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새 잡담게시판으로 가기
(구)잡담게시판 [1] [2] [3] [4] [5] [6]
HOME > 커뮤니티 > 잡담 게시판
 
작성일 : 19-09-29 11:32
"병자호란보다 무섭다" 조선 경제 거덜 낼뻔한 소 전염병
 글쓴이 : 삼촌왔따
조회 : 1,565  

17세기 조선을 뒤덮은 우역의 시작은 정묘호란이 발발하고 5개월이 지난 1627년(인조 4년) 10월입니다.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지만, 압록강을 넘어온 후금 군사와 가축에 의해 전염됐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후 더 큰 규모로 닥친 1637년(인조 15년)의 우역도 병자호란 전후라는 점에서 후금 군사들에 의해 확산됐다는 것이 학계의 견해입니다. 조선에서는 1636년 8월 평안도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지만 이미 3개월 전 후금의 본거지인 심양 일대에서 우역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조선 중기 무인 조경남(1570~1641)은 『속잡록』이라는 책에서 병자호란에서 후금(청) 군대의 이동 경로와 우역의 확산 경로가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열 마을에 한 마리의 소가 없다.”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중요한 도로로 꼽히지만 조선 시대만 해도 한양에서 평양(황해도)을 거쳐 의주(평안북도)까지 이어지는 서로(西路)가 가장 중요한 도로였습니다. 이 도로를 통해 개성과 의주 상인들이 중국과 무역을 했고, 외교 사신들도 오갔습니다. 한편으로는 대륙에서 쳐들어오는 군용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만큼 우역의 주요 타깃이 됐습니다.

가장 피해가 막심했던 평안도는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살아남은 소가 한 마리도 없다”(『인조실록』 14년 8월 15일)고 했고, 한 달 뒤엔 한양까지 퍼졌습니다. “우역(牛疫)이 서쪽에서 남쪽으로 번지고 한양에도 죽는 소가 줄을 이었다.”(『인조실록』 14년 9월 21일)

이듬해인 1637년엔 위에서 언급한 김령이 한탄했듯이 삼남(충청ㆍ전라ㆍ경상) 일대까지 확산해 “삼남에 우역이 크게 번져 남은 종자가 거의 없어질 정도”(『야언기략』)였고 최명길은 인조에게 “소 역병의 재앙이 매우 혹독하니, 하늘의 뜻이 백성의 목숨을 끊으려는 듯합니다” (『인조실록』 15년 8월 29일)고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우역이 크게 번져, 한 마을 (소가) 한두 마리도 없다”, “(임진왜란ㆍ병자호란 같은) 병란의 피해보다 심하다”, “만고(萬古)에 없었던 우역” 등 당황해하는 조정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양사가 제향(祭享)에 말린 꿩으로 중포(中脯·제사에 쓰는 포)를 대신하자고 계청하여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었는데, 최명길이 아뢰기를, ‘꿩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 될 듯하니 노루·사슴·돼지 세 가지를 그때그때 있는 대로 취하여 중포를 만들어 쓰자’ 청하자, 상께서 ‘돼지포를 쓰기는 미안하다’ 하여 노루와 사슴만을 쓰게 하였습니다.”(『인조실록』 16년 5월 7일)

왕실이 이런 상황이니 민간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혼례에도 소고기 대신 닭이나 꿩고기, 아니면 생선 등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필사적 대응 ①

소가 사라지는 것은 단순히 먹거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는 식량으로써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농기구이자 비료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소를 이용해 밭을 갈았고, 소의 똥은 거름으로 유용했습니다. 우역 때문에 소가 떼죽음을 당하자 당장 농업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국가 산업이 멈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우역에 맞선 조정은 일단 전국 각지에 소의 도살을 엄금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피해지역의 소나 돼지를 몰살시키는 지금의 방법과는 다르죠. 현재의 병리학 개념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조선은 도살을 허가할 경우 소의 종자 자체가 끊어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우역에 쓰러지기 전에 먼저 잡아먹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전국 각지에서 도살이 횡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역이 발생하면 일시적으로 소값이 폭락했다가 다시 치솟곤 했습니다.

“(우부승지) 이경증이 말하기를 ‘우역이 크게 번져 한 마을에 (소가) 1~2마리도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 그것을 갈면 앞에서 5~6명이 끌고 뒤에서 한 사람이 밀어 소의 힘을 대신할 수야 있지만 다만 먹을 것만 없어질 것이 걱정입니다.’ 국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땅을 디뎌 어찌 깊이 갈 수 있겠는가.’ 경증이 말하기를 ‘충청도는 봄보리를 심은 곳이 많다고 하지만 경기도는 한 마을에서 한 두 곳도 갈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역의 재앙은 8도가 다 같아서 가을갈이를 못 하였으니 봄 농사를 알 만합니다. 혹 사람이 대신 갈더라도 남은 힘이 이미 다하였고 철이 이미 늦었으니 논밭을 갈아 일군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올해는 여물더라도 앞으로 이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5년 4월 27일)


결국 조정은 우역에 감염되지 않은 제주도에서 소를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당시 제주도엔 약 2만1000마리가량의 소를 키우고 있었는데 조선 조정은 1637년 하반기에 제주도에서 소를 가져와 경기도의 각 군현에 100마리씩 나눠줬습니다. 제주도가 우역 청정지대였던 것은 바다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듬해까지 살아남은 것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637년 겨울이 되면 이마저도 어려워집니다. 우역이 제주도까지 확산했기 때문입니다. 제주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키우던 2만1000마리의 절반가량이 폐사했습니다.


조선의 필사적 대응 ②

임진왜란 후 조선 조정은 일본과 교역하는 것을 꺼렸습니다. 다만 대마도의 줄기찬 요청이 이어지고, 나름 성의를 보이자 못 이기는 척하고 부산에 왜관을 열어 제한적인 교역을 허가했죠. 하지만 이때는 조선이 먼저 손을 내밀기로 합니다. 더는 체면이나 명분을 따질 겨를이 아니었던 것이죠. 비변사의 요청을 왕이 수락하면서 조정에선 일본 대마도를 통해 일본 소를 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대마도에는 소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값이 몇 냥의 은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본국의 사정을 알려 거듭 소를 무역하겠다고 하면 대마도주는 반드시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대마도의 소가 부족하면 널리 이웃 섬에서 무역하여 부응할 것입니다.”(『왜인구청등록』 인조 15년 8월 10일)

하지만 이듬해 5월부터 일본 나가토국(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우역이 시작되면서 이마저도 틀어집니다. 이 우역은 일본 관서지역 전체에 퍼지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연구자들은 아마도 부산-대마도-일본을 통한 무역 루트를 통해 우역이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시기는 제주도가 우역에 감염된 1637년 겨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조선은 당시 우역의 청정지대였던 몽골로 눈을 돌립니다. 최명길이 사은사로 떠나 청나라의 허가를 받은 조선은 몽골로 소 매매 교섭단을 보냅니다. 우역 전 한양에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면포 10필(은 10냥) 전후였고, 우역 때는 30~40냥을 웃돌았습니다. 역시 우역으로 큰 피해를 입은 만주의 심양도 은 30냥 정도였는데, 몽골은 20냥 이래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사절단에게 약 1900냥가량을 줬으니 90~95마리 정도를 기대한 셈입니다.


성익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은 1638년 2월 11일 떠나 5월 24일 한양에 당도했는데, 그들이 가져온 소는 기대치보다 두 배 많은 185마리였습니다. 우역의 피해로부터 멀리 떨어진 몽골의 가장 깊숙한 내륙지대까지 들어가 은 10냥 전후로 거래했다고 하니 정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역사책에서 크게 다뤄지지 않은 ‘소 사절단’의 활약은 조선 역사에서 손에 꼽힐만한 무역 거래라고 생각되는데 30년 후 영의정 정태화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병자년부터 정축년까지 죽은 소가 수도 없어 남아있는 종자가 거의 없었으므로 국가에서 성익을 시켜 몽골 땅에서 사 왔습니다. 지금 있는 소들은 모두 그 종자입니다.”(『현종개수실록』 4년 8월 戊申)

당시 소의 증식률이 30% 정도였다고 하는데 185마리의 소가 모두 살아남았다는 전제를 한다면 1663년 당시엔 1만420마리로 늘어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정축년 난리가 있은 뒤로… 소가 많이 번식되고 나서 지금은 오히려 민간에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현종개수실록』 1년 8월 17일) 라는 기록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 무렵엔 완전히 정축년 우역의 충격에서 극복한 상태였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시작된 조류독감으로 동아시아 모두 혼란을 겪은 적이 있는데, 교통과 무역의 발달로 국제 교류가 급증하다 보니 전염병의 국제화 역시 더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때는 대규모 전염병이 대개 30년에 한 번꼴이었다고 하는데, 최근 10년만 해도 조류독감, 메르스,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국회에서 방역청을 설치하자는 건의가 나왔는데,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해볼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https://news.v.daum.net/v/20190929050155891?d=y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결국 정의는이기고 언플은 언플로 망하리라...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사커좀비 19-09-29 11:37
   
기록에 나오는 "우역"이 구제역이지 않나 싶네요...
예전에 게르만을 서유럽으로 밀어내 로마를 멸망케하는데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훈족(흉노)이 갑자기 유럽대륙에서 물러난
원인을 대규모 구제역이 있지 않나라고 추측하는 학설도 있더군요...
촐라롱콘 19-09-29 12:29
   
반대로 정묘호란-병자호란 당시에는 그때까지 천연두에 취약했던
만주-몽골연합군으로 구성된 청나라군들이....당시 조선땅에도 만연되어 있었던
천연두에 대한 공포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종결짓고 철수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 친정했던 청태종 또한 인조의 출성항복을 받자마자
한양도성에 입성하지도 않고 삼전도의식 이후 3일만에 서둘러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시 명나라와 조선 또한 천연두로 인한 공포와 피해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인구가 비교적 희박했던 입관 이전의 만주-내몽골지역이 중심인 청나라보다는
어느정도 내성이 축척되어 있어... 그 당시 천연두를 경험한 지 얼마 안된 청나라보다는
치사율-대처법 등이 상대적으로 나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청태종의 아들이자 중원에 입성한 최초의 청나라 황제인 순치제 또한 천연두로 인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고.... 순치제의 아들인 강희제가 불과 7살의 나이에다가 4번째 아들임에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천연두를 일찍 경험하고 살아남아
천연두에 대한 내성이 생겼던 부분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