제릉의 비교 연구’에서 “고려와 금 황릉은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며 같은 시기 북송 황릉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http://news.donga.com/3/all/20140313/61666261/1


女真酋長乃新羅人 (송막기문- 남송기록)       
("여진의 지도자는 신라인이다")       
"其初酋長本新羅人" (몽골  금지(金志))       
(여진의  초기지도자는 신라인이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 (금사 (金史))       
(금의 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왔을 때  60세였다.)
굿잡스 19-08-30 19:25
   
원나라(몽골)의 법률은 서토 한족은 예외 없이 노예로 취급했으며 "노예는 물건과 같다"라고 규정   

노예의 주인은 노예를 임의로 매매하거나 증여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한족을 살생할 권리가 있었다.   

 한족 20가구를 1甲 으로 편성하였다.   
 각 甲마다 한 명의 甲主를 두었다.   
 갑주는 몽골인이다.   
20가구가 1명의 몽골인을 먹여살려야 했다.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의 초야권은 몽골 갑주의 몫이었는데,   
짱국 漢族은 혈통의 순수성 유지를 위해 첫번째 태어난 아기를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몽골은 한족의 반란을 방지하기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족의 사내아이가 태어 나면 엄지손가락을 절단햇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집회를 열지 못하게 했다.   

한족은 무기류를 일체 가질 수 없었다. 10가구에 하나의 부엌칼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무술을 배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몽골족의 동의를 받은 후에 가능했다.   
노예는 사유물이므로 노예의 재산은 언제든지 뺏을 수 있다.   
노예인 한족은 전통적인 한족 성명을 가질 수 없었다.   
(출생일자를 가지고 이름을 삼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관직이나 공직등 중요한 자리에는 몽골인들과 고려인,색목인(북방계)이 우선 등용.
굿잡스 19-08-30 19:27
   
쿠빌라이 "당 태종이 몸소 정벌했으나 복속시킬 수 없었는데 지금 세자가 스스로 오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고려사절요 1260년 원종 1년 3월 17일

몽골 뭉케 칸의 대대적 남송 정벌에 앞서 서거하게 되면서 유목 세계를 지향하던 아리쿠카가 당시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정식으로 칸(汗)에 등극하게 되군요.

이때문에 쿠빌라이 역시 남송 정벌을 대대적으로 중지하고 이후 요, 금이 닦아 놓은 강북을 기반으로 본인도 일종의 편법으로 칸에 오르면서 물자를 통제하는등 몽골 내부에 정치 투쟁이 가속화되던 시점에 중세 고려도 백여년의 무신집권기로 이미 고려 황제도 허수아비로 전락 이런 몽골을 통해 무신집권기를 끝내려는 서로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고려 황자가 쿠빌라이와 강화를 하게 되는데

이에 쿠빌라이는 이런 고려와의 동맹을 자신에게 칸과 이후 서토를 지배할  세계 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로의 천명이 자신에게 왔다고 생각할 정도. 또한 만주일대 이런 쿠빌라이에 대항할 수 있는 동방왕가도 견제할 겸 고려를 부마국에 자신이 아끼던 제국대장공주를 고려에 시집보내면서 고려는 황금씨족 직계 대우를 받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치 행정력이 약했던 소수의 몽골 입장에서는 가장 측근 궁내에 서토 한족들을 들이기에는 리스크가 워낙 높다보니 더욱 고려와 밀접한 특수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일종의 공생하에 서토 지배. (이때문에 원 말 명초까지도 고려양이라고 고려문화에 서토가 미쳐 취하니 요사하다는 표현까지 나오게 된 시대 배경)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ㅡ원 황제 무종(武宗: 카이산)이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 조서[詔書]) 


[속자치통감 제이백일십사 원기삼십이] 
《续资治通鉴 卷二百一十四 元纪三十二》记载:“后亦多畜高丽美人,大臣有权者,辄以此遗之,京师达官贵人,必得高丽女然后为名家。自至正以来,宫中给事使令,大半高丽女,以故四方衣服、靴帽、器物,皆仿高丽,举世若狂。” 
"황후도 역시 고려미인으로 삼아, 대신유권자는 곧 이를 귀하게 여겨, 수도 고관귀인은 반드시 고려여자를 얻은 후에야 명가가 된다. 
그렇게 된 이래, 궁중급사사령, 대반이 고려여자이며, 이런 이유로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다." 
   
[숙원잡기]의 기록에는,《菽园杂记》::“马尾裙始于朝鲜国,流入京师……于是无贵无贱,服者日盛。至成化末年,朝臣多服之者矣。阁老万公安冬夏不脱……。大臣不服者惟黎吏侍淳一人而已。此服妖也,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은 조선국(고려)에서 시작되어, 수도로 유입됬으며......귀천을 가리지 않고 복식이 날로 성했다. 성화말년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도 입게 되었다. 각로만공안이 겨울에도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이 복식은 요사하므로, 홍치 초시에 금지되었다.
굿잡스 19-08-30 19:28
   
19세기 말, 만주족 팔기군 병사가 한족 성주(시장)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지만, 팔기군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청나라 내내 만주족들은 정복자이자 지배자라는 신분적 특권을 누리고 살았다.     
     
  서구 열강의 공세에 몰려 위험한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지배층들은 "나라를 외국에게 넘겨줄 지언정, 집안의 종(한족)에게는 절대로 줄 수 없다."라고 단언했을만치, 청나라는 엄연한 정복 왕조였다.     
     
  1850년대, 한족들로 구성된 태평천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남경을 지키던 만주 팔기군 병사들이 태평천국군에게 모조리 살육당하자, 분노한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에 가담한 반란군 병사들이 항복해와도 절대로 항복을 받아주지 말고 전부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바람에 태평천국의 난은 16년이나 오랫동안 계속되고 말았을 정도로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심각했다.     
     
- 청사 저자 임계순 -     

당시 일개 만주족 병사가 미국으로 치면 주지사(웬만한 나라의 대통령)급에 해당하는 성주를 구타할 정도로 만주족은 소수였음에도 피지배 서토인을 강점 지배하는 정복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이들은 서토인과 구분되는 그들만의 독자적 만성이라는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며 서토인에게 세금을 착취해서 생활.     

(후기로 가면 만주 팔기군중에서 초기 청에 복속, 서토 정복에 동원되어 수백만 자국 짱개들  학살하던 앞잡이 한족계열은 세금만 쳐먹는다 팔기군에서 빼버림)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짱국 서토인 대규모 학살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굿잡스 19-08-30 19:29
   
만주족의 서토 한족 피지배인 통치 방식   

1.<유강 정책>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떄를 보였다.>   

   

2.< 과거 제도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고도의 전술>   

   
과거 실시로 체제 불만 제거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3.< 만주족 고유의 풍습과 연고지를 지킴>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4.< 전족등 악습을 폐지않고 생활속에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킴>   

   
청신한 기풍의 진작을 강조했던 청조가 한족 여성의 纏足(전족)을 금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족은 後唐(후당) 시절 이후 차츰 번져 온 한족 여성의 폐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방 기마민족이 만리장성 이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한족 여성들을 납치해 가는 짓 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전족을 했던 것입니 다. 젖먹이 때 전족을 하여 발의 성장을 억제시켜 놓은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뒤뚱거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전족을 한 여성은 북방민족의 약탈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데 명-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족한 여성이 남성들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이유로 유한계층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만주족여성들의 전족만은 엄금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청조는 한족의 약화를 은근 히 조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5.< 언론 장악>   

청조는 변경이나 군사문제를 연구한 책, 夷狄(이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책, 명조를 칭송한 모든 논평서 등 모두 2320종의 서적을 禁書(금서)로 정하고, 이런 금서를 보관하거나 편찬한 수천 명의 사대부와 관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王錫侯 (왕석후)라는 학자는 康熙字典(강희자전)을 비판하고 避諱(피휘)해야 할 청조 황제의 廟號(묘호)를 무엄하게 수록한 字典을 만 들었다고 해서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 21명은 노비가 되었고, 편찬을 후원한 江西巡撫(강서순무) 역시 처형되었습니다』   

6. 변발이라는 혁명적 풍속을 받아 들이게 함으로서 청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시키도록   

하였고 이에 반항할 경우에는 가차 없는 처단이 이루어졌다.   

- 조선의 경우는 도리어 청에 대한 치욕이니 말을 하지만 실상 두번씩이나 조선의 청에 대한   

충돌 이후의 처벌은 서토에서의 경우에 비하면 도리어 온건하다 할만큼 서토에 대한 저항 세력의 청의  진압은 너무도 무자비하고 강건했다. 그리고 문화적 부분에서도 청은 조선을 인정한 반면 서토의 경우에는 가차없는 만주족 방식을 고수 하도록 철저한 정책을 폈다. 

   
7.< 조선과 만주족의 관계>   

 이성계의 私兵 집단에는 여진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지역은 여진족 추장 퉁두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함경남도 함흥 지역의 토호인 이성계에게 굴복하고 의동생이 되어 李之蘭 (이지란)이란 이름을 받았지요. 나중에 그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되어 建州衛(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휘하에는 이밖에도 斡朶里族(오도리족)의 만호 猛哥帖木兒(몽거테무르), 火兒阿(할아) 의 만호 阿哈出(아하추) 등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서 강력한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진족이라는 배후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누구입니까.   
『建州左衛(건주좌위)의 開祖(개조) 몽거테무르가 바로 누르하치의 직계조상입니다. 아하추는 建州本衛(건주본위)의 개조가 되었지요.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 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창업 초기의 조선왕조는 두만강 하류 孔州(공주 )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ㅡ청사 임계순 

대지의 작가 펄 벅도 치를 떨었던 짱국 한족 여인들에게 가해진 끔찍하고 미개한 천년 풍습, 전족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ynameisysys&logNo=120029073775&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daum.net%2Fsearch%3Fw%3Dfusion%26q%3D%25ED%2595%259C%25EC%25A1%25B1%2B%25EC%25A0%2584%25EC%25A1%25B1%26DA%3DTWB%26lv%3D2%26p%3D2
굿잡스 19-08-30 19:30
   
고대의 쭝국이란 지금의 특정 국가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이런 북방유목민족과 동방세력들에 의해 서토의 풍부한 농토와 노예(하한족)을 차지하고 군림하면
누구나 될 수 있었던 일반명사.

그리고 천년사직 고구려 태왕시절 이들 전투민족들(거란 후대 요, 실위 후대 몽골, 말갈(여진) 후대 금,청등)은 우리 태왕 앞에서는 제대로 대가리도 못들고 살면서 휘하 부용세력들이였군요. (물론 동북방의 저런 날고 뛰던 전투 유목 종족들 중 일부가 서진 유럽에선 신의 재앙 어쩌고 인도 중동 유라시아를 휩쓸고 단녔지만 거란,몽골등도 길어야 백여년 정도가 전성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